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두문자(杜文子)
경태8년 정월, 명영종은 '탈문지변(奪門之變)'을 통하여 복위에 성공한다. 비록 다시 권력의 꼭대기로 되돌아왔지만, 이때의 명영종은 내심이 취약하고 공허했다. 다시 무슨 변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지지자들(탈문공신들)과 상상 속의 '위협이 되는 자'들에게 타격을 가한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비명에 죽어간다. 황제가 원한을 모두 가슴에 담아두고 복수한다면,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천순(天順)이 열리는 그 시기에 전체 대명에는 원혼들이 떠돌았다.
특별히 경태제의 죽음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명나라의 공식적인 설명은 병사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명영종이 죽였다고 말한다. 어떤 문신의 필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경태제의 죽음은 환관 장안(蔣安)이 비단으로 목을 졸라 죽인 것이다."(명 <국조전고>, <병일침기>, 황운미 <명사고증>). 복벽하자마자, 명영종은 여러 성지를 반포한다. 하나는 바로 병부상서 우겸(于謙)과 이부상서 왕문(王文)등을 체포하여, 금의위 뇌옥에 가두라는 것이다. 명영종은 왜 우겸을 미워했을까? 당연히 그가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힌 후, 우겸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주기옥(朱祁鈺)이 황제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우겸이 이렇게 한 것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순전히 국가안위를 위해서 생각한 것이다. 이어서, 간신과 견유의 모함하에 명영종은 우겸등이 모반죄를 꾀했다고 모함한다(사실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우명, 왕문, 왕성(王誠), 서량(舒良), 장영(張永), 왕근(王勤)은 참형에 처해지고, 가산을 몰수당한다.
우겸의 가산을 몰수할 때, 우겸의 집안에 재산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저 경태제가 하사한 약간의 물품만 있을 뿐이었다. 우겸이 죽은 후 당시 사람들은 누구도 감히 시신을 수습하려 하지 않는다. 그때 진규(陳奎)라는 도독동지(都督同知)가 우겸의 충섬심에 감동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그의 유해를 수습해서 북경의 서쪽 조용한 곳에 묻어준다. 1년후, 우겸의 사위 주기(朱驥)는 그의 유해를 몰래 파내서, 고향 항주로 운반해 간다. 그리고 서호(西湖)의 가에 묻는다. 악비묘와 이웃하는 곳에.
우겸등을 죽인 후, 명영종은 마음이 공허한 상태에서 살인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진다. 한편으로 금의위 특무를 총애하고 중용하며, 다른 한편으로 추가로 소위 경태제, 우겸의 '간당' 및 그 주변인물을 계속 조사하고 박해한다.
천순원년 이월초구일, 명영종은 사례감태감 요관보(廖官保), 사례감소감 허원(許源), 어마감태감 학의(郝義), 대흥좌위천호 유근(劉勤), 금의위백호 애숭고(艾崇高)를 죽인다. 초십일, 내관 담길(覃吉)을 죽인다.
이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명영종에게 죽임을 당한 것일까? 명나라때 공식사료의 내용을 보자.
요관보는 어약방(御藥房)을 책임지는 태감이었다. 명영종이 남궁에 갇혀 있을 때, 한번은 어약방에 약을 달라고 한다. 요관보는 이 하야한 황제를 고의로 괴롭히기 위하여 약을 주지 않았다. 누가 알았으랴. 명영종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복위한 후에 구실도 찾지 않고 바로 그를 붙잡아 죽여버린다.
허원은 사례감소감이다. 일찌기 남궁에서 명영종을 모신 바 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되자, 그는 하야한 황제를 비웃는 말을 몇 마디 했다. 결국 그도 명영종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 두 면의 환관이 죽은 것은 스스로에게 잘못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나머지 궁정의 내외관리들의 죽음은 실로 그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어마감 태감 학의는 소문에 따르면 그가 사례감 태감 왕성과 공모하여, "용사를 보내어 조길상, 석형 등을 죽이려고 해서, 주살당했다"는 것이다.
대흥좌위천호 유근은 머리를 잘 빗겨서, 경태제를 모신 바 있고, 인정을 받았었다. 군사에서 천호관까지 고속승진한다. 탈문지변후 명영종의 신경은 고도로 긴장되어, 항상 의심을 하곤 했다. 금의위 교위 위지고(尉遲杲)는 그 틈을 타서 조정에서 자신과 갈등이 있던 유근을 찍어낸다. 그가 일찌기 남궁에 연금되어 있는 명영종을 비웃었다고 말한 것이다. 명영종은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아무런 조사도 거치지 않고 바로 유근을 죽여버린다.
금의위 백호 애숭고는 일찌기 태의원의 의원이다. 경태제는 독자 주견제(朱見濟)가 요절하면서 아들을 갖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죽어라 후궁들 사이에서 자식을 얻으려 했다. 그러다보니 몸이 나빠진다. 애숭고는 이를 알고, 경태제에게 보약을 올린다. 경태제는 기뻐하며 그에게 금의위 백호를 내린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이 재수없는 의원은 명영종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담길은 경태제 연간에 조정 내고(內庫)의 황금,비단,진귀한 재화를 기록하는 내관이다. 경태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 일찌기 여러 후궁에게 백금3만여냥, 보석 만여개를 하사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기록했고, 탈문지변후 명영종에게 고한다. 명영종은 담길이 주관한 부책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는다. 그 결과 찾지를 못했다. 찾지를 못하자 담길에게 화풀이 한 것이다. 명영종의 명으로 감옥에 가둔 후 죽인다.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에 범광(范廣)이 있다. 그는 보가위국(保家衛國)의 대영웅, 대공신이다. 오이라트와 싸울 때, '북경보위전'에서 그는 말을 몰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오이라트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그 후에 다시 잔당을 추격하여 오이라트군을 자형관에서 대파한다. 나중에 관직이 총병관에 오른다. 그리고 '거용관 바깥에 주둔한다.'
그러나 범관은 석형(石亨), 장월(張軏)의 불법행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경태제에게 보고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원한을 산다. 우겸을 죽인 후, 석형, 장월은 즉시 눈길을 범광에게 돌린다. 그리하여 범광이 우겸의 일당이라고 모함하여, 하옥한 후 사형에 처한다.
이러한 비극에 대하여 <명사>에서는 이렇게 썼다: 범광은 "성격이 강직했다. 매번 전투에 나서면 사병들에 앞서서 모범을 보이고, 웅크리고 물러난 적이 없다. 일시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의 아래가 되고, 우겸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가 된다. 그리하여 동료들이 그를 꺼렸다."
기실 명영종과 그를 지지하는 탈문정변자들의 이런 근거없는 살인과 남살은 여기에 거치지 않았다. 조금만 잘못하거나 무의식적으로 결례를 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꺼집어내어 사지로 몬다.
흑백을 뒤집고, 충량을 죽이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들을 제거한다. 명영종이 복위한 후 한 행위는 자신의 연호 '천순'에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역천(逆天)'의 행동이고, 역사의 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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