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개풍문사(凱風文史)
여진인(女眞人)을 얘기하자면 모두 '정충보국'의 악비를 떠올릴 것이다. 그때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고 금왕조의 철기에 항거하여 용맹하게 싸웠다. 금왕조를 건립한 민족은 여진인이다. 그들은 일찌기 중국북방지구를 백년간 통치했고, 먼저 북송을 멸망시키고, 이어서 남송을 압박하여 거의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시의 여진인은 송왕조의 대적인(大敵人)이다. 여진인이 중국북방을 통치한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1234년, 금왕조의 마지막 황제는 몽골과 남송의 협공하에 하남 채주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금왕조는 멸망한다. 그러나 남송도 이로 인하여 이익을 보지 못했고, 수십년 후 남송도 몽골에 멸망당한다.
그후, 중국은 원왕조 통치시기에 들어간다. 그러나 원왕조는 더욱 짧았다. 중국을 통일한지 백년도 되지 않아 멸망한다. 원왕조 말기에 홍건군에 의탁했던 주원장이 최후에 웃는 자가 된다. 전후로 원나라말기의 각로군벌을 없애고 중원지구를 통일한다. 그리고, 동북여진을 통치한다. 특히 명왕조 영락제때 명왕조는 동북여진지구에 대한 통치를 더욱 공고히 한다. 다만, 명왕조는 시종 몽골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심지어 명왕조 중후기에는 빈번하게 몽골군대에게 패배했다. 명나라 말기, 여진인의 후예인 누르하치는 여진 여러 부락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후금(後金)을 건립한다. 그리고 명나라의 요동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다. 1636년,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시는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민족명칭도 만주(滿州)로 바꾼다.1644년 이자성이 명왕조를 멸망시키고, 청나라군대는 오삼계와 연합하여 대순군(大順軍)을 격퇴한다. 그리고 점차 중원남북을 통일한다.
이때부터, 여진인은 다시 중원지구에 대한 통치를 실현한다. 그렇다면, 4백년후에 중원지구에 들어와서 주인이 된 여진인들은 400여년전에 중국북방에 뿌리내렸던 금왕조를 어떻게 대했을까? 그들은 금왕조의 여러 황제들의 행위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들은 금왕조의 흥망성쇠과정에서 또 무엇을 배웠을까?
1. 청나라황제는 금왕조와 자신을 일가(一家)로 여겼다.
여진인은 서로 다른 시기의 사서에 서로 다른 명칭이 있었다. 여진인은 진한(秦漢)이전에는 숙신(肅愼)인이라고 불렸고, 한(漢)나라때에는 읍루(挹婁)라고 불렸으며, 수당(隋唐)때는 말갈(靺鞨)인이라고 불렸으며, 오대(五代)때에 이르러 비로소 여진이라 불렸다. 요나라이후 사료에서 어떤 때는 여직인(女直人)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요흥종(遼興宗)의 이름이 야율종진(耶律宗眞)이어서 황제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여진인을 여직인이라고 썼던 것이다. 금왕조와 청왕조의 공통된 특색은 모두 동북에서 발원하여 중원지구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시의 여진완안씨와 청왕조의 애신각라씨는 모두 여진인을 이끌고 중원으로 진입항 주도역량이다. 그들은 흥기하고, 중원에 들어와 차지하고, 중원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많은 유사한 점이 있다.
확실히 청왕조의 황제도 이 점을 인식했다.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립했는데, 후금은 기실 사서의 기재이고 누르하치가 건립한 것은 "대금국(大金國)"이다. 그는 자신이 여진인의 후예라고 여겼고, 그래서 금왕조를 건립하여 그 왕조를 재건하려 한 것이다. 단지 한문 사서에서는 양송시기의 금왕조와 구분하기 위하여 후금이라고 쓴 것일 뿐이다. 후금을 몽골족은 애신국(愛新國)이라고 불렀는데, 기실 금(金)왕조라는 뜻이다. 애신이 바로 금이라는 뜻이다.
다만 어떤 때는 형식에 구애되어, 청황제가 자신을 여진인의 후예라고 인정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명왕조 숭정제때, 홍타이시는 여러번 북경으로 침입하여 물자와 사람을 약탈해갔다. 그리하여 명왕조 군신들의 원한을 산다. 그리고 한족 백성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명성을 남긴다. 나중에 후금은 명왕조와 의화(議和)를 원했고, 홍타이시는 특별히 서신을 명왕조에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너희 명왕조는 송왕조가 아니고, 우리도 금왕조가 아니다. 현재의 상황을 그때와 비교할 수는 없다." 홍타이시가 말한 것은 분명 그의 내심이 아니다. 어쨌든 의화를 원하고 관계완화를 원했다. 할 수 없이 이런 외교적 수사를 쓸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는 명왕조의 군신들이 이미 '후금'을 '금왕조'와 관련있는 왕조로 이닉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만일 명왕조가 후금과 의화하게 되면, 숭정제는 신하들과 백성들에 의하여 송고종으로 취급당할 것이고, 의화대신들은 진회와 같은 류로 취급당할 것이다.
청왕조는 여진인이 건립한 발해국과 금왕조를 완전히 인정하고 동일시했다. 건륭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 청왕조는 동북에서 발전했다. 산천이 아름답고 옛날 금왕조가 흥기했던 곳과 같은 땅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만주"라는 단어의 발음은 고대 "숙신"의 발음과 비슷하다고. 그는 만주인은 숙신인의 후예라고 보았다. 건륭제는 북경 방산에 있는 금태조의 예릉(睿陵)을 배알한 후에 <알금태조예릉시>를 지었다: "개국금원조자동(開國金源肇自東), 일시반부회운풍(一時攀附會雲風), 비승사벌추료제(丕承肆伐追遼帝), 선임지인류패공(善任知人類沛公), 사책홍유전혁혁(史策鴻猷傳赫奕), 예릉가기민용총(睿陵佳氣悶蘢蔥), 건강전세유친전(建康前歲猶親奠), 황복용흥발해동(況復龍興渤海同)" 이 시에서 건륭제는 청왕조와 금왕조는 모두 동북지구에서 발원해쏙, 금태조를 한고조 유방에 비견하면서 그가 사람을 잘 알고 잘 썼으며, 그리하여 금나라가 강대해 졌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그는 금왕조 황제를 인정하고 동일시 했다.
나중에, 근륭제는 대학사들에게 명하여 만주인의 족보성격의 사서 <만주원류고>를 쓰게 한다. 이 책을 편찬하는 것은 건륭제가 만주인의 역사를 여진인의 역사와 연결시킨 것이다. 이를 통해서 여진인의 역사가 아주 유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동시에 건륭제는 비록 현재 사용하는 만주문자는 누르하치 시대에 나온 것이지만, 만주인의 언어는 옛날 여진어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2. 청나라황제는 금왕조의 능침을 '조릉(祖陵)"으로 보았다.
명왕조 말기, 만주군대가 빈번하게 침입하면서, 명나라의 군신은 아주 분노하고 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방문좌도의 말을 듣고, 북경주변의 금왕조 황제릉을 훼손하면 만주인들에게 액운이 닥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명왕조는 금왕조의 능침을 훼손한다. 그래서 당시 만주군대가 북경주변을 침입했을 때, 특별히 자신의 '조상의 릉'을 찾아가서 상황을 본 것이다. 당시 홍타이시는 북경방산에서 몇몇 한족 선비를 만난다. 선비들은 그들이 이곳에서 대대로 금왕조 황제의 능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홍타이시가 그들을 거두어달라고 말한다. 홍타이시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능침을 지키는데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는 내가 너희를 데리고 갈 수가 없다. 먼저 너희에게 약간의 재물을 하사할 것이니, 이후에 내가 북경을 점령한 후, 너희는 바로 나의 신민이 될 것이다.
청왕조의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서 중원을 차지하는 것)한 후, 청황제는 금왕조의 능침수복을 아주 중시한다. 순치제는 금황릉을 유지보수하도록 명령하고, 어제비문을 세운다. 순치제는 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주인은 동북에서 흥기하고 중원을 점령했다. 명왕조의 황제릉을 전혀 훼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명왕조는 금나라황제릉을 훼손했다. 시롤 그 죄가 악독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금왕조 황제에게 자신이 한 황제릉의 수복상황을 보고한다. 건륭17년, 청황조의 황제는 다시 금황제릉을 수복하고 확장하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금왕조황제의 능침은 규격이 더 커졌다.
능침을 개수한 후 이어서 해야할 일은 어떻게 제사를 지내느냐는 것이었다. 청나라황제는 금왕제릉에 제사지내는 것을 아주 중시한다. 그리고 여러번 가서 제사지냈다. 먼저 금태조와 금세종의 패위를 북경 부성문(阜成門) 밖의 역대제왕묘에 넣는다. 이를 통하여 금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한다. 순치14년 금황제능의 보수가 완료되고, 순치제는 직접 문무백관을 이끌고 가서 제사지낸다. 강희제때, 강희제도 여러번 황자를 보내어 제사지냈고, 그들에게 조상을 잊지 말라고 했다. 건륭18년, 건륭제는 친히 금황제릉으로 가서 제사지낸다. 그리고 당시 금왕조의 황족인 완안씨(完顔氏)를 데리고 간다. 건륭49년, 건륭제는 금왕조의 망국황제 금애종의 패위를 역대제왕묘에 넣는다. 건륭제때 편찬한 <팔기씨족통보>에는 원래 금왕조황족인 완안씨의 서열이 뒤쪽에 있었는데, 건륭제는 특별히 완안씨를 앞쪽에 놓도록 명령하여 애신각라씨의 앞에 두어 서열1위로 만든다. 이 점은 가장 분명하게 건륭제가 진심으로 금왕조 여진인을 자신의 조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며, 금왕조가 그들의 선조(先朝)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3. 청왕조는 금왕조의 쇠락과 멸망에서 교훈을 얻으려 했다.
일찌기 누르하치시기에 누르하치는 금왕조 흥기의 상황을 가지고 부족을 독려했다. 그리고 금태조등을 자신의 모델로 삼는다. 누르하치는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내가 거병하여 명나라에 항거한 것은 명왕조가 우리 여진인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당시 요나라가 여진인을 못살게 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누르하치는 패륵들에게 그와 함께 금태조를 배웟, 단결하고 노력하여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자고 했다.
홍타이시가 후금의 칸이 된 후, 더더욱 금왕조역사를 배우는 것을 중시했고, 사람들에게 한문 사서를 수집하도록 명령하고, 또한 <삼국지>, <요사>, <금사>, <원사>등 사서를 번역하도록 명령했다. 홍타이시 숭덕원년, 이때 홍타이시는 이미 칭제했고, 후금도 대청(大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만주, 몽골, 한인의 중신들을 불러모아, 사람들 앞에서 금세종의 평생사적을 읽어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에게 읽어준 금세종의 사적을 통하여 모두의 금왕조 역사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켰다." 그외에 사서에는 또한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홍타이시가 꿈을 꾸는데, 꿈 속에서 명왕조의 황궁을 보고 만력황제를 만난다. 만력황제도 그를 보고 아주 기뻐하며 친히 홍타이시에게 <금사> 한 권을 주었다. 다만 금방 홍타이시가 잠에서 깬다. 날이 밝은 후, 홍타이시는 즉시 여러 왕과 패륵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꿈을 꾼 일을 얘기한다. 그들은 모두 길조라고 하며, 명왕조가 강산을 홍타이시에게 바칠 것이라고 하였다. 홍타이시는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한다.
사서를 통한 학습으로 청왕조 황제들은 금왕조멸망의 원인을 알게 된다. 그중 일부분은 금왕조가 자신의 민족특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를 숭상하고 싸우기 좋아하는 성격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능력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청황제는 만주인들에게 금왕조를 귀감으로 삼도록 요구한다. 숭덕2년, 홍타이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당시 금희종과 완안량은 여진인의 의관을 버린다. 그리하여 여진인의 일부 습속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예를 들어 우리 만주인도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 건륭제에 이르러 청왕조는 이미 중원에 들어온지 백년이 되었다. 일부 만주인들은 점차 민족특징과 언어를 잃어가고, 건륭제는 우려가 많았다. <가례고>를 읽은 후 그는 그 안에서 요, 금, 원의 민족복식에 대한 기재가 충분히 상세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수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민족특징을 유지하는 것은 대청왕조의 국운과 관계된다고 강조한다. 비록 청왕조 황제가 '한화'의 위험을 의식했지만, 실제로 이 과정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인과 교류하면 부득이 그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말에 이르러 만주인의 한화는 이미 비교적 깊어졌다. 예를 들어 청말민초의 유체지(劉體智)는 <이사록(異辭錄)>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만주대신이 황제에게 보고하는 상황에서, 만일 한어만 아는 서태후를 만나면 아주 편안해 한다. 만일 만주어를 아는 광서제를 만나면 압박을 크게 느낀다. 왜냐하면 많은 만주대신은 이미 만주문을 쓰지 못하고 만주어를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 문자옥(文字獄)의 시대범위를 금왕조까지 소급시킨다.
건륭제가 사서를 읽을 때, 사서에 기록된 여진발음과 실제발음간에 차이가 비교적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자에는 차별대우하는 뜻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하여 교정을 볼 때, 그는 여진어가 만주어와 많은 닮은 점이 있다고 알게 된다. 예를 들어 금왕조의 "맹안모극(猛安謀克)"은 청왕조의 "명안(明安)", "목곤(穆昆)"이라는 뜻이다. 즉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이라는 뜻이다. 동시에 건륭제는 원왕조에서 쓴 <금사>에 불만이 있었다. 주로 3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는 글의 의미가 혼란스럽다. 몽골군대를 천조대병이라고 칭하다가 다른 곳에서는 금나라군대를 천조대병이라고 부른다; 둘째,는 많은 지명이 잘못 적혀 있었다. 그리하여 그 지방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셋째, 사서의 참위론(讖緯論)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왜냐하면 책에서 금왕조가 북송 송휘종과 송흠종을 포로로 잡아서, 금왕조는 몽골대군을 방어할 때 한인장수가 투항하여 결국 금왕조가 멸망했다고 적은 것등이다.
그외에 청왕조는 문자옥의 범위를 송왕조와 금왕조의 역사적 사실에까지 확대한다. 건륭46년, 양회염정 도명아(圖明阿)는 284종의 희극을 샘플로 뽑아서, 그중에 명말청초, 송금관계등 방면에 관련되는 것으로 "내용이 사실과 다른" 희극이 있다고 생각하여, 수정시키도록 건의한다. 건륭제도 이 정돈작업에 동의하였다. 다만 시끄럽게 하지는 말라고 했다. 사회에서 너무 많은 문제나 불만이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청왕조는 <사고전서>를 편찬하면서, 일부 문신들이 송왕조와 금왕조의 사서를 수집하면서 특별히 그 안의 '이(夷)'자를 '이(彛)'자로 바꾸었고, '적(狄)'자를 "적(敵)'자로 바꾸었다. 이를 통하여 건륭제가 이들 글자를 봤을 때 불쾌해하지 않도록 신경쓴 것이다. 아마 문자옥이 이들 문신들에게 너무나 큰 압박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나치게 민감해 했고, 건륭제마저도 이렇게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기게 된다. 건륭제는 이렇게 말했다. 공자, 맹자의 저작에서도 모두 "이(夷)'자를 쓰고 있으니 고칠 필요 없다. 그리고 이들 글자를 사용한 사서가 너무 많으니 근본적으로 다 고칠 수가 없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청왕조황제는 금왕조를 숭상하고 인정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같은 여진인이다. 청황제는 금왕조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느꼈다.
둘째는 금왕조의 흥망성쇠에서 학습하여 만주인들이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려 했고, 만주인들의 진취심을 자극하려 했다.
셋째는 금왕조의 정통을 강조하여 자신의 정통을 확보하려고 했다. 청왕조는 명왕조를 대체했고, 정치적으로 대통일을 이루었다. 다만 여전히 한족은 만주족을 오랑캐로 여겼고, 청왕조가 중원을 차지한 것을 "화하륜상(華夏淪喪)"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청왕조 황제는 금왕조를 숭상함으로써 여진인이 중원을 차지한 것은 옛날부터 있었고, 또한 인정을 받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확실히 이는 청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넷째는 금왕조 역사의 수정과 금나라와 관련된 문학작품을 통제함으로써, '이단'사상을 통제하고 금나라사람과 만주인들이 '추악하게 표현'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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