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지동(謝志東)
양국충은 당현종 시기의 유명한 간상(奸相)이다. 그는 양귀비의 먼 친적 오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적에서는 모두 양국충이 양귀비의 언니인 괵국부인(虢國夫人)과 간통했다고 적고 있다. 예를 들어, <구당서.양국충전>에서는 "귀비의 언니 괵국부인은 국충이 그녀와 사통했다. 선의리에 집을 연결시켜...주야로 만나니 법도가 없었다. 어떤 때는 괵국부인과 나란히 입조하며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즐거워했다. 길거리에서 보는 사람들이 놀라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자치통감.당기>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양국충과 괵국부인은 집이 이웃하고 있었다. 주야로 왕래하며 법도가 없었다. 혹은 나란히 말을 달려 입조했고, 장막을 치지 않아 도로에서 눈을 가렸다." 정사에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아무런 근거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양국충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구당서>는 이렇게 적었다: "무측천때 행신(幸臣) 장역지(張易之)가 양국충의 외삼촌이다." <신당서>에서는 그러나 이렇게 적고 있다: "양국충은 태진비(太眞妃, 양귀비)의 종조형(從祖兄)이고, 장역지가 낳았다." 장역지는 무측천의 남총이다. 양국충이 장역지의 외조카이건 아들이건, 어쨌든 관계가 있었다. 양국충과 양귀비의 관계에 대하여는 일설에서는 증조형매관계라고 하고, 일설에서는 동조형매관계라고 한다. 양국충과 괵국부인의 혈연관계가 도대체 몇대나 사이에 두고 있는지는 의문이 남아 있으므로, 그들간의 간통을 난륜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난륜이라고 하더라도 성관념이 개방되어 있던 당나라에서는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나라황실의 혼인관계는 너무나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괵국부인은 양귀비의 셋째언니이다. 일찌기 하동의 망족(望族)인 배씨(裴氏)가족에 시집가서 1남1녀를 낳았다. 그러나 남편이 일찍 죽는다. 양귀비가 총애를 받은 후, 당현종에게 청하여 셋째언니를 장안으로 모셔오고, 저택을 하사한다. 세명의 언니는 나중에 각각 한국부인(韓國夫人), 괵국부인,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진다. 세 부인은 나란히 황상의 성은을 입고, 권세가 조야를 뒤흔든다. 공주이하 모두가 예로 대한다. 세 부인 중에서 괵국부인이 가장 풍류적이었다. 천보5년(746년), 당현종은 양귀비와 그녀의 세 언니를 데리고 곡강(曲江)으로 순행을 간다. 주연을 베푸는데, 당현종과 괵국부인이 몰래 만나서 즐기다가 양귀비에게 발각된다. 그리하여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양귀비는 질투를 부리다가 당현종에게 황궁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양귀비가 떠나자마자 당현종은 후회한다. 그리하여 저녁에 다시 그녀를 데려온다. 가정갈등은 이렇게 풀어진다.
양국충이 괵국부인과 어울린 것은 아마도 이 사건 이후일 것이다. 과부로 살고 있던 괵국부인은 한창 나이였다. 성상대를 찾아야만 했다. 황제와 즐기다가 동생의 질투를 샀으니 자연히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양국충이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빈틈을 메워준다. 양국충과 괵국부인중 누가 먼저 유혹했는지는 사서에 기록이 없다. 그래서 함부로 추측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서로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국충과 괵국부인이 놀아나는데, 양국충의 부인은 질투하지 않았을까? 현존하는 사료를 분석해보면, 양국충과 부인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듯하다. <구당서.양국충전>에 따르면, "양국충은 촉창(蜀娼) 배씨녀를 취했는데 이름이 배유(裴柔)이다." 양국충의 부인 배유는 기생출신이다. 아마도 남녀간에 즐기는 일에 대하여는 비교적 개방적이었을 수 있다.
그 외에 <개원천보유사>에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쓰여 있다: "양국충이 강소절강에 사신으로 떠났다. 그의 처는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서, 병이 들 정도였다. 돌연 꿈을 꾸는데 양국충과 교합하고 이로 인해 회임을 한다. 나중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비(朏)라 한다. 양국충이 사신업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처는 꿈속의 일을 이야기 한다. 양국충이 이렇게 말한다: '이는 부부간에 서로 생각하고 애정이 깊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소리높여 웃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꿈속에 임신했다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양국충은 부인의 외도에 탓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녀를 위해 변명까지 만들어준다. 이는 자신의 명성을 고려한 것외에 부부간에 일종의 금기나 묵계같은 것이 있었던 것같다. 이들 부부는 부창부수라 할 만하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양국충이 괵국부인과 간통을 해도, 배유는 질투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반대로 배유는 적극적으로 괵국부인에 접근한다. 괵국부인의 남편은 성이 배씨이고, 하동의 망족이다. 출신이 비천한 배유는 하동배씨와 관계를 맺으면 체면이 서는 일이다. 그외에 배유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괵국부인은 그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괵국부인은 그녀에게서 양국충을 빼앗아가려 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저 필요할 때 잠시 빌리는 것뿐이다. 양국충은 고급성인용품인 셈이다. 이렇게 보니 두 여자는 서로 평화공존할 기초가 생겼다.
두 여인의 운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같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당현종이 황급히 사천으로 피난가고, 마외파에 이르렀을 대, 금군이 병변을 일으켜, 양국충 부자를 주살하고, 당현종을 핍박하여 양귀비를 사사하게 한다. 괵국부인과 배유등 가족은 그 소식을 듣고 진창(陳倉)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현지관리의 추격을 받는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대나무숲에서 배유는 괵국부인에게 검으로 자신을 찔러달라고 한다. 괵국부인은 배유를 찌른 후 자결한다. 그러나 죽지 않고, 현리에게 압송되어 감옥에 갇힌다. 그 후에 피가 목구멍에서 응고되어 죽는다. 그녀들은 함꼐 진창의 교외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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