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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방)

낭중기병(郞中騎兵): 유방의 최정예부대

by 중은우시 2018. 7. 17.

글: 김릉물(金陵物)


초한전투에서 항우(項羽)의 무력은 엄청났다. 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이다. 그의 지휘를 받는 초군(楚軍)은 백전백승의 부대였다. 진군을 격패한 후 제후들은 더더욱 그의 앞에 줄을 섰고, 항우는 자신의 영웅기개를 최대한 드러낸다.


항우의 군대는 전투력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유방의 수하에 전투력이 아주 강한 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는 항우와 정면으로 대결할 수 있었을 뿐아니라,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유방이 천하를 취하는 것을 돕는다. 이 부대는 낭중기병이라 부른다.


기원전205년, 항우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제왕(齊王) 전영(田榮)을 토벌한다. 유방은 기회를 틈타 제후를 모아서 56만대군으로 항우의 본거지 팽성(彭城)을 취한다.


유방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텅빈 팽성을 얻어, 가볍게 항우의 기반을 장악한다. 항우는 대노했고, 친히 3만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유방을 공격한다. 그 결과 유방의 연합군은 궤멸했고, 유방은 계속 도망치면서, 반격을 할 엄두도 못냈다. 특히 수수(睢水) 부근에서 연합군은 10만여명이 참살당한다. 수수는 이로 인하여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 유방은 형양(滎陽)까지 도망쳐서 겨우 수습하고 자리를 잡는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소수로 다수를 이긴 팽성전투이다.


형양에 있는 유방은 위기일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소하가 구원병을 보내준다. 관중에서 노약자들까지 보낸 것이다. 유방은 통열한 반성을 하고나서 정예병사를 골라 항우의 군대와 정면대결할 수 있는 정예부대를 만든다. 이 부대가 바로 낭중기병이다.


군대내의 병사들은 이필(李必), 낙갑(駱甲) 두 명을 추천하여 교위(校尉)가 되어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진군 출신이고 자신들이 신임을 받지 못핟고 여겨 유방을 따르며 전투에 참가했던 용장 관영(灌嬰)으로 하여금 중대부(中大夫)가 되어 기병을 지휘하도록 청한다. 낭중기병은 말을 타고 활쏘는데 능했고, 작전경험이 풍부한 관중의 진나라군대출신으로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진나라기병의 강인한 전투력과 양호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의 군대는 단기간내에 수준이 한단계 올라간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낭중기병과 항우의 대결은 여전히 항우와 진나라 정예기병의 대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낭중기병은 명을 받아서 조직된 후 훈련을 할 시간도 없이 바로 전쟁터에 투입되고 항우와 싸운다. 게다가 한신, 근흡(靳歙)이 수만의 흩어진 병사를 모았다. 쌍방은 경현(京縣), 색정(索亭)에서 전투를 벌인다. 역사에서 말하는 경색지전(京索之戰)이다.


이 전투에서 한신이 총사령관을 맡는다. 그는 낭중기병을 주력으로 하여, 금방 소수로 다수를 이기고, 사기가 한창 올라있는 항우와 전투를 전개한다. 낭중기병은 기적처럼 항우의 군대를 이긴다. "낭중기병이 초나라기병을 형양의 동쪽에서 쳐서, 대파한다"


경색지전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 그러나 의미는 아주 크다. 명장 한신이 용맹한 낭중기병을 지휘하여 성공적으로 항우의 서진을 저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초한지쟁은 대치상태에 들어간다.


그후 낭중기병은 한신, 관영의 지휘하에 남북으로 다니면서 전투를 벌이고, 한군의 주력이 된다. 정형지전(井陘之戰)에서 낭중기병은 도로를 우회하여 조군의 뒤로 가서 깃발을 거꾸로 꼽아 조군이 붕괴되도록 한다. 제나라를 멸망시키는 전투에서, 한신을 다라 전횡(田橫)을 격파하고, 전광(田廣)을 생포하며, 용차(龍且)를 죽인다. 나중에 초군의 후방에 깊이 들어가 천리를 전전하며 전투를 벌인다.


낭중기병의 가장 휘황한 전적은 해하지전이다. 해하지전에서, 항우가 마지막에 오강에서 자결하는데, 가장 먼저 돌진하여 시신을 빼앗아 온 것은 5명의 낭중기병이다. 여마동(呂馬童), 왕예(王翳), 양희(楊喜), 여승(呂勝), 양무(楊武) 이 다섯명은 모조리 후(侯)에 봉해진다.


이것은 마지막에 항우를 포위하고 최전선에서 돌진한 것은 바로 이 정예기병이라는 말이다. 이 5명을 제외하고, 주정(周定), 정의(丁義), 정례(丁禮), 변흔(卞欣), 근강(靳强)등도 후에 봉해진다. 그들은 모조리 낭중기병 출신이다.


낭중의 원래 으미는 전국시대의 궁중시위를 말한다. 초한쟁패의 전투를 거쳐, 낭중기병은 유방이 가장 의존하고 신임하는 부대가 된다. 그러므로 한나라 초기에 낭중기병은 순조롭게 유방의 금위군이 된다.


한왕조가 건립된 후, 유방은 장안성에 3개의 정예부대를 남겨두었다.


첫째는 미앙궁이북을 지키는 북군(北軍)으로 병력은 4-7만 가량이다. 장안성내의 치안을 책임진다. 전투력이 강한 야전부대이다; 둘째는 미앙궁이남을 지키는 남군(南軍)이다. 약 2만명으로, 궁문밖의 경비와 호위업무를 담당한다. 셋째는 낭중기병이다. 낭관(郞官)이라고도 불렀다. 이때의 낭중기병은 이미 금위군이 되어 있었다. 낭중령(郎中令)이 지휘한다. 그 아레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과 좌,우중랑장의 3개 관서가 있었다.


그들은 평소에 궁성을 수비하고, 유방이 외출할 때는 곁에서 호위했다. 유방이 출정할 때는 친위부대가 된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것은 낭관들이 유방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다. 일단 낭관이 되면, 이것은 관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승장구한다. 그리하여 고대의 중요한 관리선발제도가 나타난다. 찰거제(察擧制)


유방시대에 재능을 가진 인재는 낭관을 통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한무제시기에는 '거효렴(擧孝廉)'의 표준을 제정한다. 그리하여 한나라관리의 중요한 선발방식이 된다. 예를 들어, 사마상여(司馬相如), 동방삭(東方朔), 전분(田蚡)등이 모두 이 길을 통하여 관직에 나간다. 당연히 사마상여는 거액의 돈을 들였다.


한나라 초기, 유방은 왕왕 낭중기병의 호위하에, 북군을 주력으로 하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반란을 평정했다. 이런 방식으로 유방은 장도(臧茶), 한왕신(韓王信), 진희(陳豨), 영포(英布)등의 반란을 진압한다.


바로 한신 본인도 관영이 명확히 유방의 편에 서 있는 상황하에서 병권을 박탈당한다. 여씨들의 난에서도 관영은 명확히 유씨의 편에 선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낭중기병과 관영은 확실하게 유방의 심복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제국의 충실한 수호자이고, 그의 옛상사인 한신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낭중기병의 최대 패전은 백등지위(白登之圍)이다.


기원전200년, 한왕신이 흉노에 투항하면서, 한,흉노간에 큰 전투가 벌어진다. 모돈선우는 한나라대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서 광무, 진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유방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오기를 기다렸다. 모돈선우는 먼저 패퇴하며 약한 모습을 보여 유방이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오도록 유도한다. 결국 유방은 흉노의 40만대군에 의해 평성부근의 백등산에 포위당한다.


후인들의 고증에 따르면, 백등산은 기실 그다지 크지 않다. 십여만의 군대를 받아들일만하지 않다. 이때 유방을 따른 것은 그의 금위군과 북군정예부대일 것이다. 유방은 7일간 포위되어 있었고, 진헌의 계책으로, 낭중기병은 안개가 낀 날씨를 이용하여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다.


유방이 7일간 포위되어 있으며 거의 양식과 화살이 다 떨어졌다. 더욱 참혹한 것은 날씨가 춥고 눈비가 내려 사병들 중 손가락이 동상으로 떨어진 자가 열에 둘,셋이었다. 이는 낭중기병에게는 큰 치욕이다. 이때부터 유방은 흉노에게 화친. 호시(互市)정책으로 바꾼다. 낭중기병은 초한쟁패시대의 예기를 잃었고, 몸에 흐르고 있던 진나라철기의 혈액도 점점 묽어져 간다. 한무제시대에는 결국 우림군으로 대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