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맹공(孟珙): 남송에서 악비보다 뛰어났던 장수

by 중은우시 2018. 6. 15.

글: 육기(陸棄), 손옥량(孫玉良)


소련에 D. A. Volkogonov박사라는 유명한 군사전문가가 있었다. 그는 <스탈린: 승리와 비극>이라는 책을 써서 세계에 이름을 떨친다. 그의 2차대전에 대한 연구는 독보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그는 중국의 전사(戰史)에 대하여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남송시기의 한 명장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는 그를 2차대전시기 독일의 3대명장중 하나인 만스타인 원수와 나란히 언급하면서, 그를 13세기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기동방어대가"라고 평가했다.


소련인과는 다른 각도에서 일본 메이지유신시기에 책 한권이 출판된 바 있는데, <통속송원군담>이다.이 책에서도 이 장군을 크게 칭찬하며 그에 대하여 "비록 쇠퇴하는 송나라이지만 그의 충의, 병략은 악비보다 못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외국인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이 장군은 바로 남송의 항금,항몽영웅인 맹공이다.


이 맹공을 얘기하자면, 악비를 얘기해야 한다. 맹공의 증조할아버지는 맹안(孟安), 할아버지 맹림(孟林)은 모두 악비 수하의 부장이었다. 부친인 맹종정(孟宗政)도 역시 항금명장이며, 금나라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여 "맹야야(孟爺爺)"라고 불렀다. 맹야야는 10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양가장의 '칠랑팔호'보다 많다. 그중 넷째아들 맹공이 가장 뛰어났다. 맹공은 장수집안에서 태어났고, 호부불견자(虎父不見子)라고 출생후에 문무를 연마하여 성인이 된 후에는 부친을 따라 전투에 나선다. 그는 무예가 출중했을 뿐아니라, 모략도 뛰어나서 장군의 재목으로 자랐다.


맹공의 무예는 악비에 못지 않았다.특히 사술(射術)에 뛰어났다. 전투를 벌일 때면 천군만마가운데 적군장수의 수급을 간단하게 취하곤 했다. 용맹은 삼국시기 관우, 조운에 못지 않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금나라 장수 완안와가(完顔訛可)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양(棗陽)을 공격한다. 맹공은 누각에 올라서 활을 쏘는데 적장이 바로 쓰러졌다. 한번은 맹공이 부친과 함께 금나라군대와 싸우는데 패배했다. 맹공은 부친을 구하기 위하여 말을 타고 뛰어든다. 맹종정은 삼국시대 마초, 조운과 마찬가지로 백마를 타고 백포를 입고 있어서 천군만마중에서도 찾기가 쉬웠다. 맹공은 기병을 이끌고 뚫고 들어갔고,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무친 맹종정을 보호하여 안전하게 빠져나온다.


정강지치는 송나라 최대의 치욕이다. 악비는 이렇게 시를 쓴 바 있다: "정강치(靖康恥), 유미설(猶未雪); 신자한(臣子恨), 하시멸(何時滅)" 정강지치를 설욕하는 것은 악비의 평생 숙원이었다. 맹공은 악비 부하의 후손으로, 자연히 이 목표를 자신의 임무로 삼고는 시시때때로 금나라의 동향을 주시한다. 그러던 중에 기회가 왔다. 1233년, 몽골과 송나라는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하기로 합의한다. 송나라측은 맹공을 주장(主將)으로 하고, 몽고측은 타타르를 주장으로 하였다. 맹공은 타타르와 성격이 통했고, 의형제를 맺는다. 결의도 결의이지만 두 사람은 잘 협력했다. 이는 몽골, 송, 금나라간에 벌어진 역사상 유일한 3국대전이었다. 각측은 각자의 민족이익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 최후에 금애종은 자결하고, 송,금에 의하여 시신이 나뉘어진다. 금나라의 대장 완안중덕은 패배한 후 병사들과 함께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렇게 하여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강개한 비가가 다시 한번 상연된다. 맹공은 이번 전투에서, 정강지치를 설욕하는 외에, 한족의 몽골군장수를 하나 구해준다. 그는 바로 장유(張柔)이다. 장홍범(張弘範)의 부친이다. 맹공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29년후, 같은 운명이 송나라에 닥쳤다는 것이다. 송나라승상 육수부(陸秀夫)는 어린 송나라황제를 끌어안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그리고 송나라10만군인과 백성들도 바다에 몸을 던진다. 몽골,송이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와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송나라를 공격한 몽골군대를 지휘한 사람이 바로 그가 구해준 장유의 아들 장홍범이었다. 이것은 바로 인과순환(因果循環), 보응불상(報應不爽), 명명지중(冥冥之中), 자유정수(自有定數)라 할 수 있다.


맹공이 두번째로 생각지 못했던 일은 그가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킨지 몇달만에 몽골과 송나라는 동맹군에서 정식으로 적군이 된다. 동경개봉부, 서경하남부와 남경응천부는 원래 북송의 땅인데, 금나라에 점령당해 있었다. 이제 금나라가 멸망되었으니, 송리종은 천진하게 이곳들이 송나라의 영토가 될 거라 여겼다. 그래서 송나라군대를 파병하여 북송의 옛땅을 접수한다. 역사에서 "단평입낙(端平入洛)"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것은 몽골군은 송나라에게 요나라 금나라보다 더욱 흉악한 적이었다. '중원을 차지하고 황하를 지키고 동관을 점거하며, 삼경을 수복하는 것이 송나라의 국책이다. 그러나 지구를 철기로 짓밟고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 몽골의 국책이다. 징기스칸은 그 어느 황제보다 많이 생각하고, 멀리 생각하고, 크게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지구는 바로 그들의 목장이다. 몽골과 송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송나라는 옛 북송의 땅은 당연히 남송이 가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몽골인은 천하의 땅이 모두 몽골인이 유목해야하는 곳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몽골과 송의 전쟁이 일촉즉발이 된다. 처음에 송나라는 작은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이는 몽골인들이 놓은 덫이었다. 이때 송나라의 장수는 조범, 조규, 전자재, 양의등이며 감군은 서민자이다. 이들은 몽골의 맹장 타타르의 적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송나라의 변방장수들 중에서 대부분은 몽골과 싸우는데 반대했다. 단지 황제와 소수의 대신들만이 실지를 수복하고자 했다. 그러니 전투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었다.


송과 몽골의 관계는 단평입낙의 전투로 동맹이 정식 파기된다. 이때부터 몽골과 송나라의 근 반세기에 걸친 전투가 시작된다. 단평입낙전투에서 송나라는 대패한다. 원래 송리종은 호기롭게 나섰지만,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기가 완전히 꺽인다. 그는 자신이 내린 성지로 전쟁을 일으켜놓고, 전재에서 패배하자 주전파대신들을 처벌하고, 주화의 생각을 갖는다. 나라가 어려우면 좋은 장수가 생각나고, 시국이 어려우면 좋은 신하가 생각난다. 중요한 숭간에 그는 맹공을 떠올린다. 그래서 맹공을 불러서 계책을 묻는다. 맹공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은 일개 무부로서, 당연히 싸워야 한다고 말해야 하고, 화의해야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송리종은 맹공의 호기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음을 보고 기뻐한다. 그를 황주지부, 황주,기주, 광주 및 신양군의 병마를 절제하도록 하여 남송의 절반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긴다. 


맹용의 계책은 천하무쌍이다. 강릉전투에서 그는 의병지계를 써서 적의 24개 군영을 연파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백성 2만여명을 구해낸다. 그리고 몽골군의 도강기구를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이 전투의 적수는 바로 그와 결의형제를 맺은 몽골맹장 타타르이다. 황주전투에서, 그는 적을 겁내고 전투를 겁내는 사십구명의 송나라병사를 연이어 참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몽골과 대치전을 벌이며, 몽골군의 대표, 땅굴등 맹렬한 공격을 버텨낸다. 이번 전투의 적수는 몽골의 종왕(宗王) 구온불화(口溫不花)와 그가 구해준 바 있는 한족 몽골장수 장유이다. 장유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송나라병사를 죽이는데 전혀 봐주는 것이 없었다. 쌍방은 각각 주인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237년의 십월부터 1238년의 봄까지 몽골인은 황주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맹공에게 십중칠팔은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부득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인들은 아주 잔인했다. 걸핏하면 성을 모조리 도살했다. 평상시에 잘 살 고 있던 송나라백성들은 몽골인을 보면 마귀살신을 본 것처럼 두려워했다. 맹공이 황주에 도착한 날, 황주의 백성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이 속속 그를 "우리들의 아버지가 오셨다"고 말했다. 맹공을 기르고 보호해주는 부친으로 여긴 것이다. 맹공은 방어전을 잘 했을 뿐아니라, 반격전에서도 악비에 못지 않았다. 공격이 가장 좋은 수비이다. 황주전투가 끝난 후, 맹공은 병력을 이끌고 몽골군에 양양전투와 등양전투를 주도적으로 전개한다. 그리하여 양양을 수복하고, 순양을 기습하며, 채주를 점령했다. 몽골군의 공세를 맹아단계에서 잘라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인 맹경, 맹영, 맹장과 함께 명을 받아 사천을 방어하면서 대아채대첩을 거두고, 기주에서 적을 퇴각시킨다. 맹공은 연전연승을 거두어 송리종에 의하여 영무군절도사, 사천선무사 겸 기주지부의 직위를 받는다. 악비, 필재우이후 남송에서 새번째 대장이 된다. 


맹공은 남송의 가장 유명한 "강철장성"이 된다. 맹공이 있으면 몽골군이 한발짝도 진격하지 못했다. 여러해동안의 방어경험을 가지고, 그는 저명한 '번리삼층'이론을 내놓아 좋은 효과를 거둔다. 맹공의 관직은 전공이 탁월하면서 연이어 승진한다. 마지막에는 남송 두 개의 전투지구의 총사령관이 되어 장강상류,중류의 방어를 책임진다. 그의 직권은 남송시기 악비를 훨씬 넘어섰다.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하던 양송때, 이는 아주 드물게 보는 경우이다. 맹공의 지휘하에 송나라사람들은 의지할 곳이 있었고, 원래 몽골에 투항했던 송나라신하, 송나라백성들이 다시 송나라로 돌아오는 국면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남송의 진북군장수이자 당시 몽골 하남행성의 범용길(范用吉)은 몽골인을 배반하고 비밀리에 맹공에게 투항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하나의 성의 성장이 투항하다니 이는 송나라에 있어서 생각할 수도 없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송나라조정은 범용길의 투항을 의심하여, 하남성을 접수하지 못한다. 이 일은 맹공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떡도 받아먹지 않다니. 언제 중원을 수복한단 말인가. 맹공은 이 일로 분노하여 사직을 청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황제는 그의 사직을 받아들인다. 이때 맹공은 겨우 오십여세였다. 대적을 앞에 두고 물러나다니... 송리종은 승리를 거두자 다시 옛 고질병이 도진 것이다. 그리하여 맹공은 홧병이 들었고, 결국 오십이세의 나이로 우울하게 생을 마감한다.


맹공은 공적이 악비에 비견할 만하고, 직권은 악비보다 높았다. 백성들 가운데의 명망도 악비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송리종은 결국 스스로 이 장성을 없애버린다. 백성들이 부친이라 부르던 이 장군이 죽었을 때, 백성들은 마치 부친상을 당한 것처럼 그를 위하여 제사지내고 사당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