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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유방(劉邦)은 진시황(秦始皇)의 동생이다 (3)

by 중은우시 2018. 10. 27.

글: 정보(程步)


9. 왜 유방은 진시황에게 잘 대해 주고, 반란을 같이 일으킨 전우에게는 그렇게 악독하게 대했을까?


유방은 진시황과 가족들에게 아주 온화하게 대한다. 진시황의 능을 20가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자영을 상(相)으로 삼았다. 진이세 호해에 대하여까지도 유방은 정중하게 남산무(南山巫)를 설치하여, 진이세의 제사를 책임지게 한다. 반대로 백성에 대하여, 그와 반란을 일으킨 전우에 대하여 특히 진시황의 가족을 죽인 항우에 대하여, 뼛속까지 미워했다. 수단은 잔혹했고,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죽이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항우등 반란자들은 진시황과 진나라에 대하여 뼛속까지 미워했다. 그래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분풀이를 했다. 


유방이 함양을 점령하고나서, 그는 진시황의 가족이나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지 않았다. <사기>에는 유방이 진시황의 동생 자영을 재상으로 삼아 그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도록 했다.


유방은 또한 천하의 금기를 어기고 진시황을 후하게 대우한다. 진시황에게는 20가로 하여금 능묘를 지키게 하고, 다른 제후들은 10가 혹은 5가로 하여금 능묘를 지키게 했다. 진시황에 대한 대우가 확실히 다른 제후왕들보다 높다. 이것은 반란을 일으킨 자의 행위라고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유방은 자신과 같이 반란을 일으켰던 전우들에게는 어떻게 대하였던가?


먼저, 병력을 보내어 함곡관을 지키게 하면서 반란군이 함곡관을 넘어오는 것을 막아. 진나라 옛 영토를 지키켜 했다. 함곡관이 무너진 후, 즉시 수하 간장(干將) 조무상(曹無傷)을 죽인다. 그는 가장 먼저 유방의 반란에 가담한 자이고, 큰 공을 세웠었다. 그는 가장 먼저 유방을 도와 포위하고 있던 진군을 격패시켜, 유방이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한 인물이다. 조무상은 또한 사수군수 장(壯)을 생포하여 그를 죽인 바 있다.


그의 모든 진나라를 멸망시킨 공신은 유방의 손에 죽는다. 항우, 경포, 팽월, 한신, 위왕표, 조왕헐, 은왕사마앙(司馬卬), 임강왕 공환(共驩), 심복 진희(陳豨). 항우는 분시되고 머리가 잘려 사방에 내걸린다. 팽월은 멸족된 후 육장으로 만들어져서 사방에 보내어진다 경포와 한신도 삼족이 멸한다.


자신의 부하장수로 심복인 번쾌도 유방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죽기 전에 진평을 불러 번쾌를 군중에서 참하도록 시킨다. 유방은 여러번 도성(屠城)을 했고, 손에 무기하나 들지 않고 투항한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투항한 백성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우리는 자주 말한다. 세상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랑은 없다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미움도 없다고. 이렇게 애증이 분며한데,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10. 유방은 왜 진왕자손의 신분으ㅗ 진나라조상에 대한 제사를 게속되게 해주었을까?


제사는 고대에 대사이다. 전혀 거짓이 섞이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지내고 누구를 지내는지는 절대로 함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진나라 선왕은 사제묘(四帝廟)를 만들었는데, 유방은 하나를 추가시켜서 오제묘로 만든다.


진양공(秦襄公)은 백제묘(白帝廟)를 만들어 제사지낸다. 진선공(秦宣公)은 청제묘(靑帝廟)를 만든다. 진령공(秦靈公)은 황제묘(黃帝廟)와 적제묘(赤帝廟)를 만든다. 백,청,황,적의 사제가 모두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방은 흑제(黑帝)를 추가하여 오제로 만든다. 유방이 "동으로 가서 항우를 무찌른 후 돌아온다. 그리고 묻는다. '옛날에 진나라때 하늘의 어느 제에게 제사를 지냈는가?' 답하여 말하기를, '사제이며, 백, 청, 황, 적제의 사당이 있습니다' 고조가 말한다: '내가 듣기로 하늘에는 오제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넷만 있으니 어떻게 된 것이냐.' 모두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자 고조(유방)이 말한다; '내가 알고 있다. 내가 와서 다섯을 갖추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흑제사(黑帝祠)를 세웠다." 유방이 이때 한 행동은 진왕의 신분으로 진나라조성의 여러 왕을 제사지낸 것을 이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어서 유방은 "옛 진나라의 축관(祝官)을 불러 다시 태축(太祝), 태재(太宰)을 설치하게 했으니, 옛날의 의례와 같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흑제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자. 그것은 더욱 의심스럽다. 사마천의 <사기>기록에 따르면, 흑제는 우리가 오늘날 얘기하는 전욱이 아니다. 진시황이다. "황제는 토(土)의 덕을 얻었고, 하(夏)는 목(木)의 덕을 얻고, 은(殷)은 금(金)의 덕을 얻고, 주(周)는 화(火)의 덕을 얻었으며, 진(秦)은 수(水)의 덕을 얻었다."


반란자가, 만일 그들과 혈맥관계가 있는 종족이 아니라면 진왕을 위하여 오제를 모시겠는가? 심지어 천하가 모두 미워하는 진시황을 오제로 받들어 모실 수 있겠는가?


11. 왜 유방은 진시황의 모든 국가제도를 계승하고, 음양오행을 숭상하던 진나라사람이 흑(黑)색을 숭상하던 것조차 바꾸지 않았을까?


유방은 진시황의 모든 국가제도를 계승한다. 정치경제국가체제관리제도는 거의 변경이 없었다. 심지어 음양오행에서 진나라사람들이 흑을 숭상하던 것까지도 유방은 바꾸지 않는다. 고대에 이것은 금기에 속하는 사항이다.


"고조에 이르러, 사해를 가졌다. 숙손통이 약간 더하고 뺀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진나라의 옛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천자의 칭호에서부터 아래로는 관료와 궁실, 관명까지 거의 바꾸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진왕이라고 칭하지 못하고, 자신을 감히 영방(嬴邦)이라고 칭하지 못하는 것을 제외하면 마치 내란을 완전히 평정한 것같았다.


금목수화토의 상생상극이 있다. 만일 왕조가 교체되면, 구왕조의 오행을 그대로 써서는 안된다. 그것은 크게 불길한 일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 이렇게 썼다: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은 천자의 성이 바뀌고, 천하를 새로 받으면, 반드시 처음에 정월(正月)을 고치고, 조복의 색깔을 고치고, 역법의 기산점을 고쳐서 천명에 순응하여야 한다"고 적었다.


하(夏)나라는 정월을 정월로 하였고, 은(殷)은 십이월을 정월로 하고, 주(周)는 십일월을 정월로 했다." 진나라는 육국을 멸한 후에 수덕이 주천자의 화덕을 극한다고 하고 정월을 십월(十月)로 정했다. 그리고 흑색(黑色)을 주색으로 한다


그러나 유방은 사마천이 말한 것처럼 왕조교체를 하면서 "개정삭(改正朔), 역복색(易服色), 추본천원(推本天元), 순승궐의(順承厥意)"하지 않았다. 계속하여 진시황의 수덕을 썼다. 그리고 여전히 십월을 1년의 시작으로 했다. 복장은 여전히 검은색을 숭상한다.


12 결론


되돌아서 다시 '용교설'을 보자. 그러면 모든 진상이 드러난다. '용교설'은 유방의 신세내력의 진실한 기록이다. 그저 그 일은 성패생사와 관련되므로 유방의 생부를 교룡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용이 무엇인가? 바로 군왕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유방은 당연히 어느 제후왕의 서자이다. 유온은 그녀의 고아한 수양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어느 제후왕부에서 도망쳐나온 비빈이다.


그렇다면 어느 제후왕의 서자일까?


<한서.고제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신찬이 말하기를, '고황제(유방)는 42세에 등극하여, 12년간 재위했고, 53세까지 살았다." 이것으로 추산해보면, 유방은 진장왕 원년에 태어났다 .이 출생년은 나중에 여러 인물의 장유관계로 확인이 된다.


유온이 유방을 임신하고 출산한 해에, 중국에는 여전히 제초연한조위진의 7명 왕이 있었다. 그리고 위군(衛君)도 있었다. 이들 왕, 군 중에서 진왕을 제외한 다른 왕이 서자라면 유방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 그것이 귀한 정치적 자본이 될 수 있다. 아마도 유방이 당당하게 드러냈을 것이다. 나는 어느 제후왕의 공자이다라고. 그때는 제후국들이 복국을 하려는 때이므로 이런 집안배경은 사업의 성공에 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왕의 공자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난이 진행될 때도 말할 수 없고, 난이 끝나서 황제에 오른 후에도 말할 수가 없다.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유방은 위,초의 땅에 살았다. 진나라사람은 위,초의 적국이다. 어렸을 때 유방의 신분이 폭로된다면, 복수하려는 의사들의 추살대상이 되었을 뿐아니라, 진나라조정의 추적도 피하기 어려워 목숨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하가 대란에 빠지고 여러 제후국이 복국할 때, 진나라는 다시 천하의 공적이다 천하인들은 힘을 합쳐서 진나라를 망하게 했는데,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었다. 유방은 할 수 없이 성과 이름을 감추고 시세에 따라서 행동한다. 설사 나중에 유방이 항우를 멸망시키고 장안에서 칭제했을 때도 여전히 포악한 진나라를 제거하여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구호를 계속한다. 유방의 문신무장들은 모두 진나라를 멸망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유방에 충성했다. 그래서 유방이 진장왕의 아들이고, 진시황의 동생이라는 비밀을 끝까지 숨겨야 했다.


일단 이런 정확한 결론을 얻어내고 나면 유방에게서 나타났던 각종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다.


왜냐하면 진왕의 비빈으로 유온은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성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어야 했다. 그녀는 진왕의 비빈이라는 신분이므로 설사 그런 전란의 시대에도 아들에게 글을 읽게 했고, 큰 돈을 아끼지 않고 이사의 사숙인 부구백을 스승으로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난을 피해 도망친 상태였으므로, 부득이 하게 시위 가신이거나 혹은 노비였던 비루한 유태공에게 시집을 가야 했다. 진장왕은 정통이고, 유태공은 유방이 아무렇게나 봉한 태상황이며, 유방의 부친 진장왕에게는 왕후 조희가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하고 싶기는 했지만, 할 수 없이 유온을 정통이 소령부인으로 봉한 것이다. 태상황후로 봉한 것이 아니라.


유방의 부친은 진장왕이고, 형은 진시황이므로, 유방은 현령등 상사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불원천리 사람들을 데리고 함양으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시황이 죽고 진이세 호해가 함부로 날뛰자, 그는 급히 거병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차지한 지방을 포기하면서까지 함양으로 진격한다. 그래서 그는 함양에 도착하자마자 합곡관에 병사를 보내어 반군의 진입을 막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진나라장수를 참하여 공을 세웠지만 함곡관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조무상을 죽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마찬가지로 진나라사람을 미워하여 진나라시림을 죽였고, 유방이 함양궁에서 진왕에 등극하려는 것을 막은 심복 번쾌를 죽이게 한다. 그래서 그는 진시황에게는 그렇게 좋게 대하고, 반란을 같이 일으킨 전우에 대하여는 뼛속까지 미워하며 멸문시킨다. 그리고 분시하기도 하고, 육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원래 시위 혹은 노비였던 유태공을 여산 자락에 거주하며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게 한다. 그래서 그는 진왕자손의 신분으로 오제를 제사지내고, 진나라선조의 신령에 제사를 계속 지냈다. 그래서 그는 진시황의 국가제도를 고치지 않고 수덕, 흑색숭상까지도 그래도 이어받는다.


이런데도, 유방이 진시황의 동생이라는데 더 의문이 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