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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한)

한(漢)나라의 정부구조: 일국양부(一國兩府)

by 중은우시 2014. 8. 27.

글: 이중천(易中天)

 

한제국의 정부수뇌는 "삼공(三公)"이다. 

삼공은 바로 승상(丞相),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를 말한다. 승상은 최고행정장관이고, 태위는 최고군사장관이고, 어사대부는 최고감찰관및법집행관이다. 방국시대(邦國時代)에 천자지재(天子之宰) 즉 천자의 재상을 공(公)이라 부르고, 제후지재(諸侯之宰) 즉 제후의 재상을 상(相)이라고 불렀다. 진,한 두 나라에서는 승상, 태위, 어사대부를 합쳐서 재상(宰相)이라고 불렀다.

재상은 삼공이고, 따로 상공(相公)이라고도 부른다.

삼공의 아래에는 구경(九卿)이 있다. 즉, 정부의 장관이다. 장탕(張湯)은 정위(廷尉)를 맡은 적이 있고, 안이(顔異)는 대사농(大司農)을 맡은 바 있는데, 이것이 모두 구경이다. 구경은 반드시 9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경을 정경(正卿)이라고 부르는데, 그외에 열경(列卿)도 있다.

구경과 삼공은 모두 자신의 정무기구가 있다. 삼공은 부(府)라고 부르는데, 공부(公府) 혹은 상부(相府)라고도 불렀다. 구경은 시(寺)라고 부르는데, 경시(卿寺)라고도 불렀다. 황제는 궁(宮)이라고 부르는데, 황궁(皇宮)이라고도 불렀다. 황궁, 상부, 경시는 각각 맡은 정무를 책임졌다. 

 

사실상 황제, 삼공, 구경은 각각 업무가 분장되어 있었다. 황제는 국가원수이고, 재상은 정부수뇌이다. 구경은 중앙각기관부서의 장관이다. 구경의 권력과 지위는 삼공과 비교할 수 없다. 삼공은 좌이론도(坐而論道)하면, 구경이 작이행지(作而行之)한다. 즉 삼공이 의사결정하면, 구경이 그 명을 받아 집행한다. 

기실 황제로 재상과 비교할 수 없었다. 한나라초기 정무는 모두 재상이 책임졌다. 그들은 평소에는 독자적으로 업무를 보지만, 만일 대사(大事)가 있으면 삼공회의(함께 토론함)를 열어서 방안을 마련한 다음 황제의 비준을 받는다. 황제는 오일일조(五日一朝), 오일에 한번씩 조회를 연다. 황제는 그저 가부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어서, 고무도장이나 같았다.

이를 보면, 황제는 정부가 아니었고, 재상이 정부였다. 황제의 기능은 서방의 국회와 현재의 인민대표대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직권이 다를 뿐아니라, 기관단위, 업무인원과 경비조달원도 모두 달랐다. 황제는 궁정(宮廷)이고, 정부는 조정(朝廷)이며, 황궁의 직능부문은 상(尙)이라 부르고, 정부의 직능부문은 조(曹)라고 불렀다; 궁정의 경비는 공상세수(工商稅收)에서 왔고, 조정의 경비는 전부(田賦)수입에서 옸다. 전부가 많았고, 정부공금으로 썼다. 공상세수는 적었고, 황제의 개인용도이다. 궁중과 부중은 경위가 분명했다.

이것은 바로 말그대로 분정항례(分庭抗禮)이다. 그리고 제국에는 두 개의 정치중심(궁정과 조정), 두 개의 권력중심(황궁과 상부), 두 개의 최고권력(황권과 상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때 가장 좋은 방안은 군주입헌, 허군공화(虛君共和), 황제세습, 재상민선이다. 차선책을 취한다면 황제는 주권과 통일을 상징하고, 재상은 국가를 관리하고 정치상 일체의 실제책임을 진다. 즉 주권재군(主權在君), 치권재상(治權在相)이다.

전자의 선택은 불가능하다. 후자는 가능성이 있지만 제도로 형성되지 못했다. 유방이건 소하이건, 여후이건 조참이건, 모두 이런 관계를 규정할 수 없었다. 한나라초기의 무위(無爲)는 군신이 모두 상안무사(相安無事)하게 지나간다. 한무제는 웅재대략으로 큰 공을 세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반드시 정부의 권력을 빼앗아야 했다.

 

탈권의 주요대상은 승상이었다.

승상은 삼공중 지위가 가장 높았다. 금인자수(金印紫綬)를 쓸 뿐아니라,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래서 승상은 군후(君侯)라고도 불리웠다. 승상의 권력도 컸다. 황제의 결정에 반대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서한말기의 승상 왕가(王嘉)는 일찌기 한애제(漢哀帝)가 동현(董賢)을 가봉(加封)하는 조서를 돌려보내고 집행을 거부하었는데, 한애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무제 본인은 더더욱 승상의 발호를 친히 경험한다. 예를 들어 전분(田蚡)이 승상일 때, 거의 대권을 독점한다. 제국의 대소 관리는 모조리 그가 발탁하고 임명했다. 나중에 한무제가 도저히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이 임명하고 싶은 사람은 다 임명했는가? 나도 몇명 임명해보자.

이런 상황은 당연히 바뀌어야 했다.

한무제의 첫 조치는 어사대부를 이용하여 대항하는 것이다.

어사대부는 은인청수(銀印靑綬)이다 동시에 부승상이다. 다만 승상의 조수나 막료는 아니다. 예비승상이다. 즉, 승상의 직위가 비면, 관례에 따라 어사대부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아상(亞相)이라고도 불렀다.

이게 재미있는 점이다. 하물며 태위라는 직은 한무제가 즉위한 다음 해에 폐지시켜버린다. 재상삼부는 이제 재상이부만 남았다.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도 상관이 없었다.

한무제가 기용한 사람은 공손홍(公孫弘)과 장탕이었다.

이 수법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공손홍을 어사대부에 임명할 때, 승상은 설택(薛澤)이었다. 장탕이 어사대부일 때 공손홍은 이미 사망했고, 승상은 전후로 이채(李蔡)와 장청적(莊靑翟)이었다. 그 결과, 설택, 이채, 장청적은 모두 허수바이가 되고, 대정방침은 모조리 장탕과 한무제의 손에서 결정된다. 다른 사람들이 관여할 수가 없었다.

공손홍과 장탕이 승상을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두 사람이 한 명은 음험하고 한명은 만횡(蠻橫)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맡은 직무와도 관련이 있다. 어사대부의 주요직책은 문서를 관장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다. 실은 조정의 사무총장이나 감찰위원장이다. 만일 마음먹고 일을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조수이다.

어사대부에게는 조수가 두 명이 있다. 하나는 어사승(御史丞)이고 다른 하나는 어사중승(御史中丞)이다. 글자 하나 차이지만, 양자의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한나라제도에 따르면, 관직이름에 '중'자가 들어가면 모두 황궁안에서 업무를 본다. 어사중승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어사중승은 어사부의 주황궁대표처의 대표인 셈이다. 이런 조수가 승상에게는 없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먼저 어사중승에게 말하면 어사중승이 어사대부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다시 어사대부가 승상에게 전달한다. 어사대부는 황상의 뜻을 살피는데 승상보다 유리하다.

공손홍과 장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원인중 하나이다.

그러나 어쨌든 어사대부는 정부의 사람이다. 한무제가 권력을 빼앗으려면 궁정의 사람을 써야 했다. 궁정의 사람은 바로 궁정관(宮廷官)이다. 중조관(中朝官)이라고도 부른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상서(尙書)이다. 상서는 황제의 정치비서이다. 만일 상서에게 정무를 처리하게 한다면, 황제는 자신의 사람을 갖는 것이 된다.

그러나 상서의 지위는 실로 너무 낮았다. 반드시 더 고관을 보내야 했다.

그 고관이 바로 대사마(大司馬)이다.

대사마는 경제체제개혁을 전면적으로 추진하던 때(원수4년) 설치되었다. 기실은 바로 폐지된 태위이다. 그러나 더 이상 재상이 아니고, 비정식관직이 되었다. 그리고 장군의 관직위에 붙은 명예칭호이다. 예를 들어, 대사마대장군, 대사마표기장군, 대사마좌장군등...

대사마의 임무는 "영상서사(領尙書事)"(서한), 혹은 "녹상서사(錄尙書事)"(동한)이다. 즉, 상서의 업무를 지도, 통솔, 관할, 주재한다는 말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비서실장에 불과하고 겸직일 뿐이지만, 대사마의 정치적 대우는 삼공과 비견할만하다. 이런 비서실이 간단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사실상 대사마가 상서의 일을 통할하는 것은 점차 비서실을 의사결정기구로 변신시키겠다는 것이다. 다만 군국의 대정방침은 모두 상서가 토론에 참가하여 의견을 낸 후 결의하고나서 비로소 궁정이 조정에 보낸다.

확실히 이것은 또 하나의 정부이다. 단지 이 정부는 황궁안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대사마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은 모두 외척이다. 즉, 후궁의 친가사람들이다. 그들이 군사에 대하여 기획하려면 궁중에서 황제와 밀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다보니 대사마의 관청은 궁중에 설치하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는다.

 

이렇게 되어 제국에는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게 된다. 하나는 중조(中朝)로, 내조(內朝)라고도 부르는데, 궁중에 설치된다; 또 하나는 외조(外朝)로 부중에 둔다. 외조의 우두머리는 승상이고, 중조의 우두머리는 대사마이다. 두 조직이 함께 조정을 다스리는 것이다.

맞다. 일국양부이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가 있는 것이다.

기실 이런 표현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대사마믄 지위가 높고 권력도 크고 황제와 가깝다. 상서들은 궁중에서 돌아가며 당직을 서고 일을 하며 언제든지 부름에 응하고,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보고하고 성지를 받는다. 정보에 있어서 궁바깥에 있는 외조보다 훨씬 유리하다. 승상을 우두머리로 하는 외조는 이들과 대항할 수가 아예 없다. 그저 명을 받아 처리할 뿐이다.

이때부터, 승상은 허수아비가 된다. 나중에 이 직함마저도 취소되고 다른 것으로 바뀐다. 진짜 재상인가 아닌가는 '영상서사' 혹은 '녹상서사'인지 아닌지에 있다. 동산에 이르러, 다시 상서대(尙書臺)를 둔다. 이는 대각(臺閣) 혹은 대성(臺省)이라고도 부른다. 일국양부가 공개화되어, 공부(삼공부)와 대각(상서대)로 된다.

이것은 모두 한무제가 시작한 것이다.

한무제는 이에 만족했다.그는 마침내 권력집중에 성공한 것이다. 지방의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고, 다시 중앙의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대권을 장악하니 그는 하고싶은대로 할 수 있었다. 큰 뜻을 마음대로 펼 수도 있었지만, 많은 후환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