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관우)

유비와 제갈량은 왜 형주의 관우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중은우시 2017. 9. 3. 21:38

글: 화운초(和運超)


유비가 서천을 공격하여 취하는데 거의 4년이 걸렸다(210년-213년). 건안20년(215년), 유비는 이미 익주를 완전히 점겨한다. 손권은 다시 형주를 달라고 하고 쌍방은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조조는 기회를 틈타 서쪽으로 마초, 한수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다. 마초는 장로에게 투항하고, 한중도 쟁탈의 눈독을 들이는 대상이 된다. 조조는 유비가 점거하고 있던 서천을 교란시키고자 했으며, 이것이 바로 장비가 와구관에서 장합과 싸운 배경이다.


유비는 손권에게 양보를 하고, 계속 손유연맹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조조를 상대할 시간을 갖고 나중에 친히 북상하여 한중을 다툰다. 이것은 건안22년(217년)의 일이다. 장비는 장합을 격패시키고, 유비는 그 기세를 틈타 승리의 성과를 확대시킨다. 그러나 쌍방은 서로 이기고 졌다. 그래서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건안24년에 이르러, 유비는 양평관을 포기하고, 면수(沔水)이남의 정군산에 군영을 차린다. 하후연은 추격하여 공격해오고, 이 전투에서 노장 황충은 하후연 및 조위가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을 참살하여 조위군대의 예기를 꺽는다. 촉한의 대군은 북상하여 한수(漢水)에서 계속 대치한다. 그후 황충, 조운은 한수에서 조위군의 군량을 탈취하여 계속 승리를 거둔다. 조조는 친히 달려와 지원하지만 결국 물러나면서 끝난다. 유비는 한중이라는 요지를 차지했을 뿐아니라, 왕평과 같이 후기에 아주 중요한 장수를 얻는다. 한실부흥의 희망은 이제 막 형성되었다.


유비의 작전에 호응하기 위하여, 또한 "융중대"의 형주익주를 차지하고 그 후에 사천북부와 형주의 두 갈래로 공격하여 중원을 차지하려는 전략에 기하여 관우는 거의 동시에(모두 건안24년 즉 219년) 형주에서 행동을 전개한다. 아쉽게도 관우는 지나치게 교만하고 맹목적이었다. 그리하여 형주를 잃게 된다.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던 유리한 형세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후 촉한의 북벌대업은 계속 기산일대에 머물고 이를 돌파하지 못한다. 후세에 삼국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아쉬워하는 일막이다.


원래 맹우인 손권은 한때 유비에 호응하여, 친히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여 조위와 싸운다. 이는 유비가 형주의 일부분 영토를 양보해주고 타협했기 때문이다. 건안18년 정월 유수구에서 조조의 제2차진공을 막아낸다; 건안19년, 환성(皖城, 지금의 안휘성 잠산)을 탈취하고 조조의 제3차공격에 대항한다. 그러나 이때는 조조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중도에 돌아간다. 건안20년, 손권은 전력으로 합비를 공격하고, 결과는 거의 "소요진"에서 장료에게 생포당할 뻔한다. 건안21년 겨울, 조조는 다시 거소(지금의 의 안휘성 소현)을 기지로 하여, 수륙에서 대거 공격을 전개하고, 쌍방은 전후로 여러차례 전투를 벌인다.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손권은 유비의 행동에 호응해준 셈이다. 조조로 하여금 양쪽에서 전투를 벌이게 만들어 아주 머리아프게 만든다.


그렇다면, 만일 전체국면의 각도에서 보자면, 서쪽의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려 싸우고, 동쪽의 손권은 합비를 차지하려 싸운다. 그런데, 관우는 조위가 반복되는 소모전을 보고 기회라고 생각하여 가운데에서 공격하였으므로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행동의 결과는 완전히 조조,유비,손권 3자간의 교착국면을 바꿔버린다. 조위는 병력배치를 변경하고, 손권은 휴식을 취하면서 정비할 시간을 갖게 되고, 유비는 한중을 차지하고나서 마음을 놓게 되어, 손권이 거꾸로 기회를 틈타 공격하여 형주를 기습공격하여 차지할 수 있게 해준다.


건안24년(219년), 유비는 한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의자(義子) 유봉(劉封)과 촉의 장수 맹달(孟達)을 보내 상용(나중에 형주에 귀속된 것으로 취급되나 원래 상용은 한중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다. 아래의 지도를 보라). 이때 유비의 명망과 영토는 전성기에 달하고 잠시나마 휘황한 시절을 보낸다.




이해 여름, 관우는 양번(襄樊)전투를 일으킨다. 조인은 번성에서 관우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어 조조에게 위급함을 알리고, 조조는 우금, 방덕으로 하여금 구원하도록 한다. 당시 팔월 여름가을 환절기에 비가 많이 내리고 한수가 크게 불었다. 그 결과 관우는 "수엄칠군(水淹七軍)"의 마지막 멋진 장면을 보여줄 수 있었다. 우금, 방덕을 생포한다. 이는 관우의 지모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번성이 주로 큰 비로 잠겨서 빗물이 성벽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중국의 기나긴 고대에 대다수의 성시는 원래 나무로 틀을 잡고 흙으로 성벽을 만든다. 절대로 고대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성루, 성문 그리고 길거리나 노면이 모두 드라마기지에서처럼 벽돌로 되어 있지 않다. 명나라후기, 심지어 청나라이후에도 이룹 유명한 성시의 성문, 성벽만이 겨우 벽돌이었다. 노면도 돌판길 혹은 쉐석로였다. 비록 중국고대에 벽돌성벽이 나타난 것은 늦지 않았고, 바로 삼국시기부터 일부 성벽은 벽돌을 사용했다. 손권의 도성인 건업은 돌과 흙을 혼합했다. 그리하여 석두성(石頭城)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전해지는 바레 따르면 궁성만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교적 많은 벽돌성벽도시가 나타난 것은 송나라이후의 남방이다. 명나라때 비로소 북방의 일부 대도시에서 흙성벽을 벽돌로 둘러싸기 시작한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경사직예지구의 주부현은 명나라에 벽돌로 둘러싸는 수리작업이 끝난 곳은 139개이다. 아주 정확하다. 다시 청나라때 황하범람이 비교적 엄중할 때, 강희, 옹정연간에 하남의 일부 현성의 수재로 성벽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모두 여전히 흙성벽이었다. 


당시 조인, 만총의 수하 일부 장수들은 어쩔 수 없이 투항한다. 조조는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삼국시대 삼국은 모두 기본적으로 세병제(世兵制)이다. 사가제(士家制)라고도 부른다. 조위가 가장 엄격했고, 주력부대의 가족은 모조리 업성에 거주하여 인질이 되었다. 만일 도망하거나 투항하면 왕왕 그 화가 가족에 미친다). 심지어 한헌제를 옮겨서 공격권에서 피하려는 생각까지 한다. 사마의, 장제는 극력 말리고, 손권과 연합하고, 동시에 서황, 조엄을 파견하여 번성을 구원하도록 건의한다. 다시 병력이 부족할 것을 우려하여, 서상, 여건, 은서, 주개등 전후로 12갈래의 병력을 증원한다. 이전에 조인은 남군에서 주유와 싸우고 있었는데, 서황도 이미 유사한 경험이 있다. 조인은 비록 번성에서 허장성세를 보였지만, 확실히 상황은 아주 심각했다. 전국에 위명을 떨치는 관우를 상대하면서 조조는 확실히 자신감이 부족했다. 연속하여 증원군을 보내고(객관적으로 말해서 이들 병력은 대다수가 신병이다. 적벽에서 패배한 후, 조조는 매년 전투를 벌여야 해서, 병력의 소모가 컸다. 그래서, 신군으로는 관우가 칠팔련 훈련시킨 정예병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했다) 다만 조위의 총병력은 나중에 십만가량이 이르렀는데, 이는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거꾸로 관우의 병력은 부족하여 번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전에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여 취하면서 매년 대치하느라 이미 일부 형주의 병력을 빼내갔다. 관우는 형주에서 이미 칠팔년을 있었고, 모집한 병력은 당연히 십만가량이 될 것이다. 유비를 지원한 삼만가량을 빼고,형주를 지키기 위하여 남겨둔 이만을 빼면, 진정 번성을 공격한 인원은 5,.6만 가량이다. 조인은 한편으로 방어를 잘하고, 둘째는 계속 이어지는 증원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관우는 조금도 우세를 나타내지 못한다. 당시에 번성을 반드시 취하려고 한다면, 유비와 제갈량이 그를 전혀 도와주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관우가 혼자서 어려운 국면을 지탱하게 만든 것은 정말 의외이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한 때로부터, 최후에 패배하여 피살될 때까지 전후로 반년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이 과정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하나가 된다. 지금 여러가지 견해가 나오고 있고, 일부 견해는 전통적인 견해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만일 간단히 결론을 내린다면, 유비집단을 동정하는 "대의실형주(大意失荊州)" 즉 실수로 형주를 잃었다는 입장에 서면, 진정한 '실수'의 첫번째 책임자는 우리의 거칠고 오만한 관우가 아니라, 오히려 한중을 취하고, 조조를 격패시키고, 한중왕이 되어서 기분이 좋아진 유황숙일 것이다.


전체 번성전투에서, 손권은 처음에 관우와 협력적인 태도를 취한다. 다만, 관우는 초기의 성공에 도취해 있었다. 손권을 극도로 멸시한다. 만일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손권이 관우에게 사돈을 맺자고 하는 것도 관우가 욕을 하며 거절하여 수치를 안긴다. 사서에서는 사자(使者)라고 되어 있고, 삼국연의에서는 제갈근(諸葛瑾)이라고 되어 있다(이는 일반적인 문학적인 허구가 아니라, 관우죽음의 진상에 대한 미묘한 가설이 관련된다). 이것은 손류연맹을 깨트렸을 뿐아니라, <삼국지. 관우전>은 <전략>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관우는 수엄칠군후 번성을 에워싸고 공격한다. 손권이 한번은 사신을 보내어 관우가 번성을 취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그러나 사자가 늦게 왔다고 한바탕 욕을 해댄다. 손권이 이를 듣고는 관우가 자신을 가볍게 여긴다는 걸 알게 된다. 이걸 보면 관우가 얼마나 멍청한지 알 수가 있다.


번성전투를 일으킨 배경을 보면,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관우는 유비가 손류동맹을 유지하기 위하여 손권과 타협하면서 형주의 강하, 장사, ㄱ약의 3개군을 넘겨준데 대하여 극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관우는 한편으로 유비의 한중에서의 승리에 호응하고, 다른 한편으로 형주의 세력범위를 확장하려고 생각한다. 남쪽의 3개군을 다 잃었으니, 조위쪽에서 원래 형주에 속했던 남양군을 빼앗아 오려 한 것이다. 여기에 번성을 포위공격하는 것이 금방 성공할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여러번 손권에게 미움을 살 짓을 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이런 명언을 남긴다: "나의 호랑이 딸을 어찌 개의 새끼에게 시집보내겠는가?" 사서에서는 "맥자감이(貉子敢爾)"라고 했다는데 뜻은 비슷하다. 당당한 오후(吳侯)를 개돼지로 비유한 것이다(다만 맥자라고 욕하는 것은 관우가 아무런 이ㅠ없이 손권 개인을 모욕한 것이라기보다는 한말 삼국, 양진시기에 오랫동안 북방중원인들이 남방인을 멸시한 통병을 드러낸 것이다 <진서>와 많은 저작에서는 모두 이런 남북충돌을 찾아볼 수 있다. 나중에 진황실이 남천후 강남인들은 북방인을 '창보(傖父)'라고 칭한다. 이런 남북갈등은 남북조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이시기 300년간의 오랜기간동안의 난세는 단순히 전쟁이라는 외부적요소뿐아니라, 심지어 깊은 문화구조라는 내부적요소도 있다. 무릇 중대역사사건은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관우는 원래 유가사상의 훈도를 깊이 받았고, '춘추대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권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내심으로 손권과 강동을 얼마나 멸시하고 얼마나 적대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만 손권이 어떤 사람인가? 사람됨을 보면 마음이 매우 좁다. 이때의 손권은 이미 적벽대전이전의 그 나이도 젊고, 앞뒤를 따져서 행동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관우가 혼인을 거절한 것이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손권은 유비가 이미 다독으로 사자를 보내서 관우에게 정략결혼을 요청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기는 원래 관우와 유비의 관계를 갈라놓으려는 악독한 계산이 있었다. 다만 손류연맹의 측면에서 보면 특히 관우가 조위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일을 처리한 방식은 확실히 중대한 실수가 있었다. 관우가 손권을 자기 손으로 조위에게 밀여낸 셈인 것이다. 손권은 결국 조조에게 관우를 토벌하는데 돕겠다는 뜻을 표시하게 된다.


조조는 그제서야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한편으로 한헌제의 명의로 손권을 "남창후, 영형주목"에 봉하고, 다른 한편으로 손권을 팔아먹는다. 그가 써보낸 투항서를 관우의 진영으로 화살에 달아서 쏘아보낸 것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두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부지리를 취할 생각이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관우는 '투항서'를 보고서도 경계하지 않는다. 첫째는 조조가 허위사실을 날조해서 손류동맹을 깨트리려 한다고 생각해서이고, 둘째는 그는 아직 이만명의 인마를 강릉과 공안에 남겨놓고 각각 미방과 사인에게 지휘하도록 하여 배후에서 기습할 것은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설사 후방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관우의 웅심장지는 먼저 번성을 취하고, 그 기세를 몰아서 북상하여 남양, 허도, 낙양등의 지방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여 일거에 조조를 제수(濟水, 지금의 황하) 이북까지 밀어부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여 조조가 한헌제를 데리고 도망치게 만들어, 형주를 키운 이후, 다시 병력을 남하시켜 강릉, 공안을 빼앗고, 심지어 강하, 장사, 무릉등까지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여 원래 대단치 않게 보았던 손권을 처리하려 한 것이다.


강동에 있어서, 형주를 되찾는 중임을 맡은 여몽은 기실 경력이 상당했다. 손책 시절부터 이미 참가했고, 주유가 남군을 공격할 때, 유수구에서 조조에 대항할 때, 여릉을 취하고 형남을 나눠가질 때등 여러 전투에 참가한 바 있다. 손권은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이 장수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여몽은 손권보다 3살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주 여몽을 기용했다. 노숙은 일찌감치 손권이 형주를 돌려받으려고 한다는 압박을 느꼈고, 별다른 생각없이 여몽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는 "사별삼일 괄목상대"라는 고사를 남긴다. 여몽은 점점 예전의 일개 무부(武夫)에서 지모와 용맹을 겸비한 대단한 인물로 성장한다. 그는 시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관우의 심리적인 약점까지도 파악하고, 병을 과장하여,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육손을 추천하여 자신을 대체하게 한다. 관우가 육손의 겸손하기 그지없는 서신을 받은 후, 수비하고 있던 2만명까지 북방으로 보내어 소모할 때, 손권은 여몽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정예병사를 상선에 매복시키고, 백의(白衣)를 입고 상인으로 변장하여, 강릉을 향하여 진격한다. 이것이 바로 저명한 백의도강(白衣渡江)이다. (백의는 한나라때 서민의 복색이다. 한무제는 상인을 탄압하였고, 동한의 한명제는 유가의 예제를 존중하기 위하여 일부 의관예의를 제정한다. 규칙은 규칙이고, 대체적으로 평민백성은 백색 마의를 입는다. 만일 여건이 좋은 상인이라면 청색, 흑색 또는 기타 색깔을 입었다). 강변을 지키고 있던 사병은 위장한 오나라군대에 속아서 모조리 포로로 붙잡힌다. 이때 강릉성은 비어 있었고, 혼란에 빠진다.여몽은 대학자 우번(虞飜)으로 하여금 공안(公安, 지금의 호북성 공안현 북쪽)의 사인(士仁)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을 쓰게 한다. 그리고 다시 사인을 시켜 강릉 남군태수 미방(芳)을 투항하도록 압박한다. 여몽은 강릉으로 진입하여 관우와 부하의 가족을 모조리 체포하고, 후하게 대우해주며, 명을 내려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도록 한다. 함부로 백성들의 집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빼앗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비록 강동에서 형주를 기습한 것이기는 하지만, 현지 백성들은 동오에 대하여 전혀 항거하지 않았다.


관우는 서황(徐晃)과 동향이다. 서로 교분이 있었다. 관우는 자신이 의리있는 사람이므로, 개인적인 관계로 그를 다독이려고 했다. 그러나 서황은 신병들을 데리고 출전한 것이어서 처음에는 관우와 감히 싸우려고 생각하지 못하고 조조의 서신이 올 때까지 대치하고 있었다. 손권이 이미 손을 썼다는 것을 알고는 전체사병의 사기가 올라갔고, 그제서야 비로소 관우와 안면을 바꾼다. 관우는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여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고, 도중에 강릉이 함락당했다는 것을 알아서 더더욱 당황한다. 사람을 보내어 여몽과 연락했는데, 여몽은 사자를 환대하고, 그를 장병들의 집으로 데려가서 위문하게 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서신을 적어 후대받고 있다고 알린다. 사자가 관우의 군영으로 돌아간 후, 부하들은 사방으로 도망친다. 금방, 손권은 육손을 파견하여 이릉(이금의 의창시 이릉구), 자귀(지금의 의창시 자귀현)을 점령하여, 관우가 사천으로 들어갈 퇴로를 차단했다. 관우는 방향을 바꾸어 상용의 유봉, 맹달에게 구원을 청하나, 거절당한다. 그리하여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곤경에 처하게 되어 할 수 없이 서쪽으로 도망쳐 맥성(지금의 당양시 동남쪽)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관우는 남은 소수의 기병과 맥성에서 포위망을 돌파하여 서쪽으로 장향(璋鄕, 지금의 당양 동북쪽)으로 도망친다. 손권은 주연(朱然), 반장(潘璋)을 보내어 길을 막는다. 관우부자는 관장의 부장인 마충(馬忠)에게 생포된다. 용맹하기 그지없던 관우는 참수를 당한다. 여몽은 형주탈취라는 이 중대한 사명을 완성한 후, 손권의 정식 봉상을 받기도 전에 병이 발작하여 사망한다. 나이 겨우 42살이었다. 같은 해, 감녕, 장흠, 손교(孫皎, 원래는 손교도 여몽과 함께 도독을 맡도록 명을 받았는데, 여몽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손교가 임무를 해낼 수 있을 것같으면 그를 주장으로 삼고, 만일 자기가 임무를 해낼 수 있을 것같으면 자기를 주장으로 삼아달라고. 그렇게 해서 둘이 서로 견제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해달라고)등 대장이 모두 죽었다. 



천여년동안 관우의 최후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을 금치 못하게 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비록 관우가 만인의 적이라고 불리지만, 그는 기껏해야 여포, 마초같은 류의 맹장이고, 한 지방을 통치하는 임무, 총사령관으로서 공성약지(攻城略地)의 중임을 제대로 해낼 수는 없었고 더더구나 소위 중흥한실(中興漢室)을 이룰 큰 인재(예를 들어, 주유, 육손과 같은 류의)는 아니었다. 이 주제에 대하여 드러내서 얘기를 해야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유비가 형주를 왜 잃었는지, 관우가 왜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는지 그 진상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유비가 대업을 성취하는게 이렇게 곤란했던 이유중 아주 중요한 원인은 바로 유비 본인의 군사적 재능이 중등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을 그를 제외하고,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등 오호상장이 비록 하나하나 용맹하기 그지없지만, 모두 대군을 통솔할 총사령관의 재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토를 개척하는 중임을 맡을만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비가 형주를 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주유가 조조를 격파하는 천고의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고, 서천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유장이 스스로 나서서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유비가 요청을 받아 사천에 들어간 후에 안면을 바꾸어서 파촉지방을 취하는데도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게다가 방통이라는 오른팔을 잃었다) 만일 유비가 외부에서 강제로 사천을 공격해 들어갔다면 아마도 훨씬 더 힘든 국면이었을 것이다. 이런 미묘한 세부사항이 기실 촉한 기업에 곤란이 많았던 근본적인 약점이다. 유비의 사후에 다시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제갈량이 스스로 그다지 뛰어난 분야가 아닌 군사적 총사령관을 맡는다. 촉한의 전체 진영을 살펴보면 실재로 이미 이런 총사령관의 자리를 맡을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유비가 발굴한 위연이라면 맡을만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제갈량은 혼자서 권력을 독점하는 걸 좋아했다. "장수와 재상간의 갈등"은 전통적인 문제점이다. 제갈량은 일찌감치 정교하게 계획을 짜서, 역사가 위연에게 그가 총사령관의 재목임을 드러낼 기회를 주지 못하게 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유봉, 맹달의 방릉(房陵, 지금의 호북성 방현)과 상용(上庸, 지금의 호북성 죽산현)에서의 상황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유봉과 맹달은 확실히 이 위촉오 삼국이 교차하는 지역을 막 점거했다(219년 상반기에 비로소 진주한다). 그리고 확실히 병력이 적었다. 가볍게 병력을 일으켜 조위의 영토를 넘어가 관우를 구원할 수 없었다.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맹달의 피살을 분석하는 글에서 이렇게 추론한 바 있다. 그러므로, 관우의 패망에서 더욱 주요한 책임은 확실히 유비와 제갈량의 "대의(大意, 소홀히한 실수)"에 있다. 


먼저, 관우이 번성출정은 그가 스스로 결정한 것일까? 관우의 행동은 완전히 제갈량의 "융중대"에 부합한다. 한중과 형주가 연합하여 출격하는 방침이다. 만일 유비와 제갈량이 관우가 북상하여 양양, 번성을 취하는 것을 알았다면, 분명히 적극적으로 지지했을 것이고, 심지어 유비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달려 형주로 와서 스스로 대국을 주재했을 것이고, 제갈량을 보내어 성도를 유수하게 했을 것이다. 당시에 비록 새로 한중을 얻었지만,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는 것처럼, 유비는 더욱 가까운 부하인 장비에게 맡기지 않고, 위연에게 맡겼다. 유비는 확실히 혜안을 지녔다. 위연은 한중을 15년간이나 지켜냈다. 조위는 계속 빼앗을 틈을 잡지 못했다. 바로 위연이 한중과 그 주변지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제갈양에게 장안, 관중지구를 기습할 것을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추단할 수 있다. 만일 유비가 병력을 이끌고 강릉으로 갔다면 첫째는 손권과 여몽이 경거망동할 수 없었을 것이고, 둘째는 조조에 대하여도 더욱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설사 관우가 서황에게 패배하더라도, 최소한 안전하게 형주로 되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관우가 반년이나 번성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왜 유비와 제갈량은 계속 지원하는 의도와 행동을 보이지 않았을까?


상해대학 교수인 주자언(朱子彦)은 일찌기 장태염(章太炎)의 견해를 인용한 바 있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가 오나라사람의 손을 빌어서 죽인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만 그 파장은 컸다. 관우의 죽음은 확실히 의문점이 비교적 많았다. 사람들이 의혹을 품고 깊이 고뇌하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여러 해동안, 삼국문화는 중국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십충팔구는 모두 유비, 관우, 장비의 세 사람은 형제처럼 친하다고 생각한다. 설사 진실한 역사에서는 금란결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상당히 친밀했다. 예를 들어 <삼국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잠을 잘 때면 같은 침대에서 자고, 친하기는 형제와 같았다."는 말이 자주 인용된다. 그리고 관우는 조조에게 붙잡혔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서, 같이 죽기로 맹세해서, 배신할 수가 없다." 사람들을 아주 감동시키는 말이다. 다만 문제는 이렇게 친밀한 관계가 시종여일했는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왕왕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는 영원한 친구가 없는 법이고,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다. 황건군을 토벌할 때부터, 관우가 형주를 차지하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를 때까지 이런 친밀한 관계가 예전과 같았을까? 주자언은 책에서 비록 장태염의 음모론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신중하게 봐야할 세부사항을 지적한 바 있다.


유비와 관우는 적벽대전을 전후하여 갈등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양으로 패퇴하면서 관우는 일찌가 원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만일 예전에 허도에서 사냥을 할 때, 그가 조조를 제거하는데 동의 해주었더라면, 오늘날 이렇게 궁박한 입장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관우는 마초, 황충의 지위가 그와 대등하게 되었는데도 그들을 무시한다(사서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관우는 황충을 폄하하여 "늙은 군인과 동료로 있는게 부끄럽다"고 말했다고. 그리고 마초는 관우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여하한 충돌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중원인의 서량군벌에 대한 배척을 암시하는 것같다. 이것은 이전에 조야의 상하에서 동탁, 여포, 이각, 곽사등을 극도로 배척하는 것까지 소급해볼 수 있다), 제갈량이 여러번 알선해서 충돌을 막았다. 관우가 동료들과 잘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유봉, 맹달이 관우를 도우러 가지 않고, 미방, 사인이 관우를 배신하고 버리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그외에 미방은 유비의 처남인데, 관우의 곁에 심어둔 것은 유비의 태도변화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비록 관우의 충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미방으로 하여금 수시로 일깨워주도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천하의 관우가 어찌 미방의 감시를 받으려 하겠는가?


그외에 관우는 유비가 무릉,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양보한 것에 대하여도 마음 속으로 불만을 갖고있었다. 만일 유비가 관우의 번성토벌을 북벌행동에 호응하는 것으로 보아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관우는 전투규모를 확대하였다. 첫째는 조조가 전력을 다하여 반격해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둘째는 손권도 전투에 가담할 것을 생각지 못했다. 그리하여 완전히 대규모전쟁으로 번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유비와 제갈량이 생각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그들은 이 실패하기로 예정된, 혹은 이미 실패한 관우를 구하러 가기를 원했을까? 주자언은 특별히 강조한다. 관우를 구하는 것과 형주를 구하는 것은 같은 개념이 아니라고. 감정적으로 말하자면, 유비는 관우를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비가 나중에 다시 번성전투에 참여한다면, 반드시 상당히 큰 규모의 군사적 투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형주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정치가로서, 그는 이 댓가를 자세히 고려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1년여 2년을 다시 준비하고 기다려서 다시 이릉전투를 일으키기를 결정한 것이다. 전체국면의 이익과 객관적인 현실 앞에서, 유비의 태도는 지극히 냉정했다고 볼 수 있다. 관우를 희생시킨 것이다.



만일 다시 심리적인 면을 악의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만일 관우가 정말 번성을 함락시키고, 조조를 황하이북으로 쫓아버린다면, 관우를 통제할 수 있을까라는 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사서는 확실히 유비에 대한 평가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고조의 풍도가 많이 있다." 형주를 차지한 후 관우는 이미 안하무인격이고, 성격이 불같은 면을 드러낸다. 만일 번성, 양양을 차지한다면, 조조를 격패시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에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유비는 확실히 어느 정도 꺼려졌을 것이다. 아주 중요한 점을 사람들이 놓치고 있다. 관우가 죽은 후, 친밀하기 그지없던 유비는 그다지 상심하고 힘들어하는 감정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절대로 소설에서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면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미지를 역사상 진실한 유비의 이미지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서에서는 방통의 죽음, 법정의 죽음에 대하여 유비는 모두 상심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자주 통곡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즉시 그들에게 작위를 내린다. 그러나 관우에 대하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비의 사람됨으로 보면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다. 관우가 형주에서 패배하여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언제 유비에게 전해졌는지는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형주를 잃고 관우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은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마치 조비에게서 전해들은 것같다. 맹달이 조위에 투항했다는 소식도 함께. 이렇게 중대한 군사적 정보를 촉한척에서는 즉시 보고받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아마도 맹달의 뒤를 이어 배반한 유봉이 처벌받을게 두려워서 정보를 봉쇄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확실하다고 볼 수가 없다.


외부상황이 어떠하든간에, 유비는 이렇게 중요한 형주의 전투상황을 충분히 주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219년의 반년여 시간동안 유비는 무엇을 하느라 바빴을까? 큰 사건으로 보면, 한중을 차지한 이후 유비는 그저 편안히 놀았던 것같다. 그외에 그는 첫째 공로가 적지 않은 법정이 병사하는 바람에 유비는 크게 상심했고 즉시 추봉한다. 둘째 한중왕이 된 이후 유비는 아마도 황제에 오르려고 준비하는데 바빴을 것이다. 이뿐아니라, 나중에 관우의 패망소식을 들은 후에도 진수의 <삼국지>에서 유비는 그다지 격동하는 정서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더더구나 즉시 추봉하지도 않았다. 관우는 유선의 재위말기에 비로소 장무후로 추봉된다. 이는 그를 폄하하는 느낌이 크다. 마치 관우가 말년에 번성전투를 일으키고, 형주를 잃은데 대한 나쁜 기억을 가진 것같이 보인다. 당시 유선은 다른 노신인 장비, 마초, 황충, 조운은 모두 포상을 했지만, 유독 관우만 폄하했던 것이다. 


유비가 관우에 대하여 냉담했을 뿐아니라, 우리는 다시 정명한 제갈량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보면, 유비의 조치를 완전히 옹호하고 있다. 관우의 패망위기에 대하여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비록 관우의 사람됨에서 일부 성격적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관우는 평소에 하층병사들과 같이 지내기를 좋아하지만, 명사귀족들에 대하여는 아주 멸시했다. 그런데, 제갈량은 바로 형주명사의 대표인물이다. 비록 사서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기록이 없지고, 오히려 제갈량은 여러번 글을 써서 관우와 마초, 황충의 충돌을 조정했다고 되어 있어, 최소한 제갈량이 관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정말 소설에서 쓴 것처럼, 손권을 대표하여 관우에게 정략결혼을 청하러 간 사람이 제갈근이라면, 관우가 그렇게 욕을 해댄 것에 대하여 제갈량은 마음 속으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제갈량은 제갈근과 어려서부터 떨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아주 깊었다. 제갈량은 황승언의 딸을 취한 후,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 제갈근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둘째아들 제갈교(諸葛喬)를 제갈양에게 양자로 보낸다(제갈량이 장강을 건너 손권에 유세하러 갈 때인지, 아니면 제갈근이 사천에 들어와 유비를 만나 형주를 돌려달라고 할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형제는 여러번 서신왕래가 있었다), 유비가 죽은 후, 대권을 장악한 건흥연간에, 황씨부인은 비로소 제갈첨을 낳는다. 제갈량은 이때 이미 마흔살이 넘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손권과의 연합은 제갈량이 계속 견지한 전략이다. 그런데 관우는 번성에서 조조를 토벌하면서 손권과의 갈등이 격화되어 전투까지 벌이게 된다. 이는 제갈량의 의도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제갈량은 유봉, 위연, 이엄, 맹달과 같은 자들도 모조리 배척했는데, 어찌 안중무인격인 관우의 존재를 용인할 수 있겟는가? 이상의 여러가지 흔적들을 살펴보면, 관우의 죽음은 여러가지 모순이 하나로 모여서 나타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주는 삼국의 핵심전쟁지역이다. 관우의 죽음은 거의 각측간의 모순이 교차하는 것같다. 그래서 조위, 촉한, 손오의 세 당사자의 국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외에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측면에서 관우의 실패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관우가 형주에 있던 7,8년간 그가 명사 귀족을 무시하는 심리로 인하여, 그의 일처리태도는 귀족 사대부가 운집한 형주인사들의 불만을 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몽이 형주를 빼앗았을 때 전혀 반항하지 않았고, 심지어 부하사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이것도 관우가 형주에서 이미 민심을 잃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일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그의 위세로 국면을 억누를 수 있었겠지만, 일단 일이 터지고 나면 실패는 철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