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염민(冉閔): 그는 한족의 대영웅일까? (2)

중은우시 2018. 10. 31. 18:26

글: andy


6. 염대지전(廉臺之戰): 연위(燕魏)간의 생사결전


얼마 후, 선비족 연왕 모용준(慕容俊)은 동생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기병 십여만을 이끌고 남하하여 염위를 공격하게 한다. 염민의 수하들은 모두 '날카로운 칼끝은 피하여, 상대가 교만하게 만든 후, 기회를 봐서 군대를 보충하여 공격하자'고 한다. 그러나 염민은 그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리고 호언장담한다. "이번 전투로 유주를 평정하고, 모용준을 참하겠다."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연군과 결전을 벌이기로 한다. 신하들은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고, 포로로 잡혀서 곤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목을 매어 자결한다. 모용각의 대군이 상산 위창의 염대까지 온다. 이렇게 하여 염위와 연국간에 생사의 결전이 벌어지게 된다.


염민의 용기와 전투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기껏 만명의 굶주리고 피로한 보병,기병을 데리고 모용각의 수만 철기와 싸우면서 십전십승을 거둔다. 그리하여 용맹하기로 이름난 선비족 기병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염민은 병사들의 앞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용맹하게 앞으로 돌격하며, 왼손에 쌍인모를 들고 오른손에는 구극을 들고 친히 삼백여 수급을 벤다. 그 후에 도박을 걸어 전력을 모아서 연군의 중군을 공격한다. 총사령관인 모용각을 죽이거나 생포하려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소수로 다수르 이기고, 약군으로 강군을 이긴 기적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모용각의 오천 연환마방진은 강력하게 막아왔다. 염민과 모용각은 이미 서로 아주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심지어 이미 그의 신변에 있는 참군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모용각의 강력한 중군전진을 뚫지는 못한다. 연나라의 좌우 양군이 적시에 도착하여 삼면에서 협공하자, 염민의 군은 대패하게 된다. 칠천여명이 참살된다. 연군은 염민을 여러 겹으로 포위한다. 염민은 힘을 다하여 포위망을 뚫고 동쪽으로 도망친다. 그러다 말이 힘을 다하여 생포된다. 염대지전의 결과는 모용각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자신도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면서 승리를 거둔다. 선비족의 연이 중산, 상산 및 양국 일대를 차지하게 된다. 염위의 주력은 이미 모조리 무너졌고, 이제는 업도만이 외롭게 남아 있게 된다.


모용각은 염민등을 계(薊)로 보낸다. 연왕 모용준은 사면해준다. 그리고 그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노복하재(奴僕下才), 망감칭제(妄敢稱帝)"(노비에 비천한 재주로 함부로 황제를 칭했다). 그러자 염민이 대노하여 말한다: "너희는 오랑캐 금수와 같은 무리로 여전히 황제를 칭하는데, 하물며 나는 중토의 영웅인데 왜 황제를 칭하지 못한단 말인가1" 연왕이 노하여, 채찍으로 300대를 때린다. 긜고 요동 용성으로 보낸다. 연왕 모용준은 선비귀족의 우월적인 심리로 비천한 한족 유민의 후예인 염민이 비록 갈호 석씨종실의 양손이라는 신분이 있지만 석씨의 가노일 뿐이라고 여겨서 '노비하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황제를 칭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염민은 '자신은 선진문명의 한족이고 오랑캐와 다르다'는 종족우월감으로 대답한다. 한달여후, 도호전신 염민은 용성의 갈경산에서 참해진다. 향년 약 30여세이고, 염위를 세운지 2년 두달여만이다. "큰 가뭄과 메뚜기떼가 창궐한다. 연왕 모용준은 염민이 장난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수개월후 사신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시호를 무도천왕(그의 후인들은 대위평제라는 시호를 주었다)라 하니, 그날로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사람의 무릎 위까지 왔다."


선비족 연왕 모용준이 위제 염민에게 시호를 추서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염민의' 도호(屠胡)'라는 야만적행위는 중원한족의 호갈족(胡羯族)야만적통치에 대한 반발정서에서 나온 것이고, 한족백성들은 염민의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동정, 안타까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미 중원을 차지한 연왕 모용준으로서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밖에 없었고, 부득이 민심에 순응해서 민심을 얻어야 했다. 둘째, 염민과 그이 염위는 강적에 둘러싸인 험악한 형세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고생을 하면서 고군분투하여, 싸우고 버텼다. 과감하게 소수로 다수를 이기고자 덤볐고, 반세기동안 갈족으로부터 모욕, 유린, 멸시, 살륙당해오면서, 개돼지 취급을 받던 한족을 이끌고 위풍을 세웠으며, 시종 두려움없는 전투정신을 드러냈다. 당시 가장 용맹하다넌 선비의 철기조차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간담이 서늘했고 절대 무시하지 못했다. 염대의 호한대결에서 염민이 비록 패망했지만, 승자인 모용각이 연나라 명장으로 당시 가장 걸출한 장수, 전신중 하나라고 불리웠지만, 병력이 몇배에 달하는 절대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손실을 입으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염민이 포로로 잡힌 후에도 늠름하게 연왕 모용준을 대했고, 호기가 있었고, 죽을 지언정 굽히지 않았다. 모용준도 그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염민을 신으로 본다(귀신만이 장난을 칠 수가 있다), 그리고 그에게 '천왕'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를 통해 중원한족의 마음을 다독이려 한 것이다.


7. 염위가 망하고, 선비족 연국이 굴기하다.


염민이 포로로 잡힌 후, 선비족 연군은 업도로 진격하여 포위한다. 성밖을 지키고 있던 투항해온 호갈족들은 혹은 도망치고 혹은 투항했다. 염위이 대장군 장간(蔣干)과 태자 염지(冉智)는 성문을 걸어잠그고 굳게 지킨다. 업에는 대기근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먹는 상황이 벌어진다(人相食). " 갈호조나라의 궁인들은 거의 모조리 잡아 먹힌다(故趙時宮人被食略盡)" 장간은 동진의 안서장군 사상(謝尙)에게 사신을 보내어 투항할 것을 청하며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사상은 구원할 생각이 없었고, 흉노한(전조)이 서진을 멸망시킬 때 빼앗아 가고, 갈호조와 염위의 수중으로 차례로 넘어간 전국옥새(傳國玉璽)에만 눈독을 들인다. 3개월여 지키고나서 성이 함락된다. 염위의 황후 동씨(董氏), 태자 염지등이 포로로 잡혀 연나라에 투항한다. 염위는 멸망하였는데, 나라를 세운지 겨우 2년반만이었다.


연왕 모용준은 동씨를 봉새군(奉璽君)에 봉하고, 염지를 해빈후(海賓侯)에 봉하다. 2년후, 모용준은 모반죄로 해빈후 염지를 주살한다. 1990년에 하남성 언사에서 출토된 북위 염화(染華)의 묘지명을 보면, 염민의 후손(아들 염예, 손자 염흥, 증손 염아, 현손 염화)는 모두 선비 연나라(전연), 북위등 북방 호족정권에서 관리를 지낸다. 아무도 동진이나 남조의 한족정권으로 가서 관직에 종사한 사람은 없다. 염예(冉叡)는 연나라의 산기상시, 해명후가 되고, 염흥(冉興)은 북위 안원장군 전중급사, 포음백이 되며, 염아(冉雅)는 북위 광록경, 북평후가 되고, 염화(染華)는 북위의 진원장군 사성교위가 된다.


[부록: 염위의 업도에서 "옛 갈호조의 궁인이 모조리 잡아 먹혔다"는 기록의 진상]


역사기록에 따르면, 갈호조의 석호는 업궁에 각양각색의 궁녀 수만명을 두었다. 저족 추장 포홍이 간언할 내용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처와 딸 10여만을 빼앗아서 후궁을 채웠다." 가장 많을 때는 십만여명이었을 것이다. 석준때부터 보국대장군 석민이 계속 대부분의 궁녀를 부하의 처로 주거나 혹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염위말기 업궁에는 최소한 여전히 만여며은 남아 있었다. "엣 갈호조의 궁녀들이 거의 모두 잡아 먹혔다"는 것에 대하여, 편집증적인 '염위옹호자'들은 '식인자'를 요동 연나라의 침입자인 모용부 선비족(白虜)이라고 강변한다. 기실 역사기록은 아주 분명하다. 이들 '엣 갈호조때의 궁녀'는 일찌감치 '큰 기근에 빠지고, 사람이 사람을 서로 먹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갇혀있으면서 구원병은 오지 않았고, 고립무원에 굶주림이 극에 달하여 염위의 업도 수비군은 '다 먹어버린' 것이다. 선비족 백로가 한 짓이 아니다.


중국역사이건 세계역사이건 매번 인류는 천재지변, 전쟁으로 기아에 굶주려 어쩔 도리가 없게 되면, 대규모의 '인상식'의 인감참극이 벌어지곤 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잡아먹ㄱ히는 것은 분명히 부녀자와 노약자이다. 이것은 '문명' 및 '야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십사사>를 읽어보면, '인상식', '이인충군식(以人充軍食, 사람으로 군대식량을 삼다)'는 일은 각 왕조마다 다 있었고, 호족, 한족을 가리지 않는다


<진서.팔왕전>과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팔왕지란'때 진나라 하간왕 사마옹의 휘하맹장 장방은 "일찌기 낙중의 관사노비 만여명을 서쪽으로 데려가서 군중에 먹을 것이 없으면, 사람을 죽여서 소말고기와 섞어서 먹었다." 그리고 '영가지란'때 갈호 석륵의 군대는 고현 영평성에서 진군 십여만을 추격섬멸할 때, '진군 포로의 시신을 불태워서 먹었다"는 짓을 했다. 그러나 앞장섰던 것은 바로 흉뇨한(전조)의 동래공, 정동대장군 왕미(청주 동래의 한족)의 동생인 흉노한의 맹장 왕장(王璋)이다. 왕장과 장방은 모두 순수한 한족이면서 먹은 것은 모두 자신의 동포였다.


편집증적 '염민옹호자'는 동진의 손성이 편찬한 <진양추>와 북송의 왕흠약이 편찬한 <책부원귀>에는 모두 '팔왕지란'때 '선비백로'가 10만한족여성을 약취해가서, "밤에는 간음하고(夕則姦淫), 낮에는 삶아먹었다(旦則烹食)"했으며, 이들을 "두 다리를 가진 양(兩脚羊)"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자료를 살펴보아도, 두 책에 모두 이런 기록이 없다. 오히려 <진서.열전제9, 왕준전>에 따르면 이런 기록이 있을 뿐이다: 진혜제 영흥원년, 진나라의 안북장군, 도독유주제군사 왕준(王浚)은 단부선비(段部鮮卑)의 선우이자, 진나라의 요서공(遼西公) 단무물진(段務勿塵)와 본부의 호기(胡騎, 요동 모용부 선비족 백로가 아니다)를 이끌고 호진(胡晋)연합군 3만여명으로 당시의 권신인 승상, 황태제, 성도왕 사마영을 토벌하러 갔다. 왕준의 호진연합군은 사마영의 주둔지 업성을 함락시킨 후, 실인약탈을 자행한다. 선비호기는 현지의 부녀를 대거 붙잡는다. 돌아오는 길에 왕준이 이 일을 발견하고, '감히 부녀자를 끌고가며 숨기는 자는 참하겠다'는 명을 내린다. 그러자 선비병졸들은 처벌을 피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살인멸구한다. 그리하여 역수에 빠트린 자가 8천여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밤에는 간음하고, 낮에는 삶아먹었다'거나, '두 다리 달린 양'이라고 했다든지 하는 내용은 없다. 이것은 왕전히 편집증적 '염민옹호자'들이 마음대로 상상한 것이다. 기실 이 말이 나온 것은 인텃에 널리 떠도는 현대인이 염민의 이름으로 날조해낸 <토호격문>이다. "영흥원년(永興元年), 호구선비(胡狗鮮卑), 대략중원(大掠中原), 겁재무수(劫財無數), 노략한녀십만(擄掠漢女十萬), 석즉간음(夕則姦淫), 단즉팽식(旦則烹食), 천녀투강(千女投江), 역수위지단류(易水爲之斷流), 갈구지폭(羯狗之暴), 이한위양(以漢爲羊), 살지위량(殺之爲糧)" 그런 주장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8. 후세의 염민과 염위에 대한 기록과 평가


북위의 저명한 한족 사관(史官) 최홍(崔鴻)은 비록 2대에 걸쳐 북위를 섬겼지만, 한족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편찬한 <십육국춘추> 백권은 여전히 진나라의 연호를 쓰고 있다. 염위와 염민의 일을 비록 "석민"으로 <후조록>의 끝에 덧붙였지만, 기록이 아주 상세하고, 염위와 염민에 대한 기술은 명확하게 동정, 안타까움, 존경의 마음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조왕 석호의 국사(國師)이며 서역 귀자국의 고승인 불도징(佛圖澄)이 예언하기를 "극자성림(棘子成林), 장괴인의(將壞人衣)'(덩굴이 숲을 이루면 사람의 옷을 망가뜨린다)고 하여 염민(그의 소자는 극노이다)가 갈호조를 망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염위가 석조를 대체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정의성과 합법성을 인정해준 것이다. 그리고 "연왕 모용준이 염민을 참할 때 대가뭄이 들고 메뚜기떼가 수개월간 날뛴다. 모용준은 염민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놀라서, 급시 사람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시호를 무도천왕으로 하니, 그날 비와 우박이 내린다." 이것도 염민의 '출사미첩신선사'에 대한 동정과 안타까움과 존경의 뜻이 담긴 것이다. 염민이 권신의 신분으로 '도호령'을 내려 공공연히 한족(조인)으로 하여금 이족(국인)에 대하여 무차별적인 종족말살을 저지르게 한 것에 대하여는 최홍도 찬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특별히 이렇게 지적한다: "그때 코가 크고 수염이 많아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반이나 되었다." '도호'가 오히려 한족 자신을 다치게 했다는 말이다.


최홍이 기록한 염위와 염민의 일은 믿을만 하다. '호족을 치켜세우고 한족을 끌어내리는' 것이나 고의로 폄하하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최홍은 확실히 '진왕조를 정삭(正朔)'으로 보는 정통사학관의 영향을 받았다(그의 할아버지는 동진의 계승자인 남조 송에서 관직을 지냈다). 염민은 한족의 후예로, 비록 갈호조를 멸망시켰지만, 염위를 세워 칭제하고, 동진에 귀순하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참위(僭僞)라는 것이다. 유석(劉石)과 같은 류의 "역호(逆胡)"와 다를 바가 없다. 염민은 비록 갈호조의 굴묘인이지만, 동시에 갈호조의 계승자인 것이다.


후세의 사가들은 "염민이 석씨를 모조리 죽였다"는 것을 긍정한다. "석륵과 석호는 흉악하고 포악하여, 하늘이 염민의 손을 빌어서 갚은 것이다."라고 본다. 그러나 염민의 "도호"에 대하여는 거의 모두 부정적이거나 엄히 질책하는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어, 청말민초의 사학자 겸 문학가 채동번(蔡東藩)은 이런 말을 한다: "갈족이 비록 이민족이지만, 멀리보면 같은 종족이다. 반드시 모조리 없애고 남겨두지 않아야한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이 악독한 것인가? 이것을 참는다면 무엇을 더 참을 수 없단 말인가. 그가 조국을 생각했다고 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염민을 중국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에 대하여 무차별 종족말살을 저지른 극단적 대한족주의자 도살꾼, 살인자로 보는 것이다.


후세의 역대 각왕조의 관방사학계도 '정통'을 유지보호한다는 정치적 필요때문에, 염민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그를 모호하고 주변화시킨다. 근현대에서 지금까지, 관방사학계는 '오족공화', '각민족간의 조화'라는 정치적 필요때문에, 여진히 기본적으로 마찬가지태도를 취하여 염민에게 냉담하다. 그리하여 염민과 '오호난화'의 역사를 금기로 보고, 이 시기의 역사를 이성적으로 평술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리하여 역사드라마가 이렇게 빈번한 당금의 중국에서도 지금까지 염민이나 오호난화를 반영한 영화드라마작품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바로 이런 이유로 민간에서 청말민초이래로 '반청복명', '구제달로, 회복중화' 혹은 '열강입침, 중화부진'을 고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당금에는 '중화굴기, 중국몽'을 높이 외치기 위하여, 편협한 극단민족주의 심지어 극단 대한족주의 사조가 나타나서 염민을 한없이 받들어 염민의 깃발을 내걸기도 한다. 특히 현재는 역사관이 편집증적인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보급력이 강한 인터넷을 이용하여 염민을 "고의로 잊혀진, 중화한족을 종족멸절에서 구해낸 중화의 제일민족대영웅이고, 그의 지위는 악비, 문천상, 원숭환, 사가법등 정통 민족영웅들보다 위이다." 라고 한다든지, "역사에 염민이 없었다면, 현재 한족도 없다"라고 한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염민의 사람됨이 '불충불효, 불인불의'하다는 것을 회피하기 위하여(채동번이 이런 말을 했다: 염민은 부친의 음덕을 받아 석씨에게 길러지고, 높은 관직을 받고, 두터운 녹봉을 받았다. 개돼지도 주인에게 보답할 줄 아는데, 염민은 사람임에도 어찌 은혜를 배반하여, 자신을 아껴주고 자신을 길러준 사람을 오히려 잡아먹는단 말인가.) 게다가 역사상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상력만으로 선입견을 동원하여 극력 "염민은 석호의 양손인 석민이다; 부친 염양은 바로 석호의 양자 석첨이다"라는 사실조차 부인하려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모조리 호족정권의 사관(여기서는 북위의 한족사관 최홍과 북제의 한족사관 위수를 가리킨다)가 염민을 폄훼하기 위하여 거젓으로 날조해낸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고의로 염민이 갈호조의 권신이었다는 것도 감주고자 한다. 그가 "어려서부터 갈호조가 부친을 죽인 원수를 가슴에 품고, 20년간 적진에서 숨어지내면서, 결국은 갈호조의 통치에 반항하고 뒤집어엎는데 성공한 한족기의군의 영수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심해서 염민의 이름으로 <토호격문>을 조작한다. 그리고 청년 모택동의 이름을 빌어 <심지력(心之力)>등 위작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염민을 "한족이 쓰러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화하가 무너지려는 것을 막아냈다"고 하면서 염민을 "천사지영열(天賜之英烈)", "구국구민의 영웅"이라고 칭송한다.


9. 결어


염민의 30년에 걸친 짧은 인생을 살펴보면,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며, 강적에 둘러싸여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고군분투하여 약소한 인원으로 강대한 적을 상대해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었다. 백전중 단지 2번만 패배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전신(戰神)'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염민은 선비를 만나면 바로 패배했다. 그리고 선비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2번의 전투는 모두 전환점적인 것이었다. "양국지전"에서 선비족 연군이 잔조(殘趙)를 지원하여, 10만대군을 이끌던 전신 염민을 격패시킨다. 이때 염민은 거의 전멸당하여 이후로 더 이상 크게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염대지전"에서 염민은 1만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선비족 연나라의 '전신' 모용각의 수만철기와 맞붙는다. 결과는 전멸이고, 포로로 잡혀 수급이 잘린 것이다. 염위는 이렇게 멸망한다. 이를 보면 그의 지혜와 모략은 확실히 약간 부족한 점이 있다. 나라를 세운지 근 3년이 되어 가지만, 그에게 귀순해 오는 사람이나 그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 아주 적다. 그리고 나라경영을 잘 하지 못하여, 양식을 제대로 비축하지 못해서 유주 기주를 돌아다니며 양식을 구해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 선비족 '백로'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기실 염민은 갈호조에서 태어나 갈호조에서 자란다. 6살때 부친이 전사한 후, 더구아 직접 폭군 석호의 '양손'으로 길러진다. 그리고 석호의 총애를 많이 받는다. 어려서부터 철저히 갈호화 심지어 '석호화'한 한족후예일 뿐이다. 그는 어른이 된 후 용맹하고 잘 싸웠으며,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고, 냉혹하게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독단적이고 전행했으며, 자기 마음대로 일처리하여, 뜻에 어긋나면 바로 죽였다. 그의 일처리와 사람됨은 폭군 석호와 아주 비슷하다. 만일 당초 석준이 약속을 지켜서 그를 태자로 세웠더라면, 역사에 아마도 염민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염위는 없었다. 그저 갈호조를 승계한 후조의 태자 내지 후조의 황제 석민이 있었을 분이다. 염민은 일생동안 세번 성을 바꾸는데, 석민, 이민, 염민. 모두 황권야심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갈족이든 한족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성이 무엇인지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단지 '황권' 뿐이었다.


호갈정권 특히 석호의 폭정은 흉맹하고 극악했다. 중원지역의 한족에 50년에 걸친 포악하고 잔혹한 통치로 해악을 남겼다. 이것만 해도 천인공노할 일이다. 염민이 갈호조를 멸망시키고, 석씨를 모조리 죽인 것은 천지와 인심에 순응한 것이니 공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염민이 갈호조를 찬탈하고 멸한 것은 "한족을 종족말살의 위험에서 구원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황권야심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염민의 '도호'는 호갈육이가 상하 할 것없이 일치하여 그의 전권을 반대하는데 대한 실망에서 나온 궁여지책이다. 설사 무차별적인 종족말살령을 내리긴 했지만, 호갈족 종실이나 귀족 그리고 아직 관직에 있는 호갈육이의 중상층관리 심지어 '용등호위'는 죽이지 않았다. 그들에 대하여는 'ㄸ르면 살고, 거스리면 죽는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나중에 '국호를 위(衛)'로 고치고 성을 이(李)로 바꾸면서' "공, 후, 경, 교, 용등등 만여명이 양국으로 도망치다"라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까지 이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갈정권은 중원지역에서 50년간 횡행했고, 중원의 한족들은 크게 고통을 겪었다. 호한의 종족원한은 민간의 상하에 마른 장작처럼 누군가 불을 붙여주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한번 불을 붙이기만 하면 바로 퍼져나갈 상황이다. 염민은 그저 이런 민족갈등을 이용했을 뿐이고, 목적은 찬위하여 등극하는데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염민이 '도호'에 중상을 내리면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수십만의 호갈육이들만이 아니었다. '상을 받기 위하여' 많은 한족도 오살되거나 고살된다. '도호'로 인하여 일어난 도망, 전화와 기근으로 다시 수백만이 죽는다. 그중에는 한족도 적지 않다. 이런 '무차별종족말살'은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그후에 더욱 맹렬하고 피비린내나는 역방향의 종족보복이 불가피해진다. 염민의 '도호'는 한족을 구원해주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대규모이 종족말살보복의 화근을 심었을 뿐이다.


염민의 '도호'는 이민족에 무차별적인 종족말살을 시행했는데, 이는 중국역사상 최초이며, 후세에 미친 악영향이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번 '종족대도살에서 중원의 호갈족은 거의 말살된다. 그러나 병주, 기주의 북부 산악지대, 초원지대에는 소수의 후손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 선비화된 갈호족은 글호(契胡)라 불렀다. 북위의 척발규가 중원을 차지하려 공격할 때, 글호부는 직접 척발선비의 북방통일전쟁에 참여한다. 북위가 건립된 후, 글호인은 삭북의 변방을 지켰고, 유연(柔然)을 방어했다. 북위의 효문제 원굉은 한화정책을 쓰면서 낙양으로 천도하는데, 삼십년후 삭북에는 호이진군을 우두머리로 하는 '육진지란'이 발생한다. 글호부의 우두무리인 이주영(爾朱榮)은 난을 평정하면서 굴기하여, 한때 북위의 권력을 농단한다. 북위는 동위, 서위로 분열된다. 글호인인 후경(侯景)은 북위 회삭진의 수졸(戍卒)로 시작하여, 처음에는 이주영에 의탁했다가 나중에는 고환(高歡, 선비화된 한족. 북위,동위의 권신)에 의탁한다. 동위에서 관직은 사도(司徒), 하남도대행대에 이르고 복양군공(濮陽郡公)에 봉해진다. 나중에 대승상 고징(高澄, 고환의 장남, 동위의 권신. 제왕)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서위에 의탁하려 하나 실패하고, 부하 8백기병을 이끌고 남조의 양(梁)에 투항한다. 이때 하남십삼주를 양에 바친다. 양무제 소연(蕭衍)은 후경이 바치는 땅을 탐내어, 그의 힘을 빌어 북벌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를 대장군에 봉하고, 남예주목을 겸입시키며, 하남왕에 봉한다. 그러나 동위의 공격을 받아 영토를 확보하는데는 실패한다. 소연은 동위와 평화협상을 하기 위하여, 후경을 팔아먹으려 한다. 그리하여 양나라에 투항한지 겨우 1년만에 후경은 수양(壽陽)에서 8천병력을 거느리고 '청군측(淸君側)'을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렇게 하여 강좌를 근 4년간 혼동 속으로 몰고간 '후경지란'이 시작된다. 이때는 '염민도호'로부터 이미 200년 가까이 흐른 후이다.


후경의 반란군은 금방 10만으로 늘어난다. 겨우 7개월여만에 양의 도성 건강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불교에 미쳐있던 보살황제 양무제 소연은 연금되어 굶어죽는다. 후경은 스스로 상국, 우주대장군이 되어 조정을 농단한다. 전후로 위제(僞帝) 소정덕(蕭正德)과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을 죽이고, 태자 소대기(蕭大器)등 소량황실의 자손 수십명을 죽인다. 나중에는 아예 황제위를 찬탈하여 한제(漢帝)에 오른다. 후경은 삼오를 공격하여 취하면서 공공연히 휘하장수들에게 도성(屠城)을 명한다. "만일 성읍을 함락시키면, 깨끗히 죽여없애라. 그리하여 천하가 나의 위명을 알게 하라!" 반란군이 도착하는 곳에는 방화약탈이 자행되고 살륙으로 위엄을 세웠다. '후경지란'으로 강남의 한족백성중 열에 다섯, 여섯이 도달상한다. 그 중 강동팔군은 580만인구중 460만의 사상자를 낸다. 건강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백에 두, 셋이었다. 대문벌세족 낭야왕씨, 진군사씨는 이때 거의 멸족한다. 동진, 남조가 이백여년간 고심경영해온 강남의 번화하고 부유한 땅은 하루 아침에 페허로 변해 버렸따. 사람이 사람을 먹고, '천리길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고, 인적이 드물게 보인다. 백골이 쌓여서 구릉과 같았다." 직접적으로 남조 양은 거의 멸망한다. 4년후, 후경의 반란군은 강주자사 왕승변(王僧辯)과 교주자사 진패선(陳覇先, 남조 진의 고조무제가 된다)의 연합공격으로 소탕된다. 칭제한지 백이십여일만의 일이다.


당나라의 이대사. 이연수가 쓴 <남사.후경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악행이 넘친 후경은 부하에게 피살된다. "왕승변은 그의 두 팔을 잘라서 제문선(齊文宣, 북위, 동위의 권신 고환의 차남 고양(高洋). 동위를 찬탈한 후 북제를 건립한다)에게 보내고, 수급은 강릉으로 보낸다....후경의 시신은 소금에 절여 건강으로 보내어 시장에 전시한다. 백성들은 앞다투어 그의 살을 잘라서 모조리 먹어치웠다 율양공주 소씨(양나라 간문제 소강의 막내딸로 14살때 후경에게 강간당해 강제로 비가 된다. 후경과는 '몸을 욕보이고, 부친과 조부 형제를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킨' 원한이 있다)도 역시 나눠 먹었다. 후경의 뼈는 불에 태워 재로 만들었고, 그에게 화를 당한 사람들은 재를 술과 함께 마셨다." "후경이 남으로 도망치자, 위나라 재상 고징은 명을 내려 후경의 처자식의 얼굴가죽을 벗기고, 쇠솥에 기름을 가득 부어 끓여 죽인다.....나중에 제문선은....후경의 아들을 삶아 죽인다. 후경의 아들은 북방에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갈호족의 후예인 후경이 강좌를 근 4년간 혼란에 빠트렸고 한족들에게 엄청난 해를 끼쳤지만, "반한흥호(反漢興胡)"라든지, "멸량복조(滅梁復趙)"와 같은 구호를 내걸지는 않았다. 무슨 '도한령(屠漢令)'같은 것도 발하지 않았다. 후경의 휘하 군인들 중에는 호갈족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한족이었다. 주요 모사도 진류의 한족선비 왕위(王偉, 그는 포롣로 잡힌 후 강릉으로 보내어져서 시장에서 팽당한다. 백성들 중 그에게 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의 살을 잘라서 구워먹었다.)이다. 다만, 그는 한족으로 한족을 죽인다.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으로 대거 살육한다. 사실상 강동의 한족 군인과 백성에 대하여 더욱 미친 듯한 더욱 흉악한 종족보복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의 '도한' 업적은 염민의 '도호'업적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았다. '후경지란'은 기실 '염민도호'의 역방향 재연이었다.


20세기초, 세계는 일찌감치 근대공어분명시대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인 만주족이 건립한 대청제국정부는 다시 한번 "도양령(屠洋令)"을 내린다. 


당시, 대청의 실제권력자인 서태후 예허나라씨는 막 광서제 애신각라 재염이 지지하는 무술변법을 피비린내나게 진압한 때였다. 그녀는 서방열강이 중국의 나눠가지려고 하고, 유신파를 동정하고, 그가 광서제를 폐위시키려는데 반대하는 것에 원한을 품는다. 그리하여 "금종호체(金鐘護體), 도창불입(刀創不入), 창포불상(槍砲不傷)"이라고 자칭하던 민간의 맨목적 배외사교무장집단 "의화단"(구성원은 대부분 우매하고 무지한 직예, 산동의 한족농민이었다)을 이용하고 종용하여 북경, 천진, 직예, 산동 일대에서 교회를 불지르고, 전선을 자르고, 철로를 훼손하고, 천진조계를 공격하고, 북경 동교민항의 공사관구역과 서십교교당을 포위하며, 중국에 있던 외국인(주로 구미일 각국의 주중국공사관, 영사관, 교회, 상회의 인원과 그 가족)과 대량의 중국인 기독교인을 도살한다. 청군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전후로 일본주중공사관 서기관 삼산빈(衫山彬, 배를 갈라 심장을 끄집어내서 죽인다), 독일주중공사 폰 케틀러(von Kettler)를 죽여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 8개국가의 '의화단 폭동을 진압하고, 교민과 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공동으로 북경,천진지역에 병력을 진입시킨다.


멍청하고 우매하면서 권력욕이 강했던 서태후는 수구파대신 단군왕(端郡王) 애신각라 재의(載漪, 경자사변의 화근을 일으킨 우두머리. 아들 부준(溥儁)은 서태후에 의해 '대아거(大阿哥, 후계자)'로 세워져서 광서제의 황위를 대체하려 했다)가 부하를 시켜 위조한 열강이 청정부에 보내는 외교조회(外交照會)를 믿었고, "열강이 출병한 것은 무력으로 그녀를 압박하여 광서제에게 권력을 되돌려주게 하려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분노하여, 서태후는 미친듯이 구미일의 11개국(위의 8개국에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을 추가함)에 대하여 동시에 선전포고한다. 그리고 '도양령'을 내린다. 공공연히 방을 내걸어 현상금을 붙인다: "서양인 1명을 죽이면 오십냥, 서양부인은 사십냥, 서양어린아이는 삼십냥을 준다" 그리고 청군과 의화단에 명하여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던 공사관지역과 서십교교당으로 진격하게 하고, 중국에 있는 외국인에 대하여 노약자와 부녀자를 포함하여 무차별적인 도살을 진행하도록 명령한다. 이 '도양령'은 염민의 '도호령'과 아주 비슷하다. 염민은 '승진'을 상으로 내걸었고, 서태후는 '돈'을 상으로 내걸었다. 그 결과 15,6만의 청군과 근 3,4십만의 의화단 권민(拳民)은 2만명도 되지 않는 팔국연합군(그중 일본군대의 수가 가장 많았고, 영국군은 중국인고용병으로 구성된 위해위 화용영(華勇營), 홍콩영(香港營), 싱가로프령 및 인도, 구르카군단등이 주력이었다)에 궤멸된다. 시신은 들판을 가득채우고, 나머지는 뿔뿔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버린다. 연합군은 금방 천진을 함락시키고, 북경으로 진군했다. 선전포고한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연합군은 수도 북경을 점령한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피난간다.


다음 해, 청정부는 구미일 11개국과 상권욕국(喪權辱國)의 <신축조약>을 체결한다. 각국에 합계 4.5억냥백은(소위 '경자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독일, 일본 양국에는 사죄하고, 사망한 독일주중공사 폰 케틀러를 위하여 비석을 세워준다; 의화단과 같은 류의 '여러 나라를 적으로 삼는' 민중조직은 단속하고 영원히 금지하며,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청정부는 이어서 팔국연합군과 함께 피비린내나게 의화단 권민을 소탕한다. 의화단 권민은 서방문명을 극도로 미워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다. 교인인 동포를 함부로 죽였을 뿐아니라, 성냥, 연필, 안경과 같은 서양물건을 가진 보통백성들까지도 죽였다. '경자사변'때 의화단 및 청군에게 잔혹하게 도살당한 절대다수는 중국동포들이다. 그들이 학살한 서양인보다 몇 배나 많은지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의화단은 '반청멸양(反淸滅洋)'으로 시작했으나, 나중에 서태후에게 이용되어, 구호를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청나라정부에 의해 중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무차별적인 종족살해를 저지르고, 또한 대략의 중국인 교인들과 기타 무고한 동포들을 진인하게 살륙하게 하는 앞잡이, 도살자가 된다. 마지막에는 서태후와 청정부가 열강에 투항할 때의 희생양이 된다.


<신축조약>을 체결한 후, 중국은 완전히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로 접어든다. 거액의 배상금은 중국사회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인민생활은 더욱 빈곤해진다. "경자사변"은 야만적이고 썩어빠진 청나라조정이 멸망에 이르는 길을 가속화했다. <신축조약>을 체결한 10년후, '신해혁명'이 발발한다. 죄악이 넘치던 만청왕조는 끝내 무너진다. 중국은 이때부터 공화로 향하고, 현대문명으로 향하며, 철저히 2천여년에 걸친 봉건군주제를 벗어나고, 외족의 중국에 대한 야만적 통치를 끝낸다.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염민이 갈호조를 멸망시킨 것은 공로이다. 호갈을 도살한 것은 화근을 심었다. 결국 한족이 다시 보복을 당한다. 그 영향과 해독은 천여년간 이어진다. 외족의 침입에 항거하는데에서 염민은 근본적으로 악비, 문천상, 원숭환, 사가법등과 비교할 수 없다; 개인의 덕행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민족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극단적이고 과대한 칭송일 뿐이다. 그의 전공을 보면, '전신'으로 겨우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소위 '한족을 종족말살의 위기에서 구해낸 중화제일민족대영웅'이라는 것은 극단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정서를 지닌 편집증환자가 '랍대기작호피(拉大旗作虎皮)"하기 위한 억측과 날조로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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