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중국의 인장문화는 이미 3000여년의 역사를 지녔다. 많은 인장의 배후에는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있다. 도장은 실용과 예술의 결합체이다. 유구한 민족문화전통과 특색을 지닌 예술의 보배이다. 북경올림픽때 중국인을 채택한 이래, 인류 비물질문화유산목록에 들어갔으며, 인장은 점차 인기소장품목의 새로운 품목으로 등장했다. 그 조그마한 인장에 도대체 어떤 역사적 연원이 있는 것일까?
새인(璽印)의 기원은 혹은 상(商)부터라고 하고 혹은 은(殷)부터라고 하여 정론이 없다. 유물과 역사기록에 따르면, 최소한 춘추시기에는 이미 나타났고, 전국시대에는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선진의 인장을 통칭하여 "고새(古璽)"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그저 상업상 화물교류시의 증빙으로 썼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인장은 권력의 상징이 된다. 황제가 쓰는 것만을 "새(璽)"라고 부를 수 있게 되고, 신하와 백성이 쓰는 것은 "인(印)"이라고 부른다.
진나라는 겨우 15년간 존속했고, 남긴 도장도 많지가 않다. 한나라는 전각(篆刻)역사상 가장 휘황했던 시기이다. 대량의 인장이 세상에 전해져 내려오고 그 중에는 걸작도 많아,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 일으킨다. 한나라때부터 인장(印章), 장(章), 인신(印信), 신인(信印)이라는 말이 나타난다. 제후왕(諸侯王)과 왕태후(王太后)들은 진나라때의 제도를 이어받아 여전히 "새(璽)"라고 했고, "장(章)"은 군대장수들이 사용했다.
전순평정(典淳平正)의 무전(繆篆)을 기초로 하는 진한(秦漢)의 인풍(印風)은 800년이 지난 후에 역사무대에서 물러난다. 수나라때부터 중국고대인장제도와 풍격이 일신되는 새로운 역사시기를 열게 된다. 종이의 사용, 간독(簡牘)의 퇴출로 인체(印體)가 커지고, 공인(公印)은 더 이상 진한시기처럼 직관명을 새겨서 본인이 허리때에 차고 다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어 관청을 대표하는 것이 된다. 공인은 더 이상 허리에 차는 것이 아니라 갑에 넣어서 관청에 보관하는 것이 된다.
당나라에는 4가지 변화가 발생한다. 첫째, '보기(寶記)', '주기(朱記)'등 새로운 인장의 명칭이 나타난다; 둘째, 당나라초기의 인장 뉴식(鈕式)이 더 발전하여 비뉴(鼻鈕)가 높아지고, 점점 수장방형(竪長方形)으로 발전한다. 후기에 이르러서는 궐뉴(橛鈕)로 발전한다. 셋째, 도장의 뒷면에 해서(楷書)로 인문(印文)을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무이현지인(武夷縣之印)이라는 다섯 글자를 뒤에 새겼다. 더 이상 수나라 공인처럼 도장의 뒤에 글자를 새기는 시간이 들지 않게 했다. 넷째, 새로운 도장유형이 나타났는데 감장인(鑒藏印)과 재관인(齋館印)이다.
오대십국을 거친 송나라는 한때 오대의 구인을 관인으로 그대로 썼다. 나중에 다시 공인을 주조할 때, 인문(印文)에는 '신(新)' 혹은 '신주(新鑄)'라는 글자를 추가했다. 이를 통해 오대의 공인과 구별했다. 예를 들면, "동관현신주인(東關縣新鑄印)"같은 식이다. 관인은 반드시 동으로 주조했고, 관리의 직급차이에 따라 크기도 구분되었다. 초기의 인문(印文)과 인변(印邊)의 너비는 비슷했으나, 그후에 인변이 점점 더 늘어난다. 그후 남송에는 인문의 앞에 "행재(行在)"라는 두 글자가 추가되었다. 혹은 연호를 넣어서 신구를 구분했다.
원나라때, 왕면(王冕)은 화유석(花乳石)에 도장을 새기면서, 문인들이 도장을 사용하는 선례를 연다. 명나라중후기에는 문팽(文彭), 하진(何震)등의 서화가들이 부드럽고 쉽게 새겨지는 청전석(靑田石)에 스스로 전각으로 파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여, 유파전각의 서막을 연다. 그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예술품으로 발전한다. 명청 두 왕조에서부터 중화민국시기에 이르기까지, 인가(印家)가 배출되며 유파도 여럿이 나타난다. 특히 정경(丁敬)을 우두머리로 하는 '서냉팔가(西冷八家)'와 등석여(鄧石如)'를 대표로 하는 '환파(皖派)'가 가장 유명했고, 영향이 컸다.
고대에 인장에 가장 미친 사람을 꼽는다면 반드시 건륭을 꼽아야 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생동안 1800여매의 인장을 만들었다. 즉 재위 60년간, 평균 12일에 1개의 인장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본 서화에 자신의 이름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송휘종 조길도 서화에 글을 쓰고 인장을 찍었다. 그러나 그는 원화의 곁에 종이를 하나 더 덧대어서, 그의 뛰어난 수금체와 인장을 찍었다. 서화를 상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아취를 더했으니 실로 문명의 모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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