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소흥사야(紹興師爺)" 부침록

중은우시 2016. 2. 18. 00:34

이홍장글: 기련해(紀連海)


"소흥사야"라는 단어의 '소흥'은 청나라때의 소흥부(紹興府)를 가리킨다. 청나라때의 소흥부는 산음, 회계, 소산, 제기, 여요, 상우, 승현, 신창의 8개현을 포함하고, 항주만의 남안에 위치한다. 전체지구는 회계산을 중심으로, 포양강과 조아강을 양날개로 하여, 산수가 수려하고 고월국의 중심지였다. 동진부터, 이곳은 전국의 저명한 문화중심중 하나가 된다. 소위 "사야"는 고대 관부아문의 막료를 부르는 속칭이다. 고대에 장수가 출정하면, 고정된 치소를 두지 않고, 막(幕, 장막)을 부(府, 관청)로 삼았다. 그래서 막부(幕府)라고 부른다. 막부에서 일하는 사람들 오늘날의 비서, 참모에 유사한 문관 보좌직원을 막료(幕僚) 혹은 막우(幕友)라 불렀다. 그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고, 법률, 재무회계, 문서작성등의 분야에 전문지식과 기술을 지닌 문인들이었다. 각급 지방관은 특정분야의 개인고문을 채용하여, 관직은 갖지 않지만 정무에 참여하도록 했다. 관리는 막료를 "서빈(西賓)", "서석(西席)", "노부자(老夫子)", "선생(先生)"으로 불렀고, 막료는 관리를 "동옹(東翁)", "동가(東家)"라고 불렀다. 평상시에 막료와 관리들은 서로 대등한 예로서 대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사야"라는 역할이 어느 시기에 나타났는가? 정말 오사도(鄔思道)부터 시작하는가?


기실, "사야"라는 역할은 옛날부터 있었고, 역사적으로 그것은 폄하하는 말이 아니었다. 전국시대에 신릉군, 맹상군, 평원군, 춘신군의 "4대공자"는 문하에 선비들을 기르기 시작한다. 중국역대 정치무대에 등장한 인물의 뒤에는 항상 문객방한(門客幇閑)이 있ㅇㅆ다. 이들은 계책을 내놓고, 붓을 대신 들어 글을 써주거나, 칼을 대신 들어 싸워주었다. 혹은 청담을 논하고, 혹은 윗사람을 접대하며, 각각 자신의 일을 했고, 자신이 주공을 모셨다. 그렇게 정치에서 중요한 조연이 된다. 단지 그들은 전문적인 직업군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명나라말기, 특히 청나라에 이르러,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막료가 정치를 도우는 것이 법률적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되기 시작한다. 문객막료는 각종 정무에 불가결한 인물이 된 것이다. 각급 관부 아문에는 모두 막료가 정무에 참여했다. 특히, 부, 현의 양급 아문에는 최소한 형명(刑名), 전곡(錢穀), 서곡(書穀), 괘호(掛號)등 4,5명의 막료를 두었다. 그래서, "무막불성아(無幕不成衙)" 즉 막료가 없으면 관아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왜 "소흥"사람이 "사야"의 역할을 많이 맡게 되었는가?


소흥은 항주만의 남안에 있고, 산천의 형세가 뛰어나고, 경제가 발달하였으며, 자연환경이 우월했고, 역사문화가 심후했다. 동진때부터, 여기는 전국의 유명한 문화중심의 하나였고, 문인학사들이 많이 여기에 모여 있었다.

중국봉건사회는 "공부를 잘하면 관료가 된다(學而優則仕)"는 원칙을 신봉했고, 문인의 재능은 제왕에게만 바쳐졌다. 소흥사람들은 자연히 과거시험을 통하여 공명을 얻어 관직에 나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한 세대 또 한 세대 소흥부에서는 진사 744명이 나온다(그중 산음, 회계 두 현이 625명). 당연히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나가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어쨌든 소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관직에 나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도태되고 만다. 여기에 청나라 옹정연간에는 '문자옥(文字獄)'으로 인하여, 한때 연속 7년동안 절강향시, 회시를 중단시킨 바 있다. 그리하여 절강 특히 소흥의 문인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그래서 과거에서 연이어 낙방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은 희망이 없다고 본 많은 소흥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과거를 포기하고, 방향을 바꾸어 장사를 배워, 부를 축적하는 길을 찾게 된다. 혹은 막료가 되는 방법을 배워서 사야가 되는 길을 택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 정치를 하는 길을 택한다. 장사를 하거나 사야가 되는 것은 소흥인들이 선택한 길 중에서 체력노동을 요하는 농업공업 이외에 가장 '인기있던' 분야였다.

미래의 사야들은 현재의 변호사 혹은 전문인재들처럼 대중매체를 통하여 자신을 선전하고 프로모션할 수 없었다. 그들은 주로 동족, 동향, 사장, 친우등의 특수관계를 통하여 관리에게 추천받고 막료의 자리를 차지한다.

다행히 소흥부 출신의 진사는 아주 많았고, 경관, 외관중에도 소흥인이 적지 않았다. 이들 관리들은 혹은 자신이 스스로 막료를 할만한 고향사람이나 친구를 데리고 부임하기도 하고, 혹은 동료에게 추천하기도 한다. 그리고 막료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다시 동향의 사람들을 끌어주어, 유사한 처지와 재능이 있는 친구나 동창을 막료가 될 수있도록 소개시켜 주었다.

이런 특별한 지역연고로 인하여 소흥일대의 막료는 점차 전국으로 퍼져 나간다. 여기에 소흥사람들은 처세술이 뛰어나고 일처리가 신중하며 계책을 잘 내고 글을 잘 썼다. 이런 것들은 지낭이 되는데 선천적인 자질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막료로 잘 지냈고, 또 일처리를 잘 했다. 그들은 서로 도와주면서 아래 위에서 이끌어주어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막료학의 전수는 일반적으로 친구나 아는 사람들 중에서 진행한다. 그러다보니 전국각지의 크고 작은 아문에는 '소흥사야'라는 방대한 직업집단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무소불성아(無紹不成衙)" 소흥사야가 없으면 관청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실제로, 청나라때 각 성의 문인들은 모두 사야가 될 재능과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청나라때의 산동, 사천, 강서, 강소등의 성에서도 적지 않은 '유명막료'가 나타났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장강중하류 및 전당강하류지구는 전국각 아문사야의 가장 중요한 공급지였다. 그 중에서도 확실히 소흥사람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점차 '사야'와 '소흥인'은 연결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들 소위 '소흥사야'는 정말 그렇게 재주가 있었는가?


그것은 당연하다. 소흥사야는 글를 잘 다루고, 속이 깊었다. 그래서 번운복우(飜雲覆雨)할 수 있었고, 글자 몇 개로 건곤을 뒤집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도필리(刀筆吏)"라고도 불리웠다

1689년, 강희제는 소흥의 대우릉(大禹陵)으로 가서 우임금에 제사를 지낸다. 문무관리는 우묘의 계단에 정렬하여 삼궤구고의 대례를 행한다. 강희제가 가장 앞에 서고, 관리들은 관직의 고하에 따라 앞뒤로 줄을 섰다. 예를 행하는 가운데, 절강번대가 부주의하여 조관(朝冠)을 떨어뜨렸는데, 앞 줄의 장군이 이를 곁눈질로 보았다. 장군은 번대와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아서, 나중에 조정에 이를 참주(參奏)한다.

청나라의 율법에 따르면, 조관을 땅에 떨어뜨린다는 것은 황제에 대한 대불경으로 죄책이 엄중하다. 이부는 명을 내려 절강순무에게 이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다. 절강순무는 이 성내의 재정대권을 가진 동료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절강주재 팔기최고장관인 장군에게 밉보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여러 소흥사야를 불러모아서 해결방안을 논의했다.

한 사야가 순무의 말을 들은 후, 잠시 생각하더니, 8글자의 절묘한 문구를 내놓는다. "신열위재전(臣列位在前), 예무후고(禮無後顧)" 신은 앞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법에 뒤를 돌아보는 법은 없습니다. 이 문장으로 장군에게 특별히 죄를 짓지 않으면서, 자신의 책임은 피했다. 그리고 말에 숨은 뜻은 바로 만일 장군이 뒤줄의 번대가 조관을 떨어뜨리는 것을 봤다면, 그것은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이니 역시대불경에속하는 것이다. 조정은 이 보고를 받은 후 그냥 흐지부지하게 끝낸다.

나중에 이 소흥사야는 글자 1자에 천냥으로 계산한 높은 보수를 받는다(실제 9자이지만, 첫번째 글자인 신은 자칭이므로 보수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오사도가 '소흥사야'의 비조라고 부르는 것일까?


오사도의 평생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우리는 전문경(田文鏡)부터 얘기해보자.

전문경은 한군기인(漢軍旗人)으로 정규만주족은 아니다. 강희22년 감생으로 현승의 관직을 받는다. 30여년간 승진하여 비로소 시독학사가 된다. 옹정원년 명을 받아 화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낼 때 산서순무가 재해상황을 거짓보고한 것을 밝히고, 이때부터 옹정제의 신임을 받는다. 그는 산서포정사 서리가 되고, 2년도 지나지 않아 하남순무로 다시 승진한다.


전문경과 오사도는 어떤 관계인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소흥사람인 오사도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막료로 떠돌아다녔고, 하남 개봉에 살고 있었다. 당시의 순무인 전문경은 그의 명성을 듣고 막료로 모신다.


오사도가 어떻게 전문경의 신임을 얻게 되었을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사도가 전문경을 대신하여 난감한 사건을 하나 처리했다. 사건은 북경의 형부로 보고되어 순조롭게 통과된다. 예전처럼 기각당하지 않고.

그리고 하루는 오사도가 전문경에게 말한다: "당신은 폼나게 독무를 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용렬한 독무로 남고 싶습니까?" 전문경은 당연히 폼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오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당신이 황제에게 올릴 상소문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만일 이 상소문이 올라가면 당신은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상소문의 글은 한자도 봐서는 안됩니다. 나를 얼마나 신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문경은 오사도와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므로 오사도가 담량과 모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원스럽게 동의한다. 원래 이 상소문의 내용은 융과다를 탄핵하는 것이었다. 융과다는 옹정제의 외숙이고, 관직이 대학사에 이르렀다. 용과다는 옹정제를 황제로 옹립한 공을 믿고 위법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옹정제는 이때 이미 융과다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제거하고 싶었지만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조정의 문무대신들은 모두 융과다가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사도는 옹정제의 심리를 읽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한 것이다. 옹정제는 상소문을 보고는 바로 그가 원하던 것이므로 즉시 상소문을 육부로 보내어 논의하게 한다. 그리고 융과다의 죄를 묻는다. 이때부터 옹정제의 전문경에 대한 총애는 더욱 커진다. 오사도의 명성도 널리 퍼졌다.

오사도는 자신의 풍부한 정치경험과 관료사회경험으로 막주인 전문경의 총애를 받았을 뿐아니라, 옹정제로부터도 중시된다. 이렇게 하여 소흥사야의 공인된 조사야가 된다. 옹정제는 자주 전문경이 올린 상소문에 주비(朱批)를 달면서, "짐은 잘 지낸다. 오선생도 잘 지내는가?"라고 적었다. 이렇게 하여 오사도를 대표로 하는 소흥사야의 몸값은 백배로 뛴다. 각지의 독무들이 모두 소흥사야를 주목한다.


오사도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이 오사도는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 높은 곳은 추위를 견디기 힘들다는 이치를 잘 알아서 적절한 때 용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유염초(遊染草)>, <무예선화록(撫豫宣化錄)>이라는 두 권의 책을 저술한다. 그리고 전문경의 명의로 간행한다. 여기에는 모두 유막(遊幕)의 도를 논한다. 이 두 책은 나중에 사야들이 보배로 삼았다. 소흥사야의 명성은 이렇게 하여 더욱 떨쳐지게 된다. 사야중에서는 소흥사야가 제일 귀하다. 이는 각지 관청에서 공인된 사실이 된다.


오사도는 전문경을 떠났다. 오사도가 없는 전문경은 어떠했을까?


전문경은 지나치게 가혹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예를 들어, 황무지개간을 추진하고, 탄정입무(攤丁入畝), 세금추징등 황제의 뜻에 영합하는 일을 계속 하면서 부하와 백성들에게는 각박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그외에 옹정제는 상서(祥瑞)를 좋아했는데, 전문경을 황제의 기호에영합했다. <영헌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하남총독 전문경이 서곡(瑞穀)을 바쳤다. 일경십오수(一莖十五穗)" 즉 벼 한 줄기에 이삭 15개가 달린 것을 바친 것이다. 옹정제 후기에 전문경은 여러번 하남의 재해상황을 허위보고하다가 옹정제에게 발각된다. 옹정제는 이렇게 말한다: "전문경은 최근 들어 나이가 들고 병이 많아, 정신이 맑지 못해서 부하들에게 속아서...." 이때 전문경은 물론 병이 들지 않았다. 옹정제는 실제로 그에게 물러나기를 권한 것이다. 얼마 후 전문경은 스스로 사직하겠다고 상소를 올린다. 그리고 곧 죽는다. 시호는 단숙(端肅)이다.


"소흥사야"는 그 후에 어떻게 발전했는가?


청나라말기, 소흥사야중에는 인재가 많이 배출된다. 관리들이 앞장사서 그들을 청했다. 가장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다음과 같다. 혁명선열 추근(秋瑾)의 증조부인 추동예(秋桐豫)로 그는 동삼성총독 조이손(趙爾巽)의 막료가 되고, 장사걸(章士傑)은 양강총독 증국전(曾國荃)의 막료가 되며, 마가정(馬家鼎)은 호광총독 장지동(張之洞)의 막료가 되고, 정훈(程壎)은 직예총독 이홍장(李鴻章)의 막료가 된다.특별히 일대명막(一代名幕)으로 이름을 날린 누춘번(婁春藩)은 전후로 이홍장, 원세개(袁世凱), 단방(端方)등 6명의 직예총독에게 연이어 초빙받을 정도로 권위가 높았다.

이홍장이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으로 있을 때, 부하를 고르는데 아주 까다로웠는데, 누춘번에 대하여는 아주 존중했다. 상소문, 형전, 염무등을 모두 누춘번에게 처리하게 맡겼다. 그때 영정하는 자주 홍수가 났는데, 누춘번이 여러번 현지시찰을 한 후 범람의 원인을 찾아내어 이홍장에게 치수계획을 제안하여, 수재가 크게 줄었다. 그가 총독부의 문안을 주재할 때, 직예성에는 억울한 사건이 없었다고 한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관아의 동료들은 모두 그 소식을 듣고 도망친다. 그러나 누춘번은 혼자 남고 도망치지 않으며 사건이 평정될 때까지 국면을 지킨다. 경자화의후, 이홍장이 그에게 북경중앙정부의 관직을 주청하려 하자, 그는 완곡하게 사양한다.


"소흥사야"는 어떻게 사라졌는가?


청나라말기, 서태후를 우두머리로 하는 청나라 정부는 "변법"을 내세운다. 그리고 일부 '개혁'조치를 내놓는다. 정부는 관료체제를 정돈하여 일부 중첩되거나 허설된 기구를 삭감한다. 각성도 상응하게 적지 않은 아문의 인원을 줄인다. 각급관리의 삭감은 대량의 소흥사야들로 하여금 관아들 떠나 다른 살 길을 찾게 만든다. 그들의 활동과 영향력도 그렇게 약화된다.

동시에, 청나라정부는 팔고문을 폐지하고, 과거를 중단하며, 학교를 만들고, 유학을 장려한다. 학당을 만들고 해외유각을 떠나는 것이 유행한다. 1911년, 전국각지에 새로 만든 신식항당은 5만여개에 달하고, 학생은 100만에 이른다. 이들은 새로운 지식인층을 이룬다. 그들은 외국의 학교 혹은 신식학당에서 배운 지식으로 무장한다. 점차 정치무대에서도 우세를 장악한다. 이렇게 하여 소흥사야의 청나라정계의 지위와 역할은 크게 약화된다.

관료체제의 개혁과 신식문화의 제창분위기 속에, 청나라정부는 각지의 사법독립을 주장하고 북경에 대리원을 설립하고, 각성에 고등청을 설립하고, 각부,현에는 지방청을 설립한다. 송사는 법원의 전문인원이 담당한다. 동시에 귀국유학생과 각지 법정학당, 법정속성반졸업생들을 각급 아문에서 채용한다. 이들 신식 법률수단으로 소흥사야의 전통적인 재판방식을 대체한다. 그리고 신식의 사법전문인재들이 형명사야를 대체한다. 이렇게 하여 근본적으로 소흥사야가 사법심판을 독점하는 기반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정법학당, 속성반은 법률전문지식을 전수하는 외에, 경제, 재정, 회계, 통계등 학과도 같이 배웠다. 졸업생들은 배우는 학문의 범위가 행정기구의 각 층면에 모두 비쳤다. 그리하여 소흥사야의 스승이 제자에게 물려주던 전곡비결은 점차 토태되게 된다. 소흥사야의 형명, 전곡 두 부분의 우세가 점차 사라지면서 집단은 와해된다. 그리하여 역할과 영향력이 점차 쇠락해지고 결국은 몰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