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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의 도덕과 문장

by 중은우시 2018. 10. 31.

글: 장일일(張一一)


(십여년전에 젊어서 함부로 날 뛰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곤 하던 시기의 글이다. 이 글로 필자가 중고등학교때 추종한 바 있는 김용의 제문으로 바치고자 한다. 그것은 확실히 그 시대의 진귀한 기억이다. 어떤 사람은 이 글의 제목이 너무 돌아가신 분에 대한 불경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의 경지가 너무 낮은 것이다. 필자는 누구를 존중할 때만 비로소 몇 시간의 시간을 들여서 그를 평한다. 만일 하늘아래 절대다수의 사람이 너라는 인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만일 네가 나보다 많이 차이나게 모자란다면, 내가 어찌 너를 책망할 수 있겠는가?)


김용의 소설이 아무리 피비린내 충만하고 사상이 결핍되어 있더라도,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지난 세기 정신문명이 극도로 피폐되어 있던 중국에 김선생은 아주 시대를 잘 맞추어 한 무리의 무뇌아인 독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김선생이 이렇게 수십억 자산을 가지고 '성공'한 문화상인이 된 것에 대하여, 필자는 그의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포폄을 논할 생각은 없다. 필자의 칭찬하는 글자 한 자는 화곤(華袞)보다 영예롭고, 폄하하는 글자 한 자는 부월(斧鉞)보다 엄중하다. 김선생은 나이가 이미 많아서 아마도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몇년이 지나 관두꺼을 닫은 후에 후인들이 평가하도록 하자.


선현이 가르치시기를, "글을 쓰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做文先做人)"고 했다. 이것은 선견지명이 있는 말이다. 우리는 김선생에 관한 간접적으로 받은 인상과 몇 가지 들은 정보를 모아보기로 하자. 그러면 김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고 확실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주공이 유연비어에 두려워하던 때나 왕망이 선비들에게 겸양으로 대할 때, 어쨌든 흰 것을 검다고 하지 않고, 검은 것을 희다고 하지 않았다. 진리는 어쨌든 진리인 것이다.


김용 선생은 자신을 항상 깊이 숨겨왔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강호유협 혹은 은사고인의 맛이 있었다. 유협과 은사가 반드시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거짓군자가 명성을 사거나 채화음적이 화를 피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한다. <서유기>의 삼장법사는 옷만 알아보지 사람은 알아보지 못한다. 늙은 요괴를 좋은 사람으로 여긴다. 이것은 진실한 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혼인을 알아보아야 한다. 김선생에게는 주매 여사라는 부인이 있었다. 주매 여사는 당시에 저명한 미녀이자 재녀였다. 일찌기 <명보만보> 취재부 주임 및 <화인야보> 사장의 직위를 지냈다. 그리고 김용 선생에게 일생에서 첫번째 목돈을 마련하게 해준 <명보>의 창간초기에 두 사람은 온갖 고생을 함께 했다. 주매 여사는 마침내 남편이 <명보>를 잘 꾸려나가게 해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그 입만 열면 인의도덕을 얘기하는 '김용대협'은 어덯게 그의 이 고생을 함께 했던 '조강지처'를 대했던가? <명보>가 조금 잘나가자, 김성생은 급히 다른 여자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박정하게도 그녀와의 혼인관계를 끝낸다. 성격이 강한 주매 여사는 우울증과 고독 그리고 빈곤 속에서 후반생을 보낸다. 그리고 1998년 11월 8일 우울하게 홍콩 완차이의 루톤지병원에서 병사한다. 그리고 사망증명서를 받아간 사람은 그 병원의 직원이었고,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수억의 재산을 지닌 한때 같이 분투한 바 있는 남편이 아니었다. 실로 탄식이 절로 나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용선생은 나중에 교언영색으로 매체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매에게 미안하다. 만일 모든 것을 다시 할 수 있다면..."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가식적이다. 주매 여사를 대하는데 있어서 김용 선생은 "불인(不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선생은 또 다른 젊은 육체와 즐기기 위하여, 장남 사전협(査傳俠)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주매 여사와 인연을 끊고 이혼해버린다. 결국 사전협은 투신자살한다. 이렇게 하여 사씨집안의 제사를 지낼 후손이 하나 끊어졌다. 이는 "불효(不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악명높은 대만의 전 교육부장관이며, 대만의 역사교재를 뜯어고치고, 한때 일본어를 '국어'라고 불렀던 두정승(杜正勝)은 모두가 공분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김용 선생은 '경죽난서(罄竹難書)"와 "삼지소저(三只小猪)"등 여러 웃기는 일을 저지른 거짓 엘리트학자를 칭찬해 마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두선생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학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두선생의 견해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김용 선생은 한편으로 자신의 소설을 대륙에 미친 듯이 인쇄하여 돈을 긁어모음으로써 자신의 날로 팽창하는 사욕을 만족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인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두정승에게 아부한다. 김선생이 이렇게 한 것이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조국에 대하여 어쨌든 "불충(不忠)"이다.


김선생은 일관하여 자신의 소설의 협의를 표방하고, 극력 비천민인 제세위민의 득도고승과 같은 모양을 유지했다. 그런데 중국의 30년만의 대지진으로 재난을 당했을 때, 세계의 화인들이 모두 정성을 모아서 중지성성했을 때, 우리의 경애하는 호연지기의 '김용대협'은 가식적으로 '난과(難過)'라는 말을 하고, 몇 개의 별 가치가 없는 조폭(條幅)을 써서 '위문'했을 뿐, 억만장자로 부호인 그는 아무런 실제적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는 '불의(不義)'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선생은 <소오강호>에서 '군자검' 악불군(岳不群)을 사람들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인물로 그렸다. 김선생이 모를 리가 없다. 불인, 불의, 불충, 불효하는 소위 '대사(大師)'는 가면이 벗겨진 후에 얼마나 많은 이전의 독자들이 더 이상 그 추악한 얼굴을 보려하지 않게 될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