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이숙동(李叔同): 풍류남아에서 불문고승으로

중은우시 2014. 12. 27. 20:29

글: 염황세계

 

 

 

 

1918년의 봄날, 한 일본여인과 그녀의 친구는 항주의 사원을 다 찾아다녔다. 마지막에 호포(虎跑)라는 절에서 마침내 출가한 자신의 남편을 찾아낸다.

38살의 그는 원래 서호의 건너편에 있는 절강성립제1사범학교의 교사였고, 얼마전에 교직을 사직하고 학교를 떠났으며, 이곳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 10년전 그는 일본유학때 처와 알게 되고, 그후에 여러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쳤다. 그러니 이번은 마지막 이별이 된다, 남편은 이 번화한 세계를 벗어나 불문에 귀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함께 악묘(岳廟) 앞의 임호소식점(臨湖素食店)에서 서로 말이 없이 채식을 먹었다. 남편은 손목시계를 처에게 건네며 이별기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를 안위하며 미렇게 말한다. 너는 기술이 있으니 일본으로 돌아가면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호숫가에 서 있던 사람은 점점 멀어져가는 작은 배를 바라보며 대성통곡했다. 배에 오른 사람은 고개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이것은 1957년 3월 7일 <문회보>에 실린 글이다. <나도 이숙동 선생을 얘기한다>라는 글이다. 이 글은 근대교육가 황염배(黃炎培) 선생이 쓴 것이다. 거기에 쓴 것은 자신이 친히 목격한 친구와 처가 결별하는 일막이었다.

남편의 이름은 이숙동이다. 출가한 후에는 홍일(弘一)이다. 1913년, 이숙동은 가곡 <송별>을 창작하는데 가사는 그 경지가 높아서 탄복할 만하다. 그러나 생각지 못하게도 이 글은 5년후에 일곡성참(一曲成讖)되었다. 이미 홍일법사가 된 이숙동이 처와 친구와 결별할 때 부르기 가장 좋은 노래가 된다.

중국의 현대문화는 그의 발아래에서 완약청려하게 시작된다고 불리던 예술의 대가는 조용히 항주의 호포사에서 출가한다. 그가 불문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은 당시 중국지식계를 크게 뒤흔든다.

 

1880년 10월 23일, 이숙동은 천진시 삼차하구 부근의 한 부유한 염상의 집에서 태어난다. 이숙동은 부친의 다섯째 부인 왕씨의 소생이고 아명은 성혜(成蹊)이고 학명은 문도(文濤)이다.

결혼후에는 이숙동이 모친과 처자식을 데리고 상해에 정착한다. 시와 서예의 재주로 약관의 이숙동은 금방 상해탄의 명사가 된다. 그는 풍류남아였고, 예기곤령(藝伎坤伶)들과 친밀하게 지낸다. 당시 "천애오우(天涯五友)"로 불린다.

여러해이후, 그 풍류의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이숙동은 이런 두 구의 사를 남긴다: "이십문장경해내(二十文章驚海內), 필경공담하유(畢竟空談何有)" 이 두 구절의 사는 1905년에 쓰여졌다. 이숙동 인생의 첫번째 큰 전환점은 바로 이 해에 이루어진다. 같이 살던 생모가 상해에서 사망한 것이다. 이는 이숙동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이숙동은 결심을 내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기로 한다. 일본 우에노에 있는 동경미술학교에서 제1기 예술전공유학생으로서 6년간의 유학생활을 보내게 된다.

이숙동은 나중에 중국근대예술사상의 여러가지 "최초"를 기록한다. 그는 최초로 서양회화를 국내에 도입한 사람이고, 최초로 오선지를 써서 음악교육을 한 사람이고, 중국최초의 화극사(話劇社)를 만든 사람이다. 1907년 2월 서회(徐淮)의 홍수로 인한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숙동은 화극사의 동료들과 모금공연을 하기로 한다. 상의를 거쳐, 프랑스작가 뒤마의 <차화녀(茶花女)>를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숙동안 <차화녀>의 여주인공역을 맡는데, 이 화극은 일본에서 큰 이슈가 된다.

 

인연때문인지, 이숙동은 항주의 절강성립제1사범학교의 초청을 받아 음악과 미술과목의 교사가 된다. 이숙동은 양복구두를 입은 유학생 복장에서, 장포 마괘 포혜로 바꾸어 입는다. 엄숙하고 소박하며 완전한 교육자의 모습이었다.

이숙동의 성격은 아주 특수했다. 하개존(夏丐尊)이 학생기숙사에서 절도를 당한 사건이 벌어져서 그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묻는데, 그는 그에게 자살의 방법으로 학생을 감화시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아주 극단적이다. 당연히 하개존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업을 할 때, 그는 자주 정중하게 학생들에게 국궁(鞠躬)을 한다. 학생이 잘못을 범하면, 그는 그들을 남으라고 하고, 아주 공손한 말투로 학생에게 앞으로는 땅에 가래를 뱉지 말라고 말한다. 강의를 마친 후에는 다시 학생들에게 국궁을 했다. 여러분은 이제 가도 좋다. 그의 교육방법은 이런 방법이었다. 완전히 감화시키는 식이었다. 그가 교사로 있으면서 인격을 비경으로 마치 부처와도 같은 '후광'이 있었다.

이숙동의 주재하에, 학교의 예술교육분위기는 아주 농후했다. 가는 중국인체모델을 미술학교에 도입시킨 선구이다. 교사 이숙동은 그의 인격적 매력과 심후한 중서문화의 이해로 일련의 음악과 미술의 우수한 인재들을 배양해낸다. 중화민국초기에서 민국20년사이에 남중국 음악계의 인물은 거의 모두 이숙동의 제자들이거나 제자의 제자들이었다.

 

1918년 음력 칠월 십삼일, 이숙동은 마지막으로 세속의 사람이라는 신분으로 학교교문으로 향하는 숲이 우거진 길을 걷는다. 이 곳을 떠나면 세속의 생활과는 절연하고 불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법명은 연음(演音)이고, 법호는 홍일(弘一)이다. 이숙동의 돌연한 출가는 학교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

이숙동은 자신이 출가한 원인을 직접 설명한 적이 없다. 그와 오래 사귄 친구이든 아니면, 그의 일본인부인이든 그의 이런 변화는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 가운데 풍자개(豊子愷)의 해석이 비교적 적절한 것같다. 사람의 생활은 3개의 층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물질생활이고, 둘은 정신생활이며 셋은 영혼생활이다. 어떤 사람은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진지하여, '물질욕'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정신욕'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인생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끝까지 탐구한다.

홍일은 고행승으로 인생을 마친다. 그는 700여년전에 실전된 불교가운데 가장 계율이 엄격한 남산율종(南山律宗)을 모아서, 청고수행(淸苦修行)한다. 20세기의 불교계에 4명의 대사의 이름이 빛을 발하는데 그들은 허운(虛雲), 홍일(弘一), 태허(太虛), 인광(印光)이다. 홍일대사는 남산율종 제11대 종사가 된다.

이숙동은 매번 한가지 유형의 사람일 때마다 진지했다. 전능한 배우와 같이 노생을 할 때는 노생같고, 소생을 할 때는 소생같고, 대면을 할 때는 대면같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성격에서 나오는 특징 '진지함' 때문일 것이다.

1942년 10월 13일, 그는 "비흔교집(悲欣交集)"이라는 네 글자를 마지막으로 쓴다. 이미 쓴 종이에 아무렇게나 이렇게 쓴다. 소교졸박(小巧拙朴)하고 전혀 꾸미지 않았다. "비흔교집"의 곁에는 3개의 약간 작은 글자를 써놓았다. "견관경(見觀經)". 3일후, 홍일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염불하는 가운데 앉은 모습으로 편안하게 원적한다. 사리 500개를 남긴다.

홍일대사의 일생은 전설적인 색채로 충만하다. 63년중에서 39년은 속세에서 24년은 불가에서 지낸다. 세상사람들에게 많은 정신적 부를 남겼다. 그는 중국전통문화와 불교문화를 잘 결합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국의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평담(平淡)해진다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조박초(趙朴初) 선생은 이렇게 평가했다: 무진기진공세안(無盡奇珍供世眼), 일륜원월요천심(一輪圓月耀天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