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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386년: 황제풍년, 이 해에 재위한 황제만 13명이다.

by 중은우시 2018. 8. 1.

글: 논역사(論歷史)


1. 진(晋)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 :영강(寧康)11년


자는 창명(昌明), 간문제(簡文帝)의 아들. 간문제의 사후에 즉위하여 24년간 재위한다. 그는 술을 마신 후에 농담을 했다가 장귀인이 궁녀에게 명하여 이불로 덮어서 질식사한다. 향년35세이다. 융평릉(隆平陵)에 묻혔으며 위치는 강소성 강녕현 장산의 서남쪽이다. 사마요가 즉위할 때는 나이가 겨우 10살이었고, 저태후(褚太后)가 수렴청정한다. 사마요의 재위기간동안 사마도자(司馬道子)와 환온(桓溫)의 아들 환현(桓玄)이 정무를 보았다. 사마요는 주식에 탐닉하여, 하루종일 궁중에서 향락을 즐겼고, 조정은 돌보지 않았다. 사마요이 사후 묘호는 열종(烈宗)이다.


2. 전진(前秦) 애평제(哀平帝) 부비(苻丕) 태안(太安) 2년


비수지전에서 전진이 대패하고나서, 부견은 곧 죽는다. 부비가 황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마음 속에 요장, 모용수와 싸우는데 관한 명확한 계획이 없었다. 태안2년 칠월, 포한 저족이 부등을 옹립하니, 부비는 그저 부등의 작위를 올려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서연군대와 전투에서 패번하여 도망하던 중에 진나라의 양위장군 풍해의 습격을 받아 비명에 죽는다.


3. 전진 고제(高帝) 부등(苻登): 태초(太初) 원년


태안2년 부등은 도독농우제군사에 옹립되어, 부대를 이끌고 후진(後秦)과 전투를 벌인다. 매년 계속된 혼전으로 군량이 부족했다. 부등은 사병을 격려하며 죽어라 전투를 벌이며, 사람을 군량으로 삼는다. 부비가 피살된 후에는 황제로 옹립된다. 부등은 부견을 아주 미신하여, 매번 전투 전에는 부견의 상에 절을 했다. 나중에 후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피살당한다.


4. 후진(後秦) 무소제(武昭帝) 요장(姚萇): 백작(白雀) 3년, 나중에 건초(建初)원년으로 고침


자는 경무(景茂), 남안(南安) 적정(赤亭)사람. 강(羌)족. 요익중(姚弋仲)의 아들. 요장의 선조는 대대로 강족의 추장이었다. 부견때 전진에 귀순한다. 관직은 용양장군에에 오르고 익도후에 봉해진다. 전공을 많이 세웠다. 383년, 부견이 비수지전에서 대패한 후, 다음 해에 요장은 반란을 일으켜, 위북에서 거병하고, 자칭 대장군, 대선우, 만년진왕이 되고, 연호를 백작이라 한다. 나중에 북지를 점거하고 군량을 모으고 병력을 길러서 전투를 대비한다. 전진과 서연의 전쟁을 관전한다. 385년 전진이 패배하자 요장은 그 기회를 틈타 장안을 점령한다. 부견은 패주하고, 요장은 부견을 예천 오장산에서 포로로 잡는다. 나중에 부견을 신평에서 죽인다. 백작3년 요장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진이라 한다. 수도를 장안으로 하고 연호를 건초로 고친다. 역사에서 후진이라고 부르는 왕조이다. 요장의 재위기간동안 매년 농동에 있는 요등과 교전을 벌이는데 연전연승한다. 건초8년에 죽는다. 시호는 무소황제이고, 묘호는 태조이다. 원릉(原陵)에 매장되었다.


5. 후연(後燕) 성무제(成武帝) 모용수(慕容垂) 건흥(建興)원년


모용패(慕容覇)라고도 부른다. 자는 도명(道明)이고, 선비족이다. 384년 후연을 건립하고 성무황제라 한다. 연호는 연원(燕元)이었다. 모용수는 전연의 개국황제인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이고, 모용위(慕容暐)의 숙부이다. 그는 모용황의 총애를 받았으며, 나중에 모용각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다. 그는 전봉도독, 전연 오왕이었다.

369년, 진나라장수 환온이 전연을 공격하였으나, 방두에서 후퇴한다. 모용수는 3만기병으로 양읍까지 추격하며 진군을 대패시킨다. 나중에 태부 모용평에 의하여 쫓겨나서 처자식을 데리고 전진에 투항한다. 비수지전에서 양양으로 진격하며 암중으로 실력을 보존한다. 전진의 패배후에 반란을 일으킨다. 모용수는 선비, 오환을 규합하여 후연을 건립한다.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업을 공격하여, 1년후에 업성을 빼앗는다.

386년, 중산을 수도로 정하고, 393년 모용홍의 서연정권을 멸망시킨다. 북위왕 척발규의 동생을 억류하여 원래 번속인 북연과의 관계가 악화된다. 395년 태자 모용보가 북위를 정벌하나, 참합피전투에서 대패한다. 다다음해에 모용수가 반격하나 친정 도중에 병사한다.


6. 서연왕(西燕) 단수(段隨): 창평(昌平) 원년


서연의 황제 모용충이 피살된 후, 서연왕에 옹립된다. 삼월에 모용항(慕容恒), 모용영(慕容永)이 정변을 일으켜 죽임을 당한다.


7. 서연왕 모용기(慕容覬): 건명(建明) 원년


딘수가 피살된 후, 연나라의 군주로 옹립된다. 선비족을 이끌고 동으로 돌아가서 임진에 이르러 10일간 연왕으로 있던 모용기는 모용도(慕容韜)에게 피살된다. 

8. 서연왕 모용요(慕容瑤) 건평(建平)원년


서연황제 모용충의 아들. 모용기가 피살된 후 황제로 옹립된다. 수일후에 모용영(慕容永)에게 피살된다.


9. 서연왕 모용충(慕容忠) 건무(建武)원년


서연의 창업군주 모용홍(慕容泓)의 아들. 삼월후 조운(刁雲)에게 피살된다.


10. 서연 하동왕(河東王) 모용영: 중흥(中興) 원년


전진이 연을 멸망시킬 때, 장안으로 옮겨와서 신발을 팔면서 살았다. 조운을 시켜서 모용충을 죽이고, 나중에 스스로 황제가 된다. 전진을 격패시킨 후 전진의 양황후(楊皇后)를 포로로 잡아서, 자신의 부인으로 삼고자 했으나 따르지 않자, 죽여버린다. 중흥8년, 모용수가 병력을 일으켜 모용영을 공격한다. 모용영은 포로로 잡힌 후 죽임을 당하니, 서연이 멸망한다.


11. 서진(西秦) 선열왕(宣烈王) 걸복국인(乞伏國仁) 건의(建義)2년


농서 선비족. 부친 걸복사번(乞伏司繁)은 전진의 천왕 부견에 의해 남선우에 봉해진다. 전진 건원12년 걸복가번이 죽는다. 걸복국인은 부친의 직위를 승계한다. 전진 건원19년 비수지전때 부견은 원래 걸복국인을 전장군으로 임명하여 선봉기병을 이끌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나중에 걸복국인의 숙부인 걸복보퇴(乞伏步頹)가 농서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부견은 걸복국인에게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가서 토벌하게 한다. 걸복보퇴는 거꾸로 걸복국인을 영접한다. 그리고 전진이 비수지전에서 패배하자, 걸복국인은 그 기회를 틈타 주변의 기타 부족을 병합한다. 전진 태안원년 부견이 요장에게 피살된 후, 걸복국인은 자칭 대도독, 대장군, 대선우, 영진하이주목이 되고 연호를 건의로 고치고 용사성을 도성으로 삼는다. 서진 건의4년 걸복국인이 사망하고, 시호는 선열왕 묘호는 열조라 한다. 동생인 걸복건귀(乞伏乾歸)가 승계한다.


12. 후량(後凉) 의무제(懿武帝) 여광(呂光): 태안(太安)원년


자는 세명(世明), 략양의 저(氐)족. 여파파(呂婆婆)의 아들이다. 십육국시기에 후량국(後凉國)의 건립자이다. 여광은 원래 전진의 장군이다. 전진 건원18년, 비수지전 전날, 천왕 부견의 명을 받아 서역을 토벌했다. 언기의 항복을 받아내고, 귀자를 격하하여 서역에 명성을 떨친다. 그러므로 멀리 있던 여러 나라들까지 그에게 귀순한다. 여광은 원래 귀자(龜玆)에 남으려 했다. 그러나 명승 구마라습이 말리고, 또한 부하들도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어해서, 군대를 되돌린다. 그러나 전진이 비수에서 패전한 후, 경내의 각 부족이 속속 반란을 일으키자, 여광은 서역에서 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전진태안원년 마침내 양주(凉州)를 함락시킨다. 386년, 여광은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연호를 태안으로 고친다. 그리고 자칭 사지절, 시중, 중외대도독, 도농우,하서제군사, 대장군, 양주목, 주천공이라 칭한다. 389년, 연호를 인가(麟嘉)로 고친다. 396년, 다시 천왕으로 고치고 국호를 대량이라 한다. 그리고 연호는 용비(龍飛)로 고친다. 재위말기에 내정을 돌보지 않아서 각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떨어져 나간다. 그리하여 망국의 화근이 심어진다. 용비4년 여광의 병이 위중하고, 태자 여소(呂紹)를 천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스스로 태상황제라 칭한다. 얼마후 사망한다. 시호는 의무황제이고, 묘호는 태조이다.


13.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拔珪) 등국(登國)원년


일명 섭규(涉珪), 십익규(什翼珪), 익규(翼珪), 개(開)라 했다. 북위의 개국황제로 선비족이다. 그는 대왕(代王) 탁발십익건(拓拔什翼犍)의 손자이고, 헌명제(獻明帝) 탁발식(拓拔寔)의 아들이다. 376년, 진이 대국을 멸망시킨다. 탁발규는 도망친다. 10년후 즉 385년, 15살의 탁발규는 전진이 멸망하고 북방이 혼란한 틈을 타서 다시 대국을 재건한다. 성락(盛樂)에서 즉위하여 왕이 된다. 그리고 다음 해 즉 386년 국호를 '위(魏)'로 고친다. 즉 북위이다. 연호는 '등국'으로 고친다. 398년, 그는 수도를 성락에서 대동(大同)으로 옮기고, 황제를 칭한다. 그의 즉위초기에는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말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걍팍자용하며, 형제들과 사이가 나빠진다. 그리하여 409년 결국 궁중정변으로 피살당한다. 향년 겨우 39세이며, 재위24년이었다. 탁발규의 시호는 도무제이고, 묘호는 태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