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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민국 10대 토비(土匪)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이자지(李子遲)


1. 동북왕(東北王) 장작림(張作霖): 난세효웅, 애국항일, 역비역관(亦匪亦官), 역사역정(亦邪亦正), 독패동북(獨覇東北), 고금소유(古今少有).


장작림(1875-1928), 자는 우정(雨亭), 아명은 노걸탑(老疙瘩), 다른 사람들은 그를 "장대수(張大帥)"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봉천성 해성현 가장사향 마가방촌 서소와둔(지금의 요녕성 안산시 해성시) 사람. 저명한 애국장군 장학량의 부친. 어려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청일갑오전쟁에 참가한 바 있다. 나중에 녹림에 투신한다. 세력이 커져서 청나라정부는 토벌하지 못하고 그를 초안(招安)한다. 그는 청나라조정을 도와서 두립삼(杜立三)등 토비세력을 토벌한다. 나중에는 몽환(蒙患)을 제거하고, 국가통일을 유지보호한다. 점차 직위가 올라가서, 봉천독군, 동삼성순열사등을 맡는다. '동북왕'으로 불리며, 북양군 봉계(奉係)의 우두머리가 된다. 손중산, 단기서와 동맹을 맺는다. 제2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후 북경으로 쳐들어오기도 하며, 해군대원수가 되어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행사하여 국가최고통치자가 된다. 그동안 여러번 일본인의 회유를 거절하고, 매국조약의 체결을 거절한다. 1928년 전선의 전투가 불리하여 어쩔 수 없이 동북으로 돌아간다. 그해 6월 4일, 기차를 타고 가던 중에 일본관동군이 매설한 폭약에 중상을 입는다. '황고둔사건'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그날 심양관저로 모셔진 후 바로 서거한다. 


2. 녹림상장군(綠林上將軍) 장종창(張宗昌): 장군의 재목이다, 처첩이 많았장다. 아쉽게도 품행이 악랄하고, 잔인하고 살륙을 좋아하며 먹고마시고도박하고 여색을 즐기는 모든 나쁜 짓을 저지른다. 그래서 해악이 더욱 컸다.


장종창(1881-1932), 자는 효곤(效坤), 별명은 "구육장군", "혼세마왕", "장퇴장군", "삼부지장군", "오독대장군", "장삼다(張三多)"등이 있고, 산동성 액현(지금의 연태시 내주시) 사람. 봉계군벌두목의 한 명. 일찌기 청도일본상인의 노동자의 파업을 잔혹하게 진압한다. 그리하여 "청도참안"을 일으킨다. 1932년 9월 3일, 산동성정부 참의 정계성에 의하여 진포철로 제남역에서 총살당한다.


3. 상서거비(湘西巨匪) 요대방(姚大榜): 삼조토비(三朝土匪), 토비로 50년을 지내며, 말 그대로 직업토비이다.


요대방(1882-1950?), 자는 필인(必印), 호는 점표(占彪). 상서 황현(지금의 호남성 회화시 신황동족자치현)에서 태어났다. 당시 국민정부는 무능하여, 지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 사회질서는 기본적으로 민간의 방파, 토비가 유지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독생자로 태어나서 버릇없이 자란다. 소년시대부터 놀기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며, 먹고마시고 도박질, 계집질을 하는 나쁜 버릇을 가진다. 나중에 귀주강무학당을 졸업하고,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다. 하루종일 긴장된 분위기에서 생활한다. 기민하고, 교활하며 간사하고 쉽게 남을 믿지 않는 특징이 있다. 1949년 겨울 인민해방군이 황현으로 들어가서 토비를 토벌한다. 그리하여 그는 최후를 맞이한다. 요대방은 인민정부의 회유를 거절하고, 다른 토비들과 연합하여 "지황초공유격총대"를 만들어, 끝까지 항거한다. 다음 해 해방군은 설양포위공격을 진행한다. 장의집은 호남, 귀주 경계인 양산의 5000명 토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다. 그후 호경만전투에서 요대방의 인마는 거의 죽는다. 요대방은 겨우 수십명의 비적을 데리고 십가평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흩어진 토비를 모아서, 육룡산에서 계속하여 비적질을 하려 한다. 그날 저녁 강을 건널 때, 해방군의 맹렬한 사격을 받아 요대방은 물에 빠져 죽는다.


4. 동릉대도(東陵大盜) 손전영(孫殿英): 도박꾼출신, 도문(道門)에서 사업을 일으키고, 바람부는대로 키를 틀고, 욕심이 많고 담량이 크다.


손전영(1889-1947), 아명은 금귀(金貴), 자는 괴원(魁元). 귀덕부 영성(지금의 하남성 상구시 영성현 마목진 정신장) 사람. 군인출신. 1928년 국민당에 들어가서 제6군 제12군 군장을 맡는다. 하북 마란욕에서 청동릉을 도굴하여(주로 서태후의 묘) 유명해진다. 1930년 중원대전에 참가하여 장개석의 반대편에 선다. 실패후에는 장학량의 부대에 편입된다. 1937년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기찰유격총사령관, 신5군군장을 맡는다. 1943년 하남에서 일본과의 전투중에 포로로 잡히고, 왕정위의 정부에서 '예북초공군총사령관"이 된다. 1945년 항전이 끝난 후, 다시 장개석을 쫗아 반공을 하고, 내전을 벌인다. 1947년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잡힌 후 병사한다. 죽을 때는 아주 처량했다.


5. 여토비 쌍창(雙槍) 타룡(駝龍): 기녀로 팔려가고 강호에 나와 비적이 된다. 홍안박명으로 비탄한 삶을 산다.


타룡(1901-1925), 원명은 장숙정(張淑貞, 혹은 素貞), 요녕 요양 사람. 농민가정에서 태어났고, 태어나면서부터 예뻤으며 글을 읽고 예를 알았으며 담량과 지략이 남달랐다. 전란중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고, 부친 장노호와 둘이 살아간다. 16살때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관성자(장춘)로 간다. 그러나 사기를 당해 기원에 팔려간다. 그후 자주 손님으로 오던 현지의 토비수령 왕대룡(본명 왕복당)이 그녀를 기원에서 구해준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금방 두령중 하나가 되며 별호를 타룡이라 한다. 얼마 후 대룡은 전사하고, 그녀는 수령이 된다. 동삼성에서 활약하고 자주 오상, 유수, 쌍성 등지에 출몰한다. 대오를 "인의군(仁義軍)"으로 개명하고 한때는 2000명이상으로 발전시킨다. 역정역사(亦正亦邪)했다; 나중에 일본주둔군을 때려죽여 봉계동북군의 포위토벌을 당한다. 그녀는 쌍권총을 썼고 용맹하며 전투를 잘했다. 여러번 포위공격하던 관병을 물리친다. 그러나 일본, 봉군 그리고 현지민단의 포위공격하에, 난석산에서 전멸하고 그녀는 겨우 몸만 빠져나간다. 그러나 의탁할 곳이 없었다. 결국 공주령기원에 들어간다. 1925년 1월 8일 홍순반기원에서 체포된다. 19일에는 장춘에서 총살형을 당한다. 타룡이 처형당했다는 것은 당시의 빅뉴스였고 그녀의 이름은 백산흑수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녀에 관한 뉴스, 이야기와 전설들이 수도없이 생겨난다. 장춘에서 태어난 한 작가에 따르면, 그가 4살때 모친이 그를 안고 구경을 간 적이 있는데, 총살형을 당한 사람은 삼십여세(25살일 것이다)의 여인이었다. 듣기로 여토비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적대시하지 않았고, 놀라고 흠모하는 투로 그녀가 얼마나 용맹하고 두 손으로 모두 총을 쏠 줄 알았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6. 기예변완비(冀豫邊頑匪) 곽청(郭淸): 토비에서 한간(漢奸) 그리고 국군까지 비적의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곽청(1906-1949), 자는 정천(井泉), 아명은 옥보(玉寶). 하북성 임장현(지금의 한단시)의 한 지주가정에서 태어난다. 부친 곽정옥(郭廷玉)은 토비와 왕래가 있는 청피혼자(靑皮混子)였다. 그가 5살때 부친이 사망하고, 그와 모친, 여동생 세 명만 남긴다. 토지는 120무나 가지고 있었다. 10살때 마을의 사숙에 들어가나 어려서부터 버릇없이 자라서 규칙을 지키지 않고 싸움을 즐겼다. 14살때 공부를 그만두고, 도박을 시작한다. 돈을 다 잃으면 훔쳤다. 다시 다 잃으면 다시 훔쳤다. 나중에 돈을 너무 많이 잃다보니 훔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강도짓을 저지르고, 납치를 한다. 도박을 좋아하는 습성으로, 가산과 토지를 점점 팔아버리게 된다. 그는 나쁜 짓은 하지 않은 일이 없는 완비, 악비였다. 1949년 4월, 4야전군 13병단이 지방무장세력과의 협력하에 안양을 포위공격한다. 외곽거점을 소탕한 후, 5월 5일 황혼부터 성을 공격한다. 다음날 여명 성벽을 폭파하는데 성공하고, 총공격을 개시한다. 각 부대는 북문, 대서문으로 성내에 돌진한다. 8시경 전체 성이 해방된다. 적군 14000여명을 사살하고, 15000여명을 생포한다. 부총지휘겸 안양성방어사령관 곽청은 해방군이 성내로 진입할 때 몇몇 호위병을 이끌고 창항가에서 동문으로 도망친다. 나중에 남쪽으로 도망쳐서 섭가원 남옥에 들어간다. 해방군이 포위하였고, 곽청은 자살을 시도하나 미수에 그치고 나중에 총에 맞아 죽는다. 이렇게 하여 그는 죄많은 인생을 마친다.


7. 안북거비(雁北巨匪) 교일성(喬日成): 관리에서 비적으로, 그는 군사천재이나 좌도방문의 길을 걷는다.


교일성, 자는 화문(化文). 1910년 산서성 응현(지금의 삭주시) 하사진 신보촌의 한 농촌가정에서 태어난다. 어려서 마마을 앓아 얼굴에 얽은 자국이 남는다. 어려서붙 담량이 크면서도 마음씀이 세심하다. 인간성이 없어, 부친을 산 채로 매장한다. 나중에 염석산에 의탁하여 해방전쟁때 응현을 지킨다. 그러다가 부하에게 피살된다.(구체적인 일자는 모름).  


8. 기북악비(冀北惡匪) 송전원(宋殿元): 도박꾼, 깡패, 토비의 삼위일체


송전원의 원적은 하북성 숭례현인다. 민국3년(1914년) 장북현에서 태어난다. 아명은 "오투자(五套子)", 외호는 "소오점(小五點)". 어려서부터 부모형누나의 사랑을 받아 버릇없고 구속받지 않으며 방탕한 습성을 지니게 된다. 사람을 때리고 욕하며, 물건을 훔치는 것을 실력으로 여겼다. 10살때 도박의 악습을 익히는데 자주 집안의 물건을 훔쳐가서 팔아버린 후에 도박을 한다. 아무 무뢰한이어서 이기든 지든 내놓으라고 한다. 깡패짓이 습성이 되고 아주 음탕했으며 간음이 습관화된다. 그의 마음에 든 여자는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는 용모가 별로였지만, 삼두육비의 괴물도 아니고, 키가 크고 건장하지도 않았고 글자도 읽을 줄 몰랐으며 학식이라고는 조그만치도 없었으며, 글을 쓸 줄도 모르고 병법도 몰랐지만, 그가 지휘하는 비적의 수는 적을 때는 1,2십명의 망명지도이고, 많은 때는 2,3백명의 오합지졸이었는데, 이런 토비의 두목이 찰북, 찰맹일대의 인민들에게 큰 해를 끼친다. 백성들은 그를 뼛속까지 미워했다. 그는 혼수모어하고 방파를 만들고, 결의형제를 만들며 살인약탈을 저질렀다. 어떤 때는 관병으로 나타나서 인민들을 괴롭혔다. 실은 모두 인민을 괴롭히는 토비였다. 심지어 외적에 의탁하여 매국노짓도 한다. 나중에는 최후가 비참했다.


9. 전서악비(西惡匪) 장결파(張結巴): 인육을 산채로 벗기고, 사람의 심장과 간을 먹었으며, 흉악하고 악독하기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이 자에 대한 자료는 상세하지 않다. "장결파"는 분명 그의 별호일 것이다. 운남 사람이며, 최후는 비참했다.


10. 천북아호(川北餓虎) 황청원(黃靑元): 부친은 깡패이고 부자는 모두 백성을 괴롭히며 사천을 횡행하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이 자에 대한 자료는 상세하지 않다. 별명은 '천북아호'이고, 사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