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피휘(避諱): 천하에서 가장 한심했던 일....

중은우시 2018. 10. 19. 14:54

글: 의사리(衣賜履)


기원전64년, 한선제(漢宣帝) 유병이(劉病已)는 조서를 내렸다. 듣기로, 고대 천자(天子)의 이름은 민간에서 쓸 수 없다고 하니, 쉽게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나는 이름을 유순(劉詢)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유병이가 이름을 바꾼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고대의 중요한 제도 하나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피휘"이다. 이것은 절대로 사소한 일이 아니다. 조금만 실수하면, 죽을 수도 있다. 유병이는 이름에 "병(病)"자와 "이(已)"자가 있다 모두 자주 쓰는 글자이다. 만일 이름을 고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백양(柏楊) 선생은 "피휘"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는데, 아래에 인용해 보고자 한다.


"고대의 관료사회에는 두 가지 문자유희가 있었다. 하나는 작호(綽號)로 시호(諡號), 묘호(廟號), 존호(尊號)가 포함된다. 다른 하나는 피휘로 유가에서 권세있는 사람에 대한 비굴한 아첨이다. 작호보다 훨씬 골치아프고, 훨씬 후안무치하고, 영향은 더욱 심원하다.


"휘(諱)"는 동사로 쓰면 '회피한다'는 뜻이고, 명사로 쓰면 '어른의 이름'이라는 뜻이다. 피휘는 바로 어른의 이름을 쓸 수 없을 뿐아니라,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른의 이름은 미친개의 엉덩이와 같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 만일 부주의해서 건드리게 되면 큰 화가 미치게 된다. 즉시 물리게 될 것이고, 독이 퍼져서 결국 죽을 것이다. 오천년동안, 중국인들은 납세와 복역 외에 매일 여러가지 크고 작은 괴이하게 생긴 미친개의 엉덩이를 만나야 했다. 오랫동안 이는 전체 인민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어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은 고대 <예기>에 명문의 규정이 있다. 그 후에 점점 독자적인 학문으로 발전한다. 3년을 연구해도 다 연구하지 못할 정도이다. 대체로 말하자면, 피휘에는 4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개자(改字)이고, 둘째는 공격(空格)이고, 셋째는 결필(缺筆)이고, 넷째는 개음(改音)이다. 진시황의 부친의 이름이 영자초(嬴子楚)인 관계로 "초국(楚國)"은 "형국(荊國)"으로 바꿔야 했다; 한무제(漢武帝)의 이름이 유철(劉徹)이어서, "괴철(蒯徹)"은 이름을 "괴통(蒯通)"으로 바꾸게 되고, "철후(徹侯)"는 "통후(通侯)"로 바꾼다. 당태종 이세민의 이름에 "세(世)"자가 있어서, "왕세충(王世充)"은 "왕충(王充)"으로 바뀐다. 공자의 이름도 피휘해야 해서, "공구(孔丘)"의 "구(丘)"는 "모(眸)"로 읽는다.


피휘를 위하여 국호를 바꾸기도 하고, 성씨를 바꾸기도 했다. 역사상 유명한 문언박(文彦博)은 원래 성이 경(敬)이다. 증조부때, 후진(後晋)의 황제 석경당(石敬瑭)의 '경'자를 피휘하여 성을 '문(文)'으로 바꿔어야 했다. 후진이 와해되고 원래의 성인 '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재수없게도, 송태조 조광윤의 조부의 이름이 조경(趙敬)이었다. 그래서 경씨는 다시 '문'씨로 살아야 했다. 이름과 성을 바꿀 뿐아니라, 관명(官名)이 대인물의 이름과 같으면(같은 자이거나 같은 음) 관직도 바꿔야 한다. <북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이연실(李延實)은 태보(太保)에 임명되었는데, 조부의 이름이 이보(李寶)였다. 보(保)와 보(寶)는 음이 같다. 그래서 사직하고 맡지 않았다. 아문은 전부 없앨 수 없으므로 아문을 바꾸었다. 이세민의 "민(民)"자의 위력으로 "민부(民部)"는 할 수 없이 "호부(戶部)"로 바꾸어야 했다. 아문도 바꾸니, 지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에게는 '항(恒)'자가 있다. 그래서 "항산(恒山)"은 "상산(常山)"으로 바꾸게 된다. 지명을 바꾸니 경전서적의 글자도 바꾸게 된다. 유방의 이름에 '방(邦)'이 있어, <논어>의 "하필거부모지방(何必去父母之邦)"이라는 문구는 "하필거부모지국(何必去父母之國)"으로 바뀐다. 이름을 바꿀 뿐아니라, 관직도 바꾸고, 책도 바꾸고, 땅이름도 바꾸고, 동물도 바꿔야 했다. 여후(呂后)의 이름은 여치(呂雉)인데, '치(雉, 꿩)'은 '야계(野鷄)'로 바뀐다,


북송때 전등(田登)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주의 장관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그의 이름을 쓸 수 없게 한다. 만일 이를 어기면 채찍을 맞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燈)"을 "화(火)"로 바꿔 불렀다. 상원절(上元節)에 주정부에서 고시를 붙였는데, '방화삼일(放火三日)'이라 했다. 이것이 바로 "주관(州官)의 방화(放火)는 허용되나, 백성의 점등(點燈)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유례이다. 남송때의 전량신(錢良臣)도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의 막내아들은 아주 총명했다. 하루는 <맹자>를 읽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 "금지소위양신(今之所謂良臣), 고지소위민적야(古之所謂民賊也)". 그는 이렇게 읽었다: "금지소위다다(今之所謂爹爹), 고지소위민적야(古之所謂民賊也)" '다다'는 '부친'이라는 말이다. 오대(五代)때의 유명인물인 풍도(馮道)가 교사를 청하여 <도덕경>을 강독하게 했는데, 첫문구인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를 읽을 때 '도(道)'를 '설(說)'로 바꿔읽었다. 


천하에서 가장 재미없는 일은 피휘라고 할 수 있다. 오천년동안 중국의 지식인들은 대인물의 이름을 피휘했는데, 여기저기에 어른의 이름을 물어보아야 했다. 그리고 부친, 모친, 조상의 이름은 또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다른 사람이 쓰지도 못하게 했고, 말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야 했다. 알지 못하면 어떻게 그 글자를 쓰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모순된 곤경을 오히려 일종의 신성불가침한 존엄한 법칙으로 여겼다. 살아있는 사람의 신경을 극도로 날카롭게 만들 뿐아니라, 모든 문자기록들까지 엉망진찬으로 만들어 버린다.


"병이"라는 두 글자는 너무 흔하다. 아마도 그래서 실수로 그 글자를 언급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유병이가 자기의 이름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지고무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황제에게 어느 정도 인정미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