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기점문사(起點文史)
대청왕조는 동북의 여진인들이 건립하였고, 당시 동북은 황무지였으며, 개발을 해야 했다. 대청이 중원으로 들어와 자리잡은 후, 만주족도 중원으로 들어와서 통치를 공고히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의 동북은 천리무인연(千里無人煙)의 곳이 되어버린다. 다만, 만청정부가 전국을 통일한 후에도 한족이 동북으로 가서 개발하는 것을 엄금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녹정기>에서 조정이 내놓은 해답은 만청의 용맥(龍脈)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정식 상황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기실 여기서 먼저 설명해야할 것은 동북이 현재처럼 단순히 동북삼성(요녕, 길림, 흑룡강)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극동, 사할린섬, 시베리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였다. 영토범위가 아주 방대해서 수백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당시의 여진인들이 굴기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광활한 토지에 의존해서이다.
1644년, 만청의 귀족은 산해관을 넘어 들어와서 북경에서 황제를 칭한다. 중원의 주인이 된 후, 기실 전중국을 통치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그다지 자신은 없었다. 특히 남방에는 남명정권이 있고, 각지에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순치제는 자주 신하들과 이런 말을 했다. 대청이 만일 중국을 통치하는데 실패하면, 그냥 되돌아가자. 기껏해야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다시 동북에 돌아가면 되지 않는가. 북방으로 돌아가서 계속 칭왕칭제하면서 북방의 황제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청귀족은 몽골인들의 경험과 교훈을 받아들여, 당시 원순제가 순조롭게 몽골초원으로 세력을 보존하면서 물러나서 계속하여 북원의 황제로 있었던 이유는 주로 한인들이 몽골로 가서 개발하지 못하도록 엄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몽골인들은 북방으로 도망쳐서서 여전히 황제로 지낼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를 본받아, 만청정부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퇴로를 만든 것이다. 일단 한인들이 강력하게 저항하면 언제든지 고향인 동북으로 돌아가서 계속 북방의 주인으로 남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유조변(柳條邊)을 만들어 한인들이 동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유보변이라는 것은 현재의 격리장벽에 해당한다. 독일의 베를린장벽에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주로 흙담과 버드나무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만청의 변방군대가 있다. 이렇게 하여 한인이 동북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동장철벽이 된다. 이렇게 하여 동북은 여전히 한인이 없는 만주인의 천하로 남을 수 있었다.
그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강희제때, 제정러시아의 세력이 이미 시베리아, 동북지구로 밀려왔다. 당시 강희는 내부에서 삼번의 난을 평정해야 했다. 그래서 제정러시아와는 타협을 한다. 비록 야크사전투에서 제정러시아군대를 대파하지만, 이어서 평등조약이라고 일컫는 네르친스크조약(중국에서는 니부추조약)에서 시베리아의 수백만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제정러시아에 할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한 제정러시아는 여전히 청나라 영토를 잠식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강희제는 더더욱 한인이 동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주로 동북으로 들어간 한인이 제정러시아군대와 결탁하여 공동으로 청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됨녀 청나라가 중원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심지어 동북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지 모른다. 당시 제정러시아만 해도 상대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에 강희제 시기에 더욱 엄하게 한인의 동북진입을 엄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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