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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만귀비(萬貴妃)는 어떻게 성화제(成化帝)의 총애를 독점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4.

글: 두문자(杜文子)


성화제 주견심(朱見深)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은 바로 만귀비이다. 그녀는 주견심이 일생동안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다. 만귀비가 죽은 후, 성화제는 심지어 이로 인하여 병석에 드러누워 반년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를 보면, 만귀비는 주견심의 생명역정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절대로 비(妃)의 역할을 한 여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만귀비는 다른 여자들과 비교할 때 어떤 우수한 점이나 출중한 면이 있었을까? 무엇이 성화제를 사로잡게 만들었을까?


사서에는 만귀비에 대하여, "용모는 남자상이고 목소리가 크다. 남자같았다." "풍만하고 근육이 있었다. 매번 황상이 외부로 나갈 때면 전투복을 입고 칼을 차고 좌우에 시립해 있었다." 그런데 이 여걸이 성화제의 은총을 독점했다. 이것은 주견심의 모친 조차도 불가사의하다고 여긴 일이다. 다만, 만일 성화제의 성장과정을 이해한다면 그가 왜 만귀비에 대하여 '주화입마'식의 치정을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귀비는 4살때 입궁했다. 명영종의 모친인 손태후(孫太后)의 궁녀로 있었다. 토목보의 변이 발발한 그 해에 만씨는 20살이었다. 이 나이는 고대로 따지자면 이미 많은 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노처녀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운이 좋다면, 이런 노처녀는 아마도 궁에서 내보내져서 민간에 시집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사건이 많았고, 명영종이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혀 간다. 손태후는 2살된 주견심을 태자로 앉힌다. 그리고 자신의 궁녀인 만씨에게 그를 보살피게 한다.


이 동란의 시기에, 만씨는 여성특유의 모성애로 주견심에게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준다. 두려움에 빠져 있던 주견심은 그녀가 옆에 있으면 안전감을 느꼈다. 경태역저(景泰易儲), 즉 경태제가 태자를 바꾸면서, 주견심은 기왕(沂王)으로 쫓겨난다. 그 후에도 만씨는 그의 곁에서 그 불안한 세월을 함께 보낸다.


주견심이 유년, 동년에서 소년과 청년시기를 거칠 때까지 대명은 사건이 많았다. 그리고 매번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주던 만씨는 그에게 피풍항(避風港)과도 같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는 어느 정도 성에도 눈을 뜨게 된다.


주견심과 만씨의 관계가 공개화된 것은 명영종이 사망한 이후이다. 그때 황제 주견심은 막 18살이 되었다. 만씨는 이미 35살이다. 주견심의 첫번째 황후인 오황후(吳皇后)는 1달간 황후로 있다가 폐위된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주견심과 만귀비간의 동궁시절부터 생긴 기형적인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씨에게 함부로 대했다. 오황후가 몰랐을 뿐아니라, 주견심의 생모인 주태후(周太后)도 몰랐다. 그녀는 아들인 황제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의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승은을 많이 내리느냐?"


나중에 바로 이런 기형적인 사랑으로, 주견심의 두번째 황후인 왕황후(王皇后)는 거의 허수아비가 된다. 일생동안 주견심과 동침한 것이 10번도 되지 않는다.


만씨가 총애를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자의 마음을 확실하게 잡았기 때문이다.


첫째, 성화제의 각종 요구를 전력을 다하여 만족시켜 주었다. <명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만씨는 "기민하고, 황제의 뜻에 잘 영합했다." 그리고 명나라 관사에도 이렇게 적혀 있다: (만귀비는) 기민하고, 황상의 뜻에 잘 영합했다. 그리고 아랫사람들도 잘 회유해서, 동정을 살펴보게 했고, 육궁이 황상의 총애를 오래 받기는 힘들었다."


둘째, 만귀비는 분수를 아는 여인이다. 어느 정도 스스로를 잘 알았다. 예를 들어, 황후의 명분을 그녀는 감히 취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성화제로 하여금 만귀비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게 만들었다.


셋째, 황제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성화제는 어려서 너무나 많은 경심동백할 일을 겪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 그림자가 있었고, 안전감이 결핍되어 있었다. 만귀비는 보위업무를 잘 했다. "황제가 매번 밖으로 나갈 때면, 만귀비가 무장을 하고 앞장서서 달려갔다."


이것으로 인하여 성화제는 만귀비에게서 떨어질 수 없었다.


여기까지 보면 누군가 이렇게 물어볼 지도 모르겠다. 주견심이 그렇게 만귀비를 사랑했다면,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지고무상한 황권으로, 조서를 내려서 그녀를 황후로 세우면 되지 않았을까?


이 일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다.


첫째, 주견심과 만씨간에는 나이차이가 너무 컸다. 한 명은 18살로 이제 막 등극한 젊은 황제인데, 만일 35살이나 된 나이든 여자를 황후로 앉힌다면, 보편적으로 조혼을 하던 고대사회에서는 이런 선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문당호대(門當戶對)"가 되지 않는 기형적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어려웠다.


둘째, 성화제 주견심이 만일 만씨를 황후로 앉히려면, 먼저 반드시 황태후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당시 황태후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명영종의 정실인 전태후이고, 그녀는 아주 현숙하고 온화했다. 그리고 조정에 세력이 없었다. 그녀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관건은 또 다른 황태후이다. 즉 주견심의 친생모친인 주태후이다. 주태후는 남편 명영종과 아마도 나이가 거의 10살 차이 났다. 천순8년 정월 38살의 명영종이 사망했을 때, 주태후의 나이는 개략 30살이다. 그런데, 주견심의 '애인'인 만귀비는 이미 35살이다. 만일 만씨를 황후로 앉힌다면, 주태후의 며느리가 되는데, 이 주태후보다 나이가 많은 며느리 황후를 어떻게 들일 수 있단 말인가. 아들 주견심이 만씨만을 총애한다는 말을 듣고, 모친인 주태후는 더 이상 보고넘기지 못하고 아들을 책망한 바 있다: "만귀비가 어디가 예쁘냐. 너는 왜 그녀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느냐." 이를 보면 만씨를 황후로 세우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셋째, 만씨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미모를 지니지 않았을 뿐아니라, 용모도 남자상이고, 목소리도 커서 남자같았다. 여걸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처럼 생긴데다가, 목소리도 크고, 게다가 나이도 많았다. 35살이면 이미 왕성한 생육능력을 발휘할 나이도 아니었다. 이것은 바로 당시에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는 전통관념으로 볼 때 용인되기 힘들다. 성화4년 구월, 하늘에 혜성이 나타난다. 육과급사중 위원(魏元)등은 이 기회를 빌어 황제에게 간언한다: "폐하께서는 아직 나이가 젊은데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어찌 종묘사직의 대계를 한 사람(만귀비)에게 의존하여 많은 자손을 두어 국가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고 민심을 안정시킬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이상을 보면, 비록 정통14년 토목보의 변이 발발한 때로부터 천순8년까지 주견심과 만씨간에는 15년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가졌지만, 그들의 관계는 어쨌든 정식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은 것은 그저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면서 사는 것뿐이다. 사서를 보면, 주견심은 만씨를 한 마음으로 사랑했지만 황후의 명분을 주지 못했다. 오황후는 그것을 잘 모르고 만씨에게 무례하다가 결국 폐위되고 만다. 그러나 그 뒤에 황후로 책봉된 왕황후는 좀더 총명하여, 아예 만씨와 황제의 사랑을 놓고 다투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황후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만귀비는 주견심의 눈에 이미 대명에서 무면(無冕)의 황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