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金庸): 재상(財商)과 정상(情傷)

by 중은우시 2018. 10. 31.

글: 이광두(李光斗)


"흰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것을 봐라. 인생의 만남과 헤어짐도 역시 이와 같다.!"

- 김용 <신조협려>


재자자고다정(才子自古多情), 영웅종래적막(英雄從來寂寞)

재자는 자고로 정이 많고, 영웅은 항상 외롭다.


김용은 일생동안 3번 혼인하고 1번 짝사랑했다. 대스타 하몽(夏夢)과의 짝사랑은 김용의 일생동안 계속되었다. 하몽은 김용이 쓴 소설 속의 소룡녀, 왕어언등의 원형이다. 김용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서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내 생각에 서시는 하몽같이 생겨야 명불허전일 것이다." 김용이 하몽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하몽도 유무녀였다. 하몽은 김용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생에는 바라는 것을 얻기 어려우나, 다음 생에는 아마도 기회가 있을 것이다."


2016년 10월 30일, 83세의 홍콩스타 하몽이 죽었다. 이년후의 같은 날, 김용도 세상을 떠난다.


문세간정위하물(問世間情爲何物), 직교인생사상허(直敎人生死相許)!

세상에 묻건데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람으로 하여금 삶과 죽음을 맡기게 하는 것이다.


김용은 그의 무협소설에서 많은 사랑이야기와 은원과 복수이야기를 적었다. 다만 그의 사랑과 혼인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말년이 김용은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의 혼인은 이상적이지 못했다. 나는 여러번 이혼했다." 이것은 아마 일대 '무림맹주'로서 가장 마음대로 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김용의 첫번째 처는 두야분(杜冶芬)이고, 아주 예쁜 여인이다. 사람들은 "두사낭(杜四娘)"이라고 불렀다.1947년 젊은 김용은 항주의 <동남일보>에서 일했는데, 유머 부간(副刊)을 책임지고 있었다. 독자로부터의 서신으로 17살의 두야분과 사랑에 빠진다. 다음해 두 사람은 상해에서 혼례를 올린다.


나중에 김용은 홍콩으로 가서 신문을 창간한다. 두야분도 따라간다. 그러나 얼마후에 이혼한다. 두 사람이 헤어진 것에 대하여 하나의 소문이 있는데, 두야분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김용은 계속 함구했다. 74세가 되어서야 기자에게 말한다: "지금은 얘기해도 된다. 나의 첫번째 부인은 나를 배신했다(betrayed)"


김용의 두번째 부인은 주매(朱玫)이다. 그녀는 똑똑하고 능력있는 여기자이다. 젊고 아름다우며, 외국어도 잘했고, 문화수준도 높았다. <명보>를 처음 창강했을 때, 주매와 김용은 같이 고생한다. 그러나 <명보>의 사모님의 자리를 안정적으로 차지하지는 못했다.


세번째 부인인 임이락(林怡樂)은 김용의 망년지교이다. 이 웨이트리스 출신이 여인은 자신의 미모와 총명으로 김용과의 애정의 연을 잇는다. 그리고 김용의 기나긴 여생을 함께 한다. 김용과 만났을 때, 그녀는 막 16살이었다. 하루는 김용이 어느 호텔에 가서 식사흘 하는데, 당시 웨이트리스이던 임이락은 그가 김용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두 사람은 몇 마디를 나눈다. 계산할 때, 김용은 임이락에게 홍콩달러10달러의 팁을 줬는데, 그녀는 거절한다. 임이락은 이렇게 말했다. 김용은 문인이고, 글을 써서 생활하는데, 돈벌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니 10달러의 팁은 안줘도 된다고. 김용은 이 젊은 여자아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감동받는다. 나중에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점점 애정이 싹터서 결국 동거하게 된다.


하몽을 만났을 때, 김용은 막 서른을 넘긴 나이였다. 아름다운 하몽은 김용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자주 하몽을 보기 위하여, 그는 하몽이 일하던 장성(長城)영화회사의 편극(編劇)이 된다. 김용이 장성영화공사에 들어간 후 필명을 "임환(林歡)"으로 하고, 김용은 밤을 세워가며, 짧은 3년만에 <절대가인>, <난화화>등 영화극본을 쓴다. 이것은 모두 하몽의 환심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몽에게는 이미 남자가 있었다. 김용은 그저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며 가슴아파할 뿐이었다. 얼마후 그는 장성영화공사를 떠나고, 실연의 고통을 안고 무협소설 <신조협려>를 완성한다. 세심한 독자라면 <신조협려>의 소룡녀의 찡그리고 웃는 모습이 하몽과 비슷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문무를 겸비한 사람은 적다. 글을 쓰면서 돈을 버는 사람은 더욱 적다. 그러나 김용은 바로 글도 쓰고 돈도 버는 사람이었다. 김용의 소설은 1억책이 발행되었고, 모택동선집만이 그보다 많이 발행되었다. 1992년, 홍콩의 100대부호에 김용은 12억홍콩달러의 재산으로 64위에 오른 바 있다. 이를 보면 김용은 글을 잘 쓸 뿐아니라, 돈도 잘 번다. 김용이 창간했던 <명보>는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여러번 주인이 바뀌면서 쇠퇴한다. 비록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일을 물려받으려 하지 않았다.


김용의 원명은 사량용(査良鏞)이다. 1924년에 절강성 해녕시 원화진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씨는 원화진의 명문거족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사씨가족중에서 진사가 된 사람이 20명에 이른다.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인 거인이 된 사람은 76명이다. 사씨가족의 전성기는 청나라 강희연간이다. '일문칠진사' '숙질양한림'이라는 말이 있었다.


김용이 태어났을 때, 집안환경은 상당히 부유했고, 조상이 물려준 밭 3,600무가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노비들이 있었다. 김용의 집에는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고, '사씨장서'는 절강일대에 아주 유명했다. 그때의 김용은 매일 책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집안에 책이 많았고, 많이 읽다보니 나중에 글을 쓰는데 아주 튼튼한 기초가 된다.


소학교를 졸업했을 때, 항일전쟁이 발발한다. 상해가 일본에 넘어가고, 김용은 부득이 가족들을 따라 고향을 등져야 했다. 이때의 김용은 가정에 변고가 생겨서 '전구학생구제금(戰區學生救濟金)"으로 생활과 학업을 유지해야만 했다.


김용의 첫번째 운명전환점은 대학을 졸업한 후 <대공보>에 들어가 전신번역을 한 일이다. 1947년 6월, 상해 <대공보>에는 광고를 싫어 전국에서 3명의 전신번역을 모집한다. 김용은 착실한 중문,영문실력과 항주 <동남일보>에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여러 응시자들 중에서 발군이었고, 최초로 <대공보>에 채용된 응시자가 된다. 나중에 내전이 발발하면서, <대공보>는 장소를 이전하려고, 김용을 홍콩에 파견하여 일하게 한다. 1952년, <대공보>는 <신만보>를 만든다. 창간후, 나부(羅浮)는 <신만보>의 총편집이 되고, 김용은 <신만보>의 부간편집이 된다. 이때 김용은 다시 그의 운명의 두번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무협소설을 쓰는 것이다.


1954년, 홍콩 무술계의 양대문파인 태극파(太極派)와 백학파(白鶴派)간에 다툼이 일어난다. 신문에서는 각종 내용을 보도하고, 나부는 여기에서 상업기호를 본다. 신문에 무협소설을 실으면 분명히 인기를 끌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부는 양우생(梁羽生)을 찾아간다. 신무협소설의 개산지작인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가 이렇게 탄생한다. 나중에 양우생은 시간과 정력의 문제로 소설을 쓰기 힘들어 진다. 나부는 김용을 생각한다. 김용은 글재주가 좋고, 그는 무협소설을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김용에게 쓰게하면 분명히 괜찮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신문업에 종사하던 김용은 중간에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서 '용(鏞)'을 나눠서 자기 무협소설의 필명으로 삼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검은구록>이 탄생한다. 이것은 김용의 최초 무협소설이다. 소설연재의 방식으로 <신만보>에 게재되어 많은 독자를 얻는 동시에 <신만보>의 판매량도 급증한다.


1955년에서 1972년까지, 김용는 전후로 <서검은구록>, <벽혈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설산비호>, <비호외전>, <의천도룡기>, <원앙도>, <백마소서풍>, <연성결>, <천룡팔부>, <협객행>, <소오강호>, <녹정기>등 모두 15부의 장편무협소설을 쓴다. 그리하여, "비설연천사백록(飛雪連天射白鹿), 소서신협의벽원(笑書神俠倚碧鴛)"의 대련이 완성된다.


1972년, 김용은 <녹정기>를 쓴 후에 절필한다.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는 거의 20년간 쓴 무협소설을 정리하고 수정한 후 하나하나 출판한다. 대륙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아니라, 동남아를 풍미하고, 팬을 무수히 거느리게 된다.


등소평도 김용의 팬이었다. 김용의 소설이 대륙에서 해금된 것은 등소평 덕분이다. 김용은 등소평이 인민대회당에서 단독으로 접견한 최초의 홍콩사람이다. 1981년, 북경은 김용에게 내지방문을 요청한다. 김용은 등소평을 만나보고 싶다고 요구하고, 등소평은 김용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어서 두 사람은 금방 만난다. 홍콩으로 돌아온 후, 김용은 즉시 등소평에게 <김용소설전집>을 정리하여 보낸다. 그 후, 김용소설은 대륙에서 정식으로 출판될 수 있었고, 금방 전국을 풍미한다.


김용은 많은 소설을 썼고, 말그대로 IP대가가 된다. 영화 드라마의 보급으로, 김용의 소설은 종이로 출판하는 것 외에 영화드라마의 방식으로도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리게 된다. 홍콩에서 처음 김용소설을 영화드라마로 만들기 시작한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설산비호>등은 찍을 때마가 인기를 얻는다. 김용의 작품이 인쇄될 때마다 김용의 주머니에는 판권료가 두둑히 쌓였다. 소설 속의 인물들 이름만으로도 김용은 적지 않은 판권료를 챙겼다. 주성치가 <쿵후>를 찍ㅇㄹ 때 거기에는 '소룡녀'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이름을 쓰는 것만으로, 주성치는 김용에게 6만홍콩달러의 판권료를 지급해야 했다.


소룡녀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많은 판권료를 받은 것은 원인이 있다. 소룡녀의 원형은 바로 김용의 꿈속의 정인 하몽이다. 하몽은 그 때 아주 유명한 여자스타였고, 김용은 하몽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장성영화공사로 가서 편극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낙화유의(落花有意), 유수무정(流水無情)이다. 김용이 하몽에게 사랑을 고백한 후, 하몽에게 거절당한다. 김용의 이 단계 심정은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환희에서 절망으로, 김용은 자신의 당시 내심의 느낌을 그대로 이 두 부의 소설에 담아놓았다.


소설로 성공한 외에, 김용의 또 다른 성공은 <명보>를 창간한 것이다. 1959년 김용은 몇몇 파트너와 함께 독립하여 <명보>를 창간한다. <명보>의 경영과정에서 김용의 비지니스재능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중에 이 신문은 홍콩 내지 동남아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 된다.


<명보>가 막 출판되었을 때, 판매량이 많지 않았다. 겨우 6천부였다. 판매량을 확대하기 위하여, 김용은 자신의 명인효과를 노려 <명보>에 자신의 모협소설을 연속으로 연재한다. 팬들의 효과에 힘입어 <명보>는 발전하고 성공을 거둔다. <명보>의 영향력이 커지자, 김용은 다시 경영범위를 확대하여 여러 신문을 창간한다. <신명일보>, <무협과 역사>, <명보만보>, <재경일보>등. 나중에 업무를 더욱 다각화하여, 출판, 관광등에까지 미친다.


90년대초, <명보>의 이윤은 1억홍콩달러에 달한다. 1991년 3월 22일, <명보>는 상장하고, 홍콩 <자본>잡지는 "90년대 홍콩화인억만장자부호랭킹"에서 김용을 12억홍콩달러로 64위에 올려놓는다.


신문경영이건 무협소설창작이건, 김용은 결국 둘 다 했고, 성공을 거둔다. 다만 후계자를 선택하는데 김용은 곤란을 겪는다. <명보>를 경영하면서, 김용의 나이가 많아지자, 후계자를 누구로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김용은 세번 혼인했고, 두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2남2녀가 있다. 그중 장남인 사전협(査傳俠)을 김용이 가장 좋게 보았고, 자신의 후계자로 키웠다. 나중에 김용과 둘째부인과 이혼을 했고, 사전협은 두 사람의 이혼소식을 듣고는 목을 매어 자살한다. 김용은 부득이 다른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김용의 차남 사전척(査傳倜)의 뜻은 천하의 미식을 모두 먹는 것이고, 그는 홍콩에서 미식을 본업으로 하는 채란(蔡瀾)을 스승으로 모시고, 별명이 '팔대제자(八袋弟子)'였다. 팔대라는 것은 시미유염(柴米油鹽), 장초차주(醬醋茶酒)를 말한다. 김용은 자신과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길이 서로 다르면 같이 도모하지 못한다. 할 수 없이 눈을 아들승계에서 내부직원승계로 돌리게 된다.


한바퀴 다 둘러보았지만, 내부에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김용은 할 수 없이 다시 시선을 돌린다. 1989년, <명보> 창간30주년 차회를 마친 후, 김용은 외부에 한 가지 소식을 전한다: <명보>를 매각한다.


김용의 일생은 전설로 충만하다. 그의 무협소설은 1억부이상이 인쇄되었고, 중국역사상 글을 써서 가장 많은 돈을 번 인물이다. 그가 창업한 <명보>집단은 중국판의 머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후로 맡길만한 후계자를 구할 수 없어서, <명보>의 휘황은 지속되지 못한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IP가 있고, 그의 무협소설은 이미 중국문화의 부호가 되어 있었다. 김용 한 사람이 바로 그의 강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