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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강골인물 부찰(傅察): 채경의 사위도 거절하고, 여진태자에게 무릎꿇기고 거절하다.

by 중은우시 2018. 6. 22.

글: 효풍모우(曉風暮雨)


금나라이 침략을 막는 전쟁과정에서 무수한 송나라의 관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면 그 중에서 최초로 순국한 송나라관리가 누구인줄 아는가? 그는 일찌기 과감하게 권신 채경의 사위되기를 거절한 바 있고, 여진이라는 강적 앞에서 머리가 잘릴 지언정 무릎은 꿇지 않았던 열혈남아였다. 그가 도대체 누구일까?


부찰, 자는 공회(公晦) 맹주 제원 사람이다. 관료집안에서 태어났고, 북송의 명신 부요유(傅堯兪)는 그의 종조부이다. 부요유는 왕안석(王安石)과 사이가 좋았는데, 나중에 신법을 반대하는 바람에 지방으로 좌천된다. 사마광(司馬光)은 일찌기 부요유를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청렴, 정직, 용감"


부찰은 재주가 출중했고, 송휘종 숭녕5년(1106년) 즉 18세의 나이로 진사급제한다. 북송시기, 진사는 국가의 희귀인재이고, 전도가 유망하다. 그래서 "방하착서(榜下捉婿)", 즉 과거 합격을 알리는 방 아래에서 사위를 잡는다는 말이 유행했다. 당시 상서좌복야 겸 중서시랑(좌상)이던 채경(蔡京)은 부찰을 점찍어서 사위로 삼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차나미 부조(傅鯈)를 보내어 그 뜻을 전한다. 그러나 부찰은 채경의 사람됨을 경멸하여 그 자리에서 거절한다.


부찰이 감히 권신 채경의 사위되기를 거절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인사들에게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당시 상서우복야(우상)으로 있던 조정지(趙挺之)의 관심을 받는다. 다음 해 즉 대관원년(1107년), 조정지는 막내딸을 부찰에게 시집보낸다. 이번에는 부찰이 거절하지 않았고 조씨집안의 사위가 된다.


조정지의 셋째아들은 바로 남송의 저명한 사인 이청조(李淸照)의 남편인 조명성(趙明誠)이다. 부찰은 이렇게 하여 이청조, 조명성과 인척관계가 된다. 두 집안은 관계가 밀접했고 교류도 빈번했다.


부찰은 청주사법참군, 영평승, 치천승, 병부원외랑, 이부원외랑등의 직위를 맡는다.


선화7년(1125년) 십월, 금나라는 맹약을 어기고 금태종(金太宗)이 명을 내려 송나라를 공격한다. 금나라군대는 양로로 나누어 대거 남침했다. 다만 북송조정은 정보가 늦어서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송휘종은 부찰로 하여금 금나라에서 보내온 하정단사(賀正旦使)를 맞이하기 위하여 변방으로 가도록 한다.


청주(淸州)에 도착했을 때, 금나라군대가 이미 연산부(燕山府)를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수행인원은 부찰에게 경성으로 돌아가자고 권했지만, 부찰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황명을 받고 나왔는데, 어렵다고 하여 돌아간다면, 천자에게 뭐라고 말씀드리란 말인가?" 그리고는 사람을 데리고 계속 전진했다. 그리고 십일월 이십일일 한성진(韓城鎭)에 도착한다. 그러나 금나라사신은 보이지 않았다.


역관에서 며칠을 기다린 후에도 여전히 금나라사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수십기의 금나라기병이 돌연 역관으로 쳐들어 온다.  ㄱ리고 부찰일행을 끌고 갔다. 부쪽으로 백여리를 간 후에 금나라 동로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내려오던 "이태자(二太子)" 완안종망(完顔宗望, 일명 斡離不)"을 만난다.


금나라병사들은 부찰로 하여금 '이태자' 완안종망을 항하여 절을 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부찰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송천자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온 것이다. 금나라황제를 만난다면 당연히 예를 표해야 겠지만, 지금 너희가 이렇게 협박하여 이태자를 만나게 한다. 이태자는 귀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신하이다. 당연히 손님의 예(賓禮)로 만나야지 어찌 나보고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가?"


완안종망은 대노하여, 송나라는 덕을 잃어서, 자신이 조서를 받아 송을 치러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찰에게 송나라의 상황을 모조리 고하라고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겁을 준다


부찰은 이치를 내세워 금나라가 신의를 어겼음을 질책한다. 완안종망은 분노하여 부하에게 부찰을 강제로 무릎꿇게 만들라고 말한다. 부찰은 머리칼을 붙잡히며 땅바닥에 쓰러졌고, 소매가 다 찢어졌지만,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소리쳤다: "내 목은 벨 수 있지만, 내 무릎은 꿇릴 수 없다!"


송나라의 사신단 부사인 장구(蔣口)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 상황을 목도하자 속속 완안종망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동한의 관리 동선(董宣)은 광무제 유수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강항령(强項令)"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후세에 이름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제대도 된 군주인 광무제 유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부찰이 만난 것은 적국의 종실이고 이미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온 침략자이다. 부찰이 정기늠름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선보다도 훨씬 고귀한 행동이다.


"네가 오늘 무릎꿇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무릎꿇고자 해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완안종망은 이런 말을 남기고, 사람을 시켜 부찰을 가두게 한다.


부찰은 자신이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수행하던 후언(侯彦)등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너희가 송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의 부모에게 전해달라. 그들이 내가 국가를 위해 죽은 것을 안다면, 슬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겠는가."


그후 며칠동안 완안종망이 목숨으로 위협하고 이익으로 회유해도 부찰의 입에서는 한 마디도 가치있는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완안종망은 부찰을 처형한다.


부찰이 순국한 후, 북송의 옥전순검사(玉田巡檢使) 무한영(武漢英)은 그의 시신을 찾아서 화장한 후, 유골을 싸서 사립(沙立)이라는 병사로 하여금 유골을 등에 지고 송나라로 돌아가게 한다. 탁주(涿州)까지 갔을 때 사립은 금군에 붙잡혀 감옥에 갇힌다. 두 달 후, 사립은 금나라군사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벽을 파서 구멍을 내 도망친다. 결국 부찰의 유골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간다.


부찰은 금나라가 남침한 이래 송나라에서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로 순절한 관리이다. 부찰이 죽었을 때 나이는 겨우 37살이다. 소식이 송나라에 전해지자, 소식을 들은 사람은 모두 슬퍼하면서 장하게 여겼다. 나중에 송나라조정은 휘태각특제(徽酞閣特制)로 추증하고, 송효종은 건도연간에 시호를 충숙(忠肅)으로 한다.


남송의 주전파관리로 '남송사명신"의 하나로 꼽히는 이광(李光)은 부찰과 사이가 좋았다. 부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친구의 사적이 묻힐까 우려하여, 그의 사적을 완전하게 정리하여 조정에 바친다.


부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 거의 없이 공부를 했다. 사서에 그의 문장은 "온려유전재(溫麗有典裁)"하다고 적었다. 부찰의 손자 부백수(傅伯壽)는 <충숙집> 3권을 정리하고, 시 130여수를 수록한다.


부찰의 유골을 수습했던 북송관리 무한영은 금나라군대가 계주(薊州)를 함락시킨 후 투항한다. 그는 명문으로 기록된 송나라에서 최초로 금나라에 투항한 관리이다. 그러나 무한영은 "신재조영심재한(身在曹營心在漢)"이었다. 동로군 총사령관 완안종망의 신임을 얻은 후, 동경으로 도망쳐 와서, 양로군이 동경성을 협공하려 한다는 중요한 정보를 송나라조정에 제공한다. 나중에는 '특종부대'를 조직하여 태원으로 지원을 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