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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구문제독(九門提督)은 어떤 관직인가?

by 중은우시 2018. 7. 31.

글: 논역사(論歷史)


구문제독의 전칭은 "제독구문보군순포오영통령(提督九門步軍巡捕五營統領)"이고 청왕조의 주경무관(駐京武官)이며, 강희13년(1674년)에 설립되었다. 주로 북경내성의 9개 성문 내외의 수비와 문금(門禁)을 책임진다. 9개성문은 정양문(正陽門), 숭문문(崇文門), 선무문(宣武門), 안정문(安定門), 덕승문(德勝門), 동직문(東直門), 서직문(西直門), 조양문(朝陽門), 부성문(阜成門)이다. 그리고 순야(巡夜), 소방, 보갑 조사편제, 금령, 체포, 사건처리등이 있다. 실제로 청왕조 황실금군(禁軍)의 통령이다. 품계는 처음에 정이품이었다가 가경연간에는 종일품으로 승격된다.


구문제독은 경사의 경위, 치안을 책임지고 그가 통솔하는 부대는 장기적으로 3만가량을 유지했다. 그리고 인원은 정예군이고 장비도 우월했다.


청나라때 경사의 위수, 경비와 치안보위기구를 "제독구문순포오영통령아문"이라고 불렀고, 통칭 "보군통령아문(步軍統領衙門)"이라고 불렀다. 장관은 "보군통령(步軍統領)"이라고 불렀으며, 속칭은 "구문제독"이다. 구문제독은 만주팔기, 몽골팔기, 한군팔기의 보병과 경사 녹영(綠營)의 마보병(馬步兵)을 지휘하며, 각각의 구체적인 임무는 주수(駐守), 성문조사, 도적체포, 야간순찰등이다.


보군통령은 청초에 설립된 후 수차례의 변천을 거친다. 원래는 팔기의 보군영만 관할했으나, 강희13년(1674)부터 제독경성구문사무(원래는 병부에서 관리했음)도 겸하기 시작한다. 강희30년(1691)에는 다시 순포삼영사무를 겸한다. 그리하여 관직명칭의 전칭은 "제독구문보군순포삼영통령(提督九門步軍巡捕三營統領)"이 된다


옹정7년(1729) 관서의 명칭이 "보군통령아문"으로 된다. 12년(1734), 선무문내 경기도에 정식으로 아서(衙署)를 건립한다. 구년후에는 북성 모아후통으로 옮긴다. 그리하여 "북위문(北衛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마찬가지로 사건을 책임지는 형부는 남성에 있어서 '남위문'이라고 불렀다).


건륭46년(1781), 순포에 좌, 우 두 영이 증설되어, 중, 남, 북, 좌, 우의 오영이 된다. 그래서 아문의 주관을 "제독구문보군순포오영통령"으로 바뀌게 되고, 가경4년(1799) 관직의 등급도 종일품으로 오른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공격해 들어와서 안민공소(安民公所)를 설치하여 치안을 유지한다. 팔국연합군이 북경에 진입하기 전의 마지막 보군통령은 서태후의 심복인 영록(榮祿)이다. 1901년, 청나라조정은 팔국연합군의 방식을 본받아 "선후협순영(善後協巡營)"을 설치한다. 나중에 이름을 "순경총행(巡警總行)"으로 바꾸어 원래의 보군통령아문의 순포영을 대체한다. 1902년, 숙친왕 선기(善耆)는 보군통령을 맡고, 군경분리의 개혁을 지지한다. 1905년 청나라조정은 정식으로 순경부(巡警部)를 창설하고, 현대경찰학교를 개설하여 경찰인재를 배양한다. 이때부터 군경편제는 분리되고, 현대경찰제도가 초보적으로 창립된다.


1911년, 신해혁명후, 북양정부는 정권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보군통령아문'을 없애지 않았을 뿐아니라 유지한다. 단지 이름을 "경사보군통령아문"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좌우익총병을 관할했다. 그리고 이를 도구로 하여 경성의 사회치안에 손을 뻗고, 경찰의 사건처리를 견제하여, 민국초기에 아주 특수한 '아문'이 된다. 1924년, 풍옥상이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진입한다. 마지막황제 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난다. 같은 해 10월 5일, 이 특수한 아문은 폐지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