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국의 오천년 역사에서 일찌기 도교국, 불교국, 그리고 태감국이 출현한 바 있다.
도교국
동한 말기 천하가 대란에 빠진다. 장로(張魯)는 한중(漢中)에 도교국을 건립한다. 장도릉(張道陵)이 창건한 도교의 일파는 정일맹위지도(正一盟威之道), 약칭하여 '정일도(正一道)'라고 부른다. 그의 도를 신봉하는 자는 오두미(五斗米)를 내야 해서 '오두미교'라고도 불렀다. 장도릉이 60세때, 제자를 대리고 익주(益州)로 가서 포교한다.
장도릉이 죽은 후에는 아들 장형(張衡)이 부친의 업을 이어받아서 계속 포교한다. 장형이 죽었을 때는 동한말기의 사회동란기였다. 장형의 아들 장로는 도교천사(道敎天師)의 신분을 익주자사(益州刺史) 유언(劉焉)으로 부터 인정받는다. 장로는 나중에 한중에 할거하여, 오두미교를 전파하며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칭한다. 그에게 와서 도를 배우는 자는 처음에 '귀졸(鬼卒)'이라고 불리다가, 도를 받아 믿게 되면 '제주(祭酒)'라 불리고 무리를 이끌었다; 더 많은 무리를 이끌게 되면, '치두대제주(治頭大祭酒)'라 불린다. 장로는 한중에서 20여년간 지내며, 동한말기의 실력있는 지방할거세력중 하나가 된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장로의 정권은 조조의 대군이 몰려올 때, 누군가 장로에게 보물이 보관되어 있는 창고를 불태워버리자는 건의를 받는다. 장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래 국가에 뜻을 둔 사람이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 떠나는 것은 예봉을 피하기 위함이지 악의는 없다. 보물이 든 창고는 국가의 것이다. 그리고 보물창고를 봉해주어 많은 물자를 보존시킨다. 이는 조조를 감동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장로와 그의 다섯 아들을 후(侯)로 봉하고, 장로와는 자식을 혼인시켜 사돈이 된다.
장로의 가족은 내지로 이주해서, 도교가 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된다.
불교국
송나라때, 대리국(大理國)이 있는데, 온 나라가 불교를 숭상했다. 강역은 현재의 운남, 귀주, 사천서남부를 포함한다. 그리고 버마, 라오스, 월납북부의 일부지구까지 통치했다.
937년, 오대십국시대에 서남지구의 통해절도사(通海節度使)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니 국호를 '대리'라 한다. 수도는 양저미성(羊苴咩城, 지금의 운남성 대리시)로 한다. 960년 북송이 건립되자, 대리국이 일방에 할거하는 것을 보고는 송태조 조광윤이 일찌기 옥부(玉斧)로 대도하(大渡河)를 경계로 하여, "이 바깥은 내 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대리국은 이로 인하여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단씨(段氏)의 대리국은 불교를 치국지도로 삼는다. 심지어 그들은 관료시험에도 화상(和尙)에게만 참가자격을 주었다. 이들을 석유(釋儒)라 부른다. 관리는 대부분 석유중에서 임명된다.
1108년, 일찌기 김용무협소설에도 등장하는 저명한 인물인 단예(段譽)가 부친 단정순(段正淳)을 이어받아 대리국의 제16대국왕에 오른다. 그는 39년간 재위한다. 단예는 특히 송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대리마, 사향, 우황, 세전(細毡)등 특산물을 공물로 바친다. 그리고 환희악인(幻戱樂人, 마술사)를 파견하여 송나라에서 공연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송휘종으로부터 높은 대우를 받는다. 송휘종은 그를 금자광록대부, 운남절도사, 대리국왕에 봉한다.
1253년, 대리국은 몽골에 멸망한다. 원 대리국의 국왕인 단흥지(段興智)는 대리세습총관으로 임명된다.
태감국
오대십국시대에, 남한(南漢)이라는 할거국이 있었다. 위치는 현재의 광동, 광서 두 성과 월남북부에 걸쳐 있다. 면적은 약 40여만 평방킬로미터인데, 태감국이었다.
당나라말기, 유겸(劉謙)은 봉주자사(封州刺史, 봉주는 현재의 광동성 봉개)가 되어 만명이상의 병력과 전함 백여척을 보유한다. 유씨가족은 세습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917년 번옹(番禺, 지금의 광주)에서 황제를 칭한다. 국호는 "대월(大越)"이라 한다. 958년, 남한의 후주 유창(劉鋹)이 즉위한다. 당시 나이 17살이다. 그는 유약하고 무능했으며 나라를 다스릴 줄 몰랐다. 정무를 모조리 환관인 공징추(龔澄樞), 진연수(陳延壽) 및 여시중(女侍中) 노경선(盧瓊仙) 등에게 맡긴다. 궁녀도 정부관리로 임명되었다.
유창은 신하들이 모두 가정을 가지고 있어서 자손을 생각하느라 충성을 다하지 앟는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오로지 환관만 신임했다. 그는 조서를 반포했는데, "여러 신하들 중에서 재능있거나 글을 읽은 선비중에서 진사, 장원을 하면 모조리 먼저 거세를 하고 그 후에 관직에 임명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한은 거의 태감국이 되어 버린다. 위로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현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감이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나라안에 2만명의 환관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거세를 하지 않은 사람은 문외인(門外人), 거세를 한 사람은 문내인(門內人)이라 불렀다.
971년, 송나라에 의하여 멸망한다. 4명이 황제 54년간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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