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악비)

악비의 앞에 몇명이 무릎꿇고 있는가?

중은우시 2018. 9. 21. 12:34

글: 한정우기(閑靜偶記)


항주 서호를 여행한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서호의 가에 악묘(岳廟)가 있고, 악묘 안에는 몇 명이 무릎을 꿇고 있다.

악묘에서 모시는 사람은 악비(岳飛)이다. 이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는 유명한 역사인물이다.

악묘에 몇명이 무릎꿇고 있을까? 아마도 여행객들은 그다지 신경써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면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괜찮다. 그냥 아무 숫자나 얘기해보라. 그래도 다 맞을테니까. 본 적이 없다고? 그것도 맞다.


첫번째 답: 0


악비는 1142년에 죽었고, 1162년에 명예회복된다. 그리고 1195년에 악왕묘를 만든다. 이때는 무릎꿇은 상이 없었다.


두번쨰 답: 2


명헌종 성화11년(1475) 항주의 관리 주목(周木)이 악비묘를 수리하면서, 쇠로 진회(秦檜) 부부가 무릎을 꿇은 상을 만들어 악비묘의 앞에 놔두었다. 이때는 무릎꿇은 사람이 2명이다.


진회와 그의 처인 왕씨(王氏)이다.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설악(說岳)>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세번째 답; 3


명무종 정덕8년(1513), 절강사람인 이륭(李隆)장군이 악비묘의 앞에 하나의 궤상(跪像)을 추가한다. 이때는 궤상이 모두 3개이다.

추가된 사람은 만사설(萬俟卨)이다. 이름이 괴이해서 세 글자 모두 틀리는 사람도 있다.

진회부부가 주범이라면, 만사설은 종범이다. 그를 추가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다.


네번째 답: 4


명신종 만력22년(1594), 절강관리 범래(范淶)는 다시 악비묘의 앞에 궤상을 하나 더 추가한다. 이때 궤상은 모두 4개가 된다.


새로 추가된 사람은 장준(張俊)이다. 진회가 악비사건을 만들 때, '증거'가 필요했다. 단지 한마디 '막수유(莫須有)'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때 '증거'를 제출해준 사람이 바로 이 장준이다. 그래서, 장준이 들어가는 것도 이치에 맞는다.


다섯번쨰 답: 5


이 다섯번째 사람은 서호 악묘에는 없다. 악왕묘는 전국에 많이 만들어져 있다. 개봉 주선진 악왕묘에는 궤상이 모두 5개이다. 추가된 사람은 나여읍(羅汝揖)이다.


나여읍은 당시의 간신(諫臣)이다.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것이 업무이다. 진회가 악비를 모함할 때, 사건입건부터 사건처리까지,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나여읍은 바로 그때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이다.


여섯번째 답: 6


악비는 아주 위대하고, 악모(岳母)도 위대하다. 악비의 모친 요씨묘(姚氏墓)는 강서 구강(九江)에 있다. 그녀의 묘 앞에는 또 한 명의 궤상이 있다. 그는 왕준(王俊)이다. 왕준은 악비사건때 무슨 역할을 했을까? 이것은 악비사건에서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다.


왕준은 악비의 부하였다. 남송학자 왕명청(王明淸)은 <휘진록.여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청은 임자년에 영국에서 관직에 있었는데, 왕준의 악비에 대한 고발장이 그 집에 있었다."


먼저 직접 악비를 고발한 자는 바로 왕준이었다.


<휘진록>의 기록에 따르면 악비의 죄명은 두 가지이다: "지척승여(指斥乘輿)", "항거조명(抗拒詔命)"


왕준은 왜 악비에게 이 두 가지 죄상을 뒤집어 씌운 것일까? 원래 그는 고발의 전문가였다.


왕준은 원래 동평부 웅위장(雄威將)인데, 다른 사람을 모함하고 자기의 공으로 가로채서 승진했다. 본영의 부도두(副都頭)에 이른다. 악가군에 배속된 후에는 전군부통제(前軍副統制)가 된다. 악가군에 배속된 후에 왕준은 몇년간 일했지만 직위가 그대로였다. 승진을 하지 못하자 악비에게 화풀이를 하게 된다.


소흥11년(1141), 왕준은 장헌(張憲)이 부하를 선동하여 모반하여 금나라에 투항하려 한다고 고발한다. 장헌사건은 큰사건이었고, 일거에 악비 부자가 연루되어 버린다. 남송의 형세는 아주 복잡했다. 군사적으로 금나라군대에 대항하기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약하게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화의를 청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악비는 주전파이다. 그래서 조정에는 골치거리였다. 왕준의 고발은 조정을 도운 셈이 된다. 악비의 억울한 사건의 직접적인 흉수는 바로 왕준인 것이다.


악비사건을 만든 흉수는 2, 3, 4, 5, 6명의 여러가지 견해가 다 있다. 오직 '1'명이라는 견해만 없다. 기실 그런 견해도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송고종 조구(趙構)이다.


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송고종 조구가 치국방략을 집행하는데 아주 불리했다. 다만, 조구는 황제이다. 어찌 황제가 악비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역사는 바로 이렇게 재미있다. 그리고 어떻게 말해도 다 맞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