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초광인(我楚狂人)
팔기제도는 누르하치가 만든 이래로 청태종(홍타이시)는 만,몽,한 3개의 팔기를 건립하고, 다시 순치, 강희, 옹정의 3황제를 거치면서 점차 완비된다. 여기에 약 100여년이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후 청나라는 시종 팔기제도를 유지하고, 그것을 근본적인 제도로 인식했으며,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유지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팔기제도와 청왕조는 동생공사(同生共死)했다고. 그렇다면, 만청귀족들은 왜 팔기제도를 만들었을까? 팔기제도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왜 청나라는 팔기제도를 목숨줄처럼 유지하려 했을까? 팔기제도는 어떻게 멸망의 길로 향하게 되었는가? 필자는 사료를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1. 누르하치가 건립한 기(旗)제도 및 초기의 기(旗).
누르하치가 만든 기제도는 여진인들이 일관되게 실행해오던 우록(牛錄)제도의 기초 위에서 형성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록제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왜 우록제도라고 부르는가? 간단히 말해서, 우록제도라는 것은 가족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는 것이다. 여진인들은 당초에 아주 약소한 유목부락이다. 그들은 튼튼한 후방의 본거지도 없다. 그저 물과 풀을 따라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들 자신의 전사만이 자신의 처자식을 보호해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싸울 수 없는 부녀자와 노인, 어린아이까지 모두 전투단위로 편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전사들과 함께 다녔다. 이것이 바로 '우록'이다. 이것은 실제 부득이한 조치였다. 그러므로, 우록제도는 실제로 여신인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나의 우록은 원칙적으로 300명이다. 그러나 초기의 누르하치의 무리는 우록 1개도 채우지 못했다. 십삼부개갑(十三副鎧甲). 즉 열세벌의 갑옷. 2,3십명의 전사. 100여명의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 바로 이 정도의 규모였다.
다만 누르하치가 점차 건주여진을 통일하면서, 특히 동해여진(東海女眞)을 흡수하면서, 인구가 급속히 늘어난다. 300명의 우록으로는 당시의 상황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록보다 높은 등급의 군사화사회제도가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기'제도가 탄생하게 된 원인이다.
최초의 '기'는 누르하치가 동해여진을 흡수한 후에 나타난다. 그는 귀순한 무리를 모아서 "흑기(黑旗)"를 조직한다. 그리고 스스로 기주(旗主)가 된다. 다만, 금방 흑기를 자신의 친동생 슈르하치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자신은 적계인 건주여진을 재편하여, "황기(黃旗)"로 조직한다. 이것이 바로 최초이 양기(兩旗)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날로 커지면서, 이익다툼이 장면이 나타나게 된다. 흑기를 장악한 슈르하치는 점점 세력이 커지게 되고, 권력투쟁의 과정에서 피살된다. 누르하치는 흑기를 셋으로 나눈다. 남기(藍旗), 홍기(紅旗), 백기(白旗). 그리고 각각 큰아들 추잉(褚英), 둘째아들 다이샨(代善), 슈르하치의 아들 아민(阿敏)을 기주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누르하치의 황기와 함께 4기가 형성된다. 깃발의 색깔이 순색(純色)이므로, 나중에 정황기(正黃旗), 정남기(正藍旗), 정홍기(正紅旗), 정백기(正白旗)라 불리게 된다. 이는 만력29년(1601)넌의 일이다. 만력43년(1615)에 이르러,누르하치는 강대한 해서여진(海西女眞)과의 반복된 정복전을 거쳐 계속 세력을 키운다. 그리하여 상황기(鑲黃旗), 상남기(鑲藍旗), 상홍기(鑲紅旗), 상백기(鑲白旗)를 추가 편제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정식으로 팔기가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만주팔기이다. 누르하치가 관할하는 범위내의 사람은 모조리 기적(旗籍)에 편입시킨다. 규정에 따르면, 매300명이 1우록이고, 우록액진(牛錄額眞) 1명을 둔다; 5개의 우록이 1개이 갑리(甲喇)가 되며, 갑라액진(甲喇額眞) 1명을 둔다; 5개의 갑라를 1개의 고산(固山)으로 하며, 고산액진(固山額眞) 1명을 둔다. 이것은 바로 고도로 군사화된 사회형태이다.
2. 홍타이시가 몽고,한군팔기를 창건하다.
2013년 초여름 필자는 처음으로 심양에 갔다. 거기서 청나라 고궁을 본다. 비록 급하게 보았지만, 느낀 점이 적지 않았다. 특히 대정전(大政殿)과 양측의 팔왕전(八王殿)은 필자에게 입관(入關, 산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들어간 것을 가리킴) 전의 청나라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주었다.
대정전은 청나라고궁의 중축선(中軸線) 상에 있지 않다. 청나라고궁의 동원(東院)이다. 이것은 황권독존의 중원 각 왕조에서는 불가사의하다고 여길 일이다. 다만, 전각의 이름은 '대정'이다. 이곳은 확실히 청나라의 입관전 최고의정장소이다. 대정전의 형제는 아주 독특하다. 간단히 말해서, 바로 호화판의 몽고빠오이다. 당연히 이것은 아주 큰 몽고빠오이다. 몽고빠오식의 대정전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때까지, 청나라귀족은 여전히 자신들을 말등에 탄 민족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청나라때 일관하여 팔기제도를 견지해 온 사상적 근원이기도 하다.
청나라고궁의 동원 대정전이 앞에는 양측으로 8개의 편전이 나란히 서 있다. '팔왕전'이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이는 만주팔기 기주의 전각이다. 이 건축군은 청나라초기에 '팔왕의정(八王議政)'제도가 확실히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청태종(홍타이시)때, 다시 몽고팔기와 한군팔기(漢軍八旗)를 건립한다. 제도는 만주팔기와 같았다. 당시 만주팔기에 편제된 우록은 308개이고, 몽골팔기는 76개, 한군팔기는 16개였다. 합게 400개이다. 팔기는 황제, 왕, 패륵이 지휘했고, 팔기제도는 청나라때 시종 유지된다.
이제, 우리는 초기 팔기의 연혁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정황기, 명나라 만력29년, 누르하치는 자신의 적계 건주여진을 편제하여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제1대 기주가 된다. 청나라때 정황기는 항상 황제가 친히 다스렸고, 전투력이 가장 강한 군대였다.
상황기, 명나라 만력43년 정황기에서 분리되었다. 황제가 직접 다스리고, 누르하치가 역시 제1대 기주가 된다. 이후에도 모두 황제의 직속관할이 된다. 정황기와 합쳐서 "양황기(兩黃旗)"라고 불리며, 모두 청나라황제의 친병(親兵)이다. 누르하치 말년에 사랑하는 아들 도도(多鐸), 아지거(阿濟格)으로 하여금 각각 양황기를 지휘하게 한다. 그러나 양황기의 기주는 여전히 누르하치 자신이 맡고 있었다.
정백기, 만력29년 흑기에서 분리되었다. 제1대 기주는 누르하치의 장남 추잉이다. 추잉은 불법을 저질러 피살되고, 기주는 누르하치의 여덟째아들인 홍타이시가 맡게 된다. 홍타이시가 황제에 오르면서, 기주는 도르곤(多爾袞)이 된다. 이때부터 상삼기(上三旗)에 들어간다. 도르곤이 죽은 후, 황제의 직속으로 돌아간다. 순치제 이후 황제가 친히 상삼기를 다스린다.
정홍기, 만력29년 흑기에서 분리되었다. 제1대 기주는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이다.
정남기, 만력29년 흑기에서 분리되었다. 제1대 기주는 원 흑기 기주였던 슈르하치였다 .슈르하치가 피살된 후, 그의 아들 아민이 기주가 된다.
상백기, 만력43년 정백기에서 분리되었다. 기주는 누르하치의 12째아들인 아지거이다.
상홍기, 만력43년 정홍기에서 분리되었다. 기주는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이 겸령했고, 나중에 다이샨의 장남 웨둬(岳托)이 기주로 된다.
상남기, 만력43년 정남기에서 분리되었다. 기주는 누르하치의 다섯째아들 망구얼타이이다.
3. "팔왕의정"
누르하치 시대에 황권은 독존(獨尊)이 아니었다. 누르하치 말년에 "사대패륵(四大貝勒)"의 최고의정제도를 설립한다. 즉 대패륵 황이자 다이샨, 황오자 망구얼타이, 황팔자 홍타이시, 황질 아민을 사대패륵으로 해서 황제와 함께 정무를 논의했다.
누르하치 말년에는 대비 아바하이(阿巴亥)를 총애하여, 아바하이가 낳은 3명의 아들인 아지거, 도르곤, 도도도 총애한다. 아지거에게 상백기를 통할하게 하고, 또한 '아지거, 도도'로 하여금 공동으로 양황기를 지휘하게 했다. 더더욱 가장 총애를 받던 도르곤에게는 나중에 다른 기를 하나 통할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확실히 도르곤에게 대권을 넘겨주려는 뜻이 드러났다. 누르하치가 죽은 후, 전임 대비의 소생인 황팔자 홍타이시는 아바하이와 다이샨의 추문을 이용하여, 다이샨으로 하여금 스스로 대권경쟁에서 물러나게 만들고, 다시 망구얼타이, 아민의 지지를 획득하여, 아바하이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황위를 차지한다. 교환조건은 정백기를 도르곤에게 내주는 것이다. 이때 심지어 대정전에 4개의 의자를 놓아서, 4대패륵이 같이 앉아서 정무를 보는 국면도 나타난다. 홍타이시가 전후로 발호하는 아민, 망구얼타이를 제거하고, 연로한 다이샨이 스스로 물러난 후, 홍타이시가 비로소 황권독존을 행사하게 된다. 그후 팔왕의정은 형식에 그치게 된다.
우리가 오늘 심양고궁의 동원 대정전의 앞에서 볼 수 있는 두 줄의 팔왕전은 일찌기 '팔왕의정'을 실행했었다는 실증이다. 이런 건축형식은 황권독존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심양고궁은 계속하여 이런 건축양식을 보존하고 있었다. 이는 이전의 팔왕의정제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소위 팔왕의정은 실제로 황제가 팔기의 기주와 모여서 하는 최고연석회의이다. 다만 양황기는 황제가 친히 이끌게 되므로, 팔기는 실제로 6명의 기주만 존재한다. 그래서 엄격히 말하자면 육왕의정이 된다. 그러나 누르하치 말년에 아지거, 도도로 하여금 양황기를 대리지휘하게 했으므로, 이때부터 홍타이시 전기까지는 팔왕의정이 확실히 존재하게 된다.
팔왕의정제도는 실제로 만주귀족의 초기 군사공화제도의 잔재이다. 홍타이시때부터 점점 황권독존시대를 건립해가기 시작하면서, 팔왕의정제도는 역사적 사명을 다하게 된다.
4. 상삼기(上三旗)와 하오기(下五旗)
팔기는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다.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양황기는 당연히 다른 기보다 지위가 높았다. 처음부터 소위 "상삼기"와 "하오기"의 구분이 있었다. 상삼기의 지위는 하오기보다 높았다. 상삼기에 당연히 양황기가 포함되는 외에, 어느 기가 들어갈까? 초기에는 정남기였다. 도르곤이 섭정한 후에는 정백기로 바뀐다.
정남기의 제1대기주는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하치였다. 그는 누르하치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함께 천하를 얻었다. 처음에 흑기가 건립되고나서 슈르하치가 기주에 오른다. 흑기의 역사는 황기보다 빠르다. 그래서 정남기는 상삼기에 들어간 것이고 이상할 것도 없다. 다만, 슈르하치와 그의 아들 아민이 2대에 걸친 정남기 기주는 전후로 모두 발호하고 불법을 저질러 제거되고 비명에 죽는다. 아민의 동생인 지르하랑(濟爾哈朗)이 이어서 정남기 기주가 되지만, 지위는 예전만 같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정권을 장악한 정백기 기주 도르곤은 이미 '황부섭정왕'의 존귀한 신분이 된다. 그는 자신의 정백기로 정남기를 대체하여 상삼기에 넣는다. 그것도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르곤이 죽은 후, 순치제는 그의 정치를 청산하면서 일체의 대우를 박탈한다. 거기에는 정백기의 지휘권도 포함되어 있다. 정백기는 황제의 직속으로 귀속된다. 이렇게 하여 상삼기는 모두 왕이 없다. 실질상의 기주는 5명만 남게 된다. 즉 하오기의 다섯 명이다.
팔기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실제로 각군의 병종이 혼합된 집단군이다. 각기에는 모두 군영, 전봉영(前鋒營), 효기영(驍騎營), 건예영(健銳營)과 보군영(步軍營)등 상규 부대가 설치되어 있고, 사금위(司禁衛), 운제(雲梯)와 포진(布陣)등의 직위가 있다. 그 외에 상박영(相撲營), 호창영(虎槍營), 화기영(火器營)과 신기영(神機營)등 특수부대가 있어, 씨름, 활쏘기, 총기다루기 등을 훈련했다.
이런 집단군은 전투능력이 아주 강했다. 이자성의 군대를 격파하고, 삼번을 평정하고, 대만을 수복하고, 제정러시아를 방어하는 각 전투에서 모두 강력힌 힘을 발휘한다. 청나라황실은 팔기를 목숨줄로 여겨싸. 경성을 팔기가 나누어 주둔하며 방어했을 뿐아니라(즉 소위 京營), 전국을 나누어 팔기가 나누어 주둔했다(소위 駐防). 경영은 낭위(朗衛)와 병위(兵衛)로 구성된다. 황실의 시위를 낭위라고 부르고, 반드시 상황, 정황, 정백의 상삼기 출신 기인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금성내의 오문, 동화문, 서화문, 신무문등은 모두 상삼기에서 지켰다.
옹정제는 나아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여러 왕, 패륵의 각 기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킨다. 엄격히 하오기의 기분좌령(旗分佐領, 속칭 외좌령)과 부속좌령(府屬佐領, 소위 내좌령)의 예속관계를 구분했다. 하우기의 주요부분 기분좌령은 실제로 황제가 직접 통제했다. 여러 왕과 패륵은 그저 부속좌령만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하오기의 기주가 직접 통제하는 병력은 상당히 제한되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옹정제가 엄격한 좌령제도를 건립하면서, 청나라의 팔기제도는 최종적으로 형태를 완성하게 된다. 누르하치가 팔기를 건립한 때로부터, 홍타이시가 몽고팔기, 한군팔기를 만들고, 순치제가 상삼기와 하오기의 존비를 명확히 했으며, 옹정제가 하오기 좌령제도를 완비한 것이다. 여기에 백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5. 옹정제의 팔기제도 정비
<청대야사필기대관>에 따르면, 이런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무에 열심이었던 옹정제는 여러번 한족대신들이 스스로 '노재(奴才)'라고 하는 말을 듣고 질책한다. 그리고 엄히 경고하며 다시는 실수하지 말도록 명한다. 이 일을 정사에도 나오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옹정제는 왜 한족대신들이 '노재'라고 칭하는 것을 금지시켰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노재는 황제의 가노(家奴)이다. 즉 자기 사람이다. '신(臣)'은 피고용인이다. 자기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기인이 아니므로 '노재'라고 부를 자격이 없는 것이다.
노재는 '포의가노(包衣家奴)'라고도 부른다. 자료에 따르면, 포의는 만주어로 booi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boo는 만주어로 '집(家)'이라는 뜻이고, i는 허사로 '..의'라는 뜻이다. 합치면 '집의'라는 의미이다. 포의 자체는 형용사인데, 만주와 청나라의 문헌에서 포의는 신분을 대표한다. 만주족 사회에서 포의는 집안사람의 일부분으로 보는 외에, 동시에 노비로 본다. 다만, 만주어에는 노비를 의미하는 또 다른 명사가 있다. 아합(阿哈, aha)". 포의아합중 남자를 "부이니얄마(包衣捏兒麻)"라고 부르고, 여자는 "부이허허(包衣赫赫)"하고 부른다. 청나라의 입관전 만주어 자료서는 포의, 포의인, 포의아합의 여러가지가 있다. 파기제도와 청나라황실기구의 내무부에는 각각 포의우록(booi niru), 포의안반(包衣按班, booi amban)등의 글자가 나온다. 이를 가지고 추론해보면, 만주인들이 포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개괄적으로 쓰는 경우과 특정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의미에서 한편으로 포의는 만주족씨족사회의 가노이고, 다른 한편으로, 포의는 만주통치계급의 기적을 가진 신하이다
이렇게 하여 한족대신은 스스로 '노재'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가 명백해졌다. 결국 인구가 많은 한족이 동화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주황실은 한족의 동화를 막기 위하여 여러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 핵심은 여전히 팔기제도이다. 예를 들어, 기인은 반드시 '국문' 즉 만주어를 써야 한다. 기인은 반드시 말타고 활쏘기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시험을 봐서 상도 내리고 벌도 준다. 목란의 가을사냥은 바로 황족의 활쏘기와 말타기를 매년 시험받는 것이다. 궁의 수녀선발에서 첫번째 조건은 팔기의 여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팔기에 속하지 않은 여자는 입궁할 수 없다. 한족대신이 스스로 노재라고 부를 수 없게 한 것은 그 중의 한 예에 불과하다.
다만, 지금 보면, 이런 조치들은 어느 정도 스스로를 속이는 의미가 있다. 만주족은 모두 한족문화를 배웠고, 강남에서 동북에 유배되었던 선비들은 사서오경을 가지고 추운 지방으로 가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몇 마디 만주어를 한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족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다시 말해서 만한불통혼(滿漢不通婚)의 문제를 보더라도 이 규정은 청나라 말기까지 존재했다. 다만 만주족의 혈통은 이미 순수하지 않게 되었다. 애신각라씨를 포함해서, 황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예허나라씨와 커얼친가족이다. 예허나라씨는 어쨌든 여진족이지만, 커얼친은 몽골친왕의 가문이다. 만주몽골의 혼혈아가 오랫동안 대청제국의 황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한군팔기의 문제도 있다. 한인은 입궁할 수 없는데, 한군팔기는 가능했다. 예를 들어 순치제의 총비 동악씨, 강희제의 생모 퉁가씨는 모두 한군팔기이다. 한군팔기는 한인이 아니던가. 한족여자는 입궁할 수 없지만 기적에 들어가면 가능하다. 모든 문제는 한꺼번에 풀려버린다.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행위가 아니면 무엇인가.
인구가 아주 적은 만주족이 결국 한족에 동화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오늘날 만주족은 족보를 뒤져보아야만 찾을 수 있게 되어 버렸다.
청나라황실이 중시했던 팔기제도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취약했던 것이다.
6. 의의
위의 분석에서 우리는 팔기제도가 청왕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만주인과 한인을 구별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청왕조는 대대로 몽고여자를 황후로 삼았고, 티벳불교를 숭상했으며, 계속하여 한족과는 선을 그으려 했다. 원인은 바로 소수민족 정권의 자신감부족이다.
청왕조는 팔기로 천하를 다스렸다. 경성에 팔기가 지역을 나누어 주둔할 뿐아니라, 전국도 팔기가 지역을 나누어 주둔했다. 관외의 옛근거지도 팔기가 지역을 나누어 주둔했다. 이렇게 하여 팔기는 3층면에서 세력범위를 가지고 엄밀하게 전국의 요지를 통제했다. 게다가 순치, 옹정의 개선을 거쳐 황제가 직접 상삼기를 통제하고, 황궁의 수비도 상삼기가 맡았다. 황제는 직접 하오기의 절대다수의 병력을 지휘했고, 군사를 기초로 하는 황권독존은 이렇게 공고화된다.
한족에 대한 위하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청왕조는 '팔기군은 이길 수 없다'는 신화를 선전한다. 사실상 오랫동안 이런 신화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깊이 내려졌다. 그래서 만일 태평군이 조금만 좋은 일을 했더라면, 바로 이 비눗방울을 터트렸을 것이라고 본다. 태평군은 사람들에게 팔기가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한족이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일단 팔기군이 허약하다는 본질을 사람들이 알아버리면, 청왕조의 붕괴는 시간문제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팔기제도는 청나라의 목숨줄이라고 말한다.
7. 폐단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팔기의 근본은 바로 만주족이 초기에 만든 우록제도이다. 우록제도의 실질은 바로 가족을 이끌고 같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다. 만일 팔기제도에서 민족색채를 빼버린다면, 우리는 볼 수 있다. 팔기제도는 실질적으로 중국역사상 여러번 나타난 바 있는 세병제도(世兵制度)이다. 한 사람이 병사이면 대대로 병사이다. 한 사람이 병사이면 온가족이 공양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갈수록 적어진다. 그리고 팔기제도에 의지하여 공짜밥을 먹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나게 된다. 북송왕조는 일찌기 세병제의 폐해를 확실히 맛보았다. 북송말기에 이르러, 국가에서는 방대하지만 전투력은 없는 군대를 기르고 있었다. 국고는 텅텅 비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청나라의 팔기제도의 결과도 그러했다. 나중에 세상에서 말하는 '팔기자제'는 쓸모없이 새나 기르고 개나 데리고 다니면서 아편을 흡입하고 골동품을 만지작거리는 것만 조금 배우고 쓸모있는 재주는 하나도 없는 자를 말하게 된다. 이것은 자손이 못났다고 말하기 보다는, 제도가 사람을 해쳤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팔기제도는 말기에 이르러 폐해만 있고 이점은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청나라는 굳이 '조종성법'을 지키려고만 하고, 바꾸려 하지 않았다. 팔기제도와 청왕조가 같이 망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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