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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이대쇠(李大釗, 리다자오)의 후손중 3명의 고관

by 중은우시 2013. 12. 26.

글: 왕남방(王南方)

 

이대쇠는 하북성 낙정현(樂亭縣) 사람이다. 중국공산주의운도으이 선구이며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이고, 공산당의 주요 창시자중 한 사람이고, 저명한 학자이다.

 

이대쇠는 비록 일찌감치 떠났지만, 풍부한 혁명유산과 정신재부를 남겼다. 그가 만든 청정근근(淸正勤謹)한 가풍은 100년간 연속되었고, 3대에 걸쳐 이어졌다. 그의 아들 이보화(李葆華, 리바오화)는 서거하기 전에 중국인민은행 행장 겸 당위서기를 지낸다; 이보화의 자녀중 '부자'는 없다: 이청(李靑, 리칭)은 절강성 통전부부장과 성 정협부주석의 지위에서 퇴직한다. 이굉탑(李宏塔, 리홍타)은 안휘성 정협부주석을 지내고, 이아중(李亞中, 리야중)은 수리부 공정기술자이다. 이청과 이굉탑은 청렴하였다. 그것은 여러가지 사실로 알 수가 있다.

 

"할아버지에 대하여는 나도 책으로 알고 있다." 리아중의 말이다. 비록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글을 통하여 할아버지와 만났다.

 

이대쇠는 어렸을 때, 부친이 돌아가신다. 그는 할아버지가 길러주었다. 할아버지는 이대쇠의 교육을 아주 중시한다. "5살때 사숙에 들어갔고, 일본유학에서 귀국할 때까지 18년간 공부를 했다." 이아중의 말이다. 이대쇠는 어려서부터 민족해방사업이라는 원대한 뜻을 세운다.

 

이아중은 말한다. 이대쇠는 북대도서관관장으로 재직할 때의 급여가 140대양이었다. 나중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200대양으로 오른다. 여기에 그는 다른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매월수입이 최소한 250대양에서 300대양은 되었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집안의 재산은 겨우 1대양이었다. 안장할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공장(公葬)을 거행한다. 즉 공중이 돈을 모으는 형식으로 안장한 것이다." 1921년, 중공 북경지부가 성립된 후, 이대쇠는 매월 자신의 급여중 80대양을 활동경비로 내놓았다. 그외에 그는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돈을 보태어주었다. 매번 급여를 받을 때면 이대쇠가 한무더기의 차용증을 받아온다. 나중에 이씨집안의 식량이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북대교장 채원배는 회계과에 매월 이대쇠의 급여중 50대양은 따로 빼내어 이부인에게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이대쇠의 고상한 품격은 여러 사람을 감동시킨다. 이대쇠의 공장을 거행하는 모금에서,정치적 견해가 다른 왕정위도 1000대양을 내놓았다.

 

1927년 4월 6일, 봉계군벌 장작림이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북경에서 이대쇠등 80여명을 체포한다. 옥중에서, 이대쇠는 혹형을 당하지만 당의 비밀을 엄수한다. 4월 28일, 북양군벌정부는 사회여론의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대쇠등 20명의 혁명자를 교살한다. 이대쇠가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 나이가 겨우 38세였다.

 

이아중은 말한다. "할어버지가 살해된 후, 일가족은 전패유리(顚沛流離)했다. 부친 이보화는 체포를 피하기 위하여 친구의 도움하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경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에 합격하고, 일본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9.18"사건후 이보화는 학업을 중단하고, 분연히 귀국한다. 그리하여 학위를 따지 못한다.

 

현임 안휘성 정협부주석인 이굉탑은 부친 이보화를 언급하면서 감개무량하게 말한다: "부친은 우리에게 무슨 이런저런 규정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몸으로 가리키는 것을 말로 가리키는 것보다 중시했다. 어려서부터 부친은 할아버지의 사적을 우리에게 교육시켰다. 우리에게 스스로에게 엄격한 규율을 지키도록 하고 계속하여 공부하도록 시켰다."

 

이보화는 1909년 하북에서 출생한다. 10여세때, 그는 부친 이대쇠의 인도하에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그는 안휘성위 서기, 중국인민은행 행장등 중요직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른 고위급간부의 집안은 간소하기 그지없어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오래된 삼합판가구, 인조가죽으로 만든 의자, 객청의 쇼파아래가 바로 갱(坑)이다. 방은 1970년대의 건축물이다. 2000년, 중앙의 관련부서에서 그에게 새로운 집으로 옮길 것을 권했으나, 그는 말한다: "사는데 익숙해졌고, 나이도 많으니 안옮기겠다."

 

3년곤란시기에 이보화는 안휘성위 서기를 지낸다. 그가 부임한 후 한 첫번째 일은 바로 도시주민의 양식공급쿼터를 조사하는 것이었다.그는 양본(糧本) 하나를 빌려서 한 양점으로 가서 양식을 산다. 영업원은 그에게 쌀 3근, 말린고구마 7근을 주었다. 이보화는 말한다. "틀렸다. 국가에서 규정한 것은 1사람에게 매월 7근의 쌀과 3근의 말린고구마이다." 두 사람을 싸우기 시작한다. 나중에 문제가 분명해진다. 성위서기가 미복사방한 이야기는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보화의 온가족이 '문혁'때 당했던 일은 자녀들이 각골명심하고 있다. 이아중은 이렇게 회고한다. "부친은 성위서기에서 충격을 받고, 비투를 받고, 가산몰수당하고, 면직되고, 군에서 관리받고, 전체성을 유투하며 다닌다. 인신자유를 6년간이나 빼앗겼다." 가산몰수후, 이보화 부부는 조반파에게 붙잡힌다. 자녀들도 집에서 쫓겨난다. 그저 성위의 노천수영장의 이미 버려진 갱의실내에서 살 수밖에 없게 된다. 나중에 모친이 풀려났는데, 할 수 없이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뿐아니라, 5년의 기간동안 그들은 이보화가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1068년 하반기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만날 기회를 얻는다. 부친은 창로해지고 말랐다. 단 그는 역경중에서도 낙관적인 정신과 굳건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마치 할아버지 이대쇠가 그랬던 것처럼."

 

1978년, 이보화는 중국인민은행으로 옮겨서 일을 한다. "69세의 고령과 생소한 분야는 그에게 확실히 거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은행에서 일하는 4년동안, 부친은 금융업의 발란반정(拔亂反正)을 이끌고, 금융체제혁신을 전면적으로 전개하여 성공적으로 IMF와 세계은행에 가입하는데 걸출한 공헌을 세웠다."

 

이보화가 죽은 후, 기자가 이굉탑에게 물었다: "당신의 부친은 당신에게 유산을 얼마나 남겼는가?" 이굉탑이 대답한다: "우리는 유산이 필요하지 않다. 이대쇠의 자손은 정신유산만 있으면 충분하다."

 

기실, 몇몇 자녀의 생활을 보면, 이씨집안의 가풍을 알 수 있다. 얼마전 안휘성 합비에서 한 몸이 건장하고, 머리카락이 회색인 중년인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 속에 잇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는 길의 교통경찰도 그와 친절하게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가 바로 이굉탑이다. 지도자로서의 업무에 종사한지 20여년이 되었지만, 이굉탑은 4대의 자전거를 고장내고, 5벌의 우의를 못쓰게 되어 버리고, 7컬례의 신발을 버렸다. 나이는 들어가자, 요 몇년 그는 자전거를 전동자전거로 바꾼다. 나중에 출근길이 너무 멀어서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웃으면서 말한다. 자신은 능력범위내에서 최대한 근검절약한다고. "다만 이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쇼할 필요는 없다. 진실하면 된다."

 

1987년, 이굉탑은 안휘성 민정청 부청장으로 간다. 일찌기 4번이나 분방(分房)업무를 책임졌다. 모도 근 200채의 주택을 철거하고 분배했다. 그러나 자신은 단 한 채도 받지 않았다. 청국급간부로 있는 동안, 60평방미터의 오래된 집에서 살았다. 성의 관련규정에 따르면,이굉탑은 당연히 새로운 주택을 분배받을수 있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3차에 걸친 분방때 모두 이름이 명단에 올랐지만, 그는 청안에 사람은 많고 주택은 적다는 것을 고려하여, 모두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 1998년 마지막 분방때, 이미 청장이 된 이굉탑은 여러 젊은 과장들의 주택사정이 비교적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처가 불만을 나타내는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기회까지 버리고 만다. 나중에 성에서 그에게 20평방미터의 작은 집을 마련해주어 그의 아들은 비로소 자신의 공간을 갖게 된다.

 

이보화의 아들 이청의 성장과정에서, 두 건의 사건은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1994년, 이보화가 항주로 가서 회의를 열었다. 당시의 절강성위 서기 이택민은 그가 거처하는 곳으로 찾아간다. 마침 이청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택민은 부친에게 내가 일을 잘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부친은 즉시 이서기에게 말한다. '너희는 엄격하게 요구해야 한다'" "1995년, 나는 중앙당교에서 학습을 하고 있었다. 주말에 집으로 가서 부친을 뵈었다. 일반적으로 1시간정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당시에 나는 이미 50여세였다. 그러나 부친은 이것때문에 나를 봐주지 않았다. 기사에게 나를 데려오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이것이 부친의 자녀에 대한 큰 사랑이다. 진정하고, 엄격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