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영정문(永定門) 변천사

by 중은우시 2013. 11. 12.

글: 중국신문망

 

 

 

영정문은 북경성 중축선(中軸線)의 남쪽 기점이다. 좌안문(左安門)과 우안문(右安門)의 중간에 있고, 남쪽은 고요하게 흐르는 호성하(護城河)와 자동차가 줄을 이어 달리는 남이환로(南二環路)가 있다.

 

북경성에는 원래 사도성(四道城)이 있었다. 안에서 밖으로 순서대로 얘기하자면, 제1도 궁성(宮城), 즉 자금성(紫金城)이라고도 부른다; 제2도 황성(皇城); 제3도 내성(內城), 제4도 외성(外城). 그중 외성에는 영정문, 좌안문, 우안문, 광거문(廣渠門), 광안문(廣安門), 동편문(東便門), 서편문(西便門)의 7개 성문이 있었다. 외성은 명나라가 북경을 수도로 정한 140여년후에 북경성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내성의 남쪽에 추가로 건설한 것이다. 당시의 재력이 부족하여, 외성은 내성의 4면을 다 둘러싸지는 못하고, 그저 내성 숭문문(崇文門), 전문(前門), 선무문(宣武門)의 3개성문의 남쪽에만 성벽을 쌓았다. 전체 성이 철(凸)자형을 띄게 된다. 외성은 이로 인하여 "남성(南城)"이라고 부른다. 외성과 내성은 크게 다르다. 이곳은 주로 각종 상점과 오락장소가 모여있다. 저명한 따사란(大柵欄) 상업거리와 "경락원(慶樂園), 삼경원(三慶園), 광덕루(廣德樓), 광화원(廣和園), 동락원(同樂園)" 경성역사상 오대희루(五大戱樓)가 바로 외성에 위치하고 있다.

 

청나라 광서31년(1905년) 북경성 최초의 영화관 대관루영희원(大觀樓影戱院)도 외성에 있다. 외성에는 회관(會館), 명인들의 저택이 아주 많이 있었다. <북경회관자료집성>에서는 명나라 영락13년(1415년)부터 1949년 12월까지 기간의 회관 647곳이 수록되어 있다. 남성에는 또 하나 유명한 곳이 있다. "천교(天橋))" <북경시선무구지명지>에 따르면, 원나라이후, 성남(城南) 일대에 하도(河道)가 종횡으로 흐르는데, 남북통행을 편라하게 하기 위하여, 이곳에 석교를 하나 만든다. 명나라 영락연간에 천단(天壇)을 건설한 후, 천자가 천단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야 할 때, 이 다리를 지나갔으므로, 이 다리의 이름을 천교라고 부른다. 천교의 위치는 지금의 전문대가, 천교남대가, 천단로와 영안로가 만나는 곳이다. 초기의 천교는 다리가 아주 높았다. 청나라 광서32년(1906년) 정양문에서 영정문까지의 대로를 만들면서, 이 길에 원래 깔려있던 석조(石條)를 모조리 철거하고, 부순 돌을 깐 도로로 바꾼다. 천교도 키가 작은 석교로 바뀐다. 1929년, 궤도전차를 운형하는데 불편하여, 천교를 다시 도로와 같은 높이로 편평하게 바꾼다. 양측에는 여전히 돌난간을 두었다. 1934년 정양문에서 영정문까지의 도로를 확장하면서 천교의 양측에 있던 돌난간을 모조리 철거한다. 천교의 자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천교는 이제는 하나의 지명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영정문에서 경성으로 출입하는 인파는 수도없이 많았는데,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 이곳은 자연스럽게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민간예술공연의 중심지가 된다.

 

북경성은 영정문을 표지로 하여, 영정문 이내는 남성(南城)이라 부르고, 영정문을 나서면 성남(城南)이라 부른다. 청날 광서연간 경한철로가 개통된 후, 영정문밖의 마가보에 기차역을 설치하고 왕래하는 여객은 영정문으로 북경을 드나들었다. 영정문 이남의 성남지구는 1949년이전에 아주 황량했다. 소량의 야채밭을 제외하면, 도처에 묘소가 있었다. 관상(關廂)은 단지 좁은 도로였다. 거주자가 아주 적었다. 1952년이후 분묘를 이전하고 갱을 매웠고 양측으로 길을 확장한다. 공장, 병원, 상점, 학교와 주민주택을 건설했다. 지금 이 큰길은 이미 수도남부의 도시와 농촌을 잇는 주요간선도로의 하나가 외었다. 그리고 영정문외 상업과 서비스네트워크가 밀집된 대가(大街)가 되었다. 북경 중축선을 따라 남쪽으로 연장되어 이미 도로가 넓혀졌고, 고층건물이 수두룩하게 들어선 새로운 번화가가 되었다.

 

영정문은 명청시대 남부로 경성을 드나드는 주요도로였다. 당시 중축선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외성의 중앙성문이었다. 외성의 7개 성문중 가장 큰 성문이기도 했다. <명세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가정32년(1553년) 십월 신축(이십오일) 경사 외성의 신축을 완성하다. 황상은 정양문의 외문을 영정이라 칭하도록 명했다. 숭문의 외문은 좌안이라 하고, 선무의 외문은 우안이라 하며, 대통교문은 광거라 하고, 장의가문은 광녕이라 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정문의 건설은 지금으로부터 460년전의 일이라는 것이다. 기실, 당시에는 영정문이라는 성문루 하나만을 건설했다. 옹성은 가정43년(1564년) 추가로 건설했다. 전루(箭樓)는 청나라 건륭15년(1750년)에 증축했다. 그리고 옹성도 중수한다. 이제 영정문 성루는 197년동안 명,청 양대를 거쳐 완성된다. 영정문은 비록 외성 성문이지만, 완공후의 영정문 성루의 형제는 내성의 형제에 따라 건축되었고, 전형적인 내성 중첨헐산삼적수루각식 건물이다.

 

영청문성루는 1957년에 철거된다. 현재의 영정문성루는 2004년에 중건된 것이다. 중건후의 영정문성루이 문동(門洞)위에 넣은 석편(石匾)에는 해서로 "영정문"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창경웅건(蒼勁雄健)하다. 명나라의 원래 석편의 조각을 본뜬 것이다. 이 석편에도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영정문성루를 중건하기 1년전인 2003년, 사람들은 선농단(先農壇) 북경고대건축박물관의 입구에 있는 고백수(古柏樹)의 아리에서 완전하게 보존된 영정문 석편을 발견한다. 고증에 따르면 이 석편은 바로 명나라 가정32년(1553년) 영정문을 처음 완공했을 때의 석편이다. 현재의 사람들이 보는 중건한 영정문의 동문의 위에 있는 석편의 '영정문' 세글자는 ㅏ로 이 석편을 본떠서 조각한 것이다. 영정문의 중건에 사용한 벽돌은 원래 가정연간에 제조한 영정문의 옛 벽돌이다. 이들 가정연간에 제조한 벽돌은 영정문이 철거된 반세기후, 다시 새로 깍아서 새로 짓는 영정문 성루에 썼다. 중건때 영정문성루를 둘러싸고, 작지만 정교한 공원을 하나 만든다. 바로 영정문공원이다. 공원의 수목은 질서있게 심어졌고, 배열이 줄을 맞추었따. 성루광장은 백색난간이 둘러싸고, 미끄럽기가 거울과 같다. 공원은 양측의 천단과 선농단과 마주한다. 북쪽의 전문대가와 정양문성루와는 서로 마주본다. 중건후의 영정문은 이미 명실상부한 북경의 '도시랜드마크건축'이다. 북경성의 역사변천의 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