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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중국 고대인의 "명함"

by 중은우시 2020. 8. 20.

글: 역사백가회(歷史百家匯)

 

명함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현대사회에서는 필수품이다. 가볍게 '이것이 제 명함입니다'라고 한 마디 하는 것은 아주 체면있고, 우아한 행위라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명함은 일반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다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명함의 보급도 폭넓게 이루어졌다. 현대의 명함은 일반적으로 비지니스 교류에서 이루어지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 연락처, 회사직위등을 적는다. 간단히 말해서, 명함은 교류의 도구이다. 일종의 편리하고 빠르게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현대사회에 명함이 이렇게 보급되어 있는데, 고대인들에게도 명함이 있었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알(謁)

 

현대의 명함은 인쇄한 것이고, 장방형의 단단한 종이로 만들고 매우 가볍다. 중국고대의 명함은 진한(秦漢)시기에 나타났는데, 그때는 종이가 없었고, 현재처럼 그렇게 편리하지도 않았다. 재질은 일반적으로 나무조각이나 대나무조각이었다. 조각도 아주 컸다. 그리고 명함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알"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선진시기의 정부기구에 "알자(謁者)"라는 관리를 둔 것과 관련이 있다. '알자'는 국군(國君)의 좌우에서 모시면서 전달등의 업무를 담당했었다.

 

진나라가 통일한 후, 각 왕조에는 기본적으로 모두 '알자' 혹은 그와 유사한 관직이 있었다. 경제문화가 발전하면서, 일부 고관대작들은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책임지는 '알자'를 두게 된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통복(通僕)'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관직이 아니고, 주인의 뜻에 따라 방문자에게 말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업무내용은 현재의 비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편의를 위해 '알'이 출현한다. 위에 자신에 관한 정보와 만나려는 이유를 써놓는다. 그리고 직접 상대방의 집에 넣는다. 그러다보니 말을 전하는 사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는 인력과 물력을 훨씬 절약할 수 있었다.

 

진한시대에는 사회등급이 삼엄했고, "알'은 고관대작이 쓰는 것이었다. 평민백성은 쓰지 못했다. 다만 예외는 있었다. 그 예외는 바로 한고조 유방이다. 진나라에서 정장(亭長)으로 이쓸 때, 한번은 현령이 연회를 열어 각계의 유명인사들을 초청했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대당(大堂) 밖에 있어야 했다. '깡패' 출신의 유방은 이를 보고 자연히 끼어들고 싶어졌다. 돈은 없었다. 그는 '알'을 넣는다. 그리고 하전삼만(賀錢三萬)이라고 썼다. 물론 돈은 한푼도 없었다. 이런 대담한 거동은 연회에 참석했던 여공(呂公)의 주목을 끌었고, 나중에 여후(呂后)를 유방에게 시집보내는 계기가 된다. 이를 보면 큰 일을 하려면 얼굴이 두꺼워야 하는 것같다. 물론 유방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명자(名刺)

 

동한(東漢)시대에 이르러 "알"은 "자"로 이름을 바꾼다. 종이의 발명으로, "명자"는 종이로 바꾸게 된다. 종이의 발명이 '명자'의 사용을 촉진했다. 더 이상 진한시대처럼 등급의 제한도 없었다. 동한시기의 '자'는 이미 상당히 보편화된다. 기록에 따르면, 동한의 명사 곽태(郭泰)는 자주 명자를 받았고, 수레에 가득 실을 정도라고 과장했다. 한나라말기의 광사(狂士) 미형(彌衡)도 명자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만들었지만 남에게 주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에 쓴 자신의 이름이 흐릿해질 정도였다.

 

"문상(門狀)"

 

동한에서 당송시기까지, 명함은 더 이상 '자'로 불리지 않는다. '문상'으로 불린다. 당송시기에는 과거가 치뤄졌고, 이는 하층백성이 상층사회로 올라가는 통로였다. 매번 과거시험이 끝나면, 오늘날의 대학입시가 끝난 것처럼 긴장을 풀고 지낼 수 있다. 이들 새로 과거에 합격한 진사들은 사방으로 고관대작들을 방문하여 그들로부터 인정받고 발탁을 받고자 한다. 자신의 이후 정치적 행보를 위해 바닥을 까는 것이다. 이들 명문귀족을 찾아가려면 문저 '문상'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주인이 만나줄지 말지를 기다리는 것이다.

 

명첩(名帖)

 

고대의 명함에 '명(名)'자가 붇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때이다. 그때는 '명첩'이라고 불렀다. 이때도 글을 읽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글을 아는 사람은 명나라때 다른 왕조때보다 증가한다. 비교적 법도를 따졌다. 학생이 스승을 만나러 가거나, 하급관리가 고위관리를 만나러 갈 때는 '명첩'을 올려야 한다. 명첩의 글자는 커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겸손함을 보이는 것이다. 글자가 너무 작으면 오만한 것으로 비추었다. 그리고 전체 명첩을 꽉 채우게 써야 했다. 명나라때 '명첩'은 크기가 약 길이 7촌, 너비 3촌이었다.

 

명편(名片)

 

명함의 명칭은 청말명초에 이르러 '명편'이라 칭해진다. 이때부터 소형화된다. 특히 관료사회에서, 명편의 크기는 관직의 크기를 나타냈다. 관직이 크면 명편은 작고, 관직이 낮으면 명편이 컸다.

 

고대의 명함은 각 시대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내용과 규칙도 오늘날과는 약간 달랐다. 신분과 지위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명함에 일반적으로 관직, 군리(郡里), 성명을 쓴다. 아주 정중한 자리가 아니면 그냥 성명만 쓰기도 한다. 하급이 상급을 만나러 갈 때는 내용에 겸양의 글이 많아진다. 예를 들어, "모근상(某謹上), 알모관(謁某官), 모월일(某月日)" 혹ㅇ느 "모근지후(某謹祗侯)", "모관근상(某官謹狀)"등

 

고대의 명함은 사용방식에도 법도가 적지 않았다. 집을 나서 누구를 만나러 갈 때는 반드시 명함을 먼저 보내야 한다. 명함을 보냈는데도 만나주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서 반감을 사게 된다. 명청시기에 등급이 서로 다른 사람은 사용하는 명함도 달랐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색깔이었다.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홍색을 썼다. 만일 황친국척(皇親國戚)이라면 다른 사람들과 또 달랐다. 예를 들어, 친왕(親王)이라면, 명함에 '왕(王)'자 혹은 별호를 슨다. 이를 통해 자신의 존귀함을 드러낸다.

 

명함의 사용은 일부 습속, 예의와도 관련이 있다. 집안에 상사(喪事)가 있으면, 명함의 왼쪽귀퉁이에 '제(制)'자를 쓰거나 혹은 4방에 검은 테두리를 그린다. 고대의 명함에는 또 하나의 용처(用處)가 있다. 새해인사에도 쓴다. 연말이 되고, 친척과 친구들이 너무 많은 경우, 고대에는 교통도 발달하지 못해서 한명 한명 다 방문할 수 없었다. 이때는 노비에게 명함을 가지고 가서 새해인사를 하게 한다. 이를 "비첩(飛帖)"이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것은 각 집에서도 문앞에 종이봉지를 붙여둔다. 그것은 '비첩'을 받기 위함이다. 그것은 '복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문징명(文徵明)의 <하년(賀年)>이라는 시는 '비첩'으로 새해인사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했다.

 

불구견면유통알(不求見面惟通謁)

명지조래만폐려(名紙朝來滿蔽廬)

아역수인투수지(我亦隨人投數紙)

세정혐간불협허(世情嫌簡不嫌虛)

 

명함은 중국 조상이 경제문화발전에 따라 교류하기 위해 발명한 도구이다. 이는 시대를 따라간 것이고, 당시의 사회생활을 반영한다.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소멸하지 않았다. 현대의 명함도 옛날의 명함에서 발전해 온 것이다. 그리고 외국으로 퍼져갔다. 일본어에서는 지금도 "명자(名刺)"라는 말이 남아 있다. 명함은 중국에서 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