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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이홍조(李鴻藻): 청말 조정의 이홍장(李鴻章) 숙적

by 중은우시 2018. 7. 26.

글: 유계흥(劉繼興)


청말의 중신 이홍조는 명문출신이다. 조부 이전도(李殿圖)는 자가 환부(桓符)이고, 관직은 복건안찰사, 복건포정사, 안휘,복건 두 성의 순무를 지낸다. 부친 이철통(李徹通)은 자가 존헌(尊軒)인데, 일찌기 광서 하현지현등의 직위를 지낸다.


이홍조는 소년때부터 총명했다. 글을 한번 읽으면 줄줄 외울 정도였다. 그는 17세때 수재가 되고 24세에 거인이 되며, 25세때 진사가 된다. 이때부터 그는 50여년의 관료생애를 시작한다. 그는 일찌기 청나라의 내각대학사, 병부상서, 예부상서, 공부상서, 이부상서, 군기대신, 총리아문대신등 중요직무를 맡는다. 그는 동치제의 스승으로, "고양상국(高陽相國)"이라는 별칭도 얻는다. 그는 함풍, 동치, 광서의 세 황제를 모신 청말의 삼조각로(三朝閣老)이다.


이홍조는 어려서부터 멋진 관각체(館閣體) 동기창(董其昌)서체로 유명했다. 그가 남긴 주절, 의고는 아주 많은데, 대부분이 동기창체로 썼고, 글자 하나하나가 보배이다. 청나라이래로 서예계에서는 위비학(魏碑學)이 크게 유행하여, 위비체(魏碑體)가 천하에 유행한다. 이홍조는 비첩도 겸용하여 자신만의 풍격을 이룬다. 그의 가서, 수찰은 위비체로 쓴 것이 많다. 지금 수장시장에서 인기있는 서예작품이다. 그가 쓴 안진경체, 황산곡체도 귀중하다.


더욱 귀한 점은 이홍조가 뛰어난 화가였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예운림(倪雲林)의 화풍이 있다. 그가 그린 화조, 선면은 당시 사대부들이 아끼던 것이다. 그와 그의 동료대신 장지만(張之萬, 청나라때의 저명한 화가 시호는 문달)간에 여러번 그림을 주고받은 적이 있어 예술계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졌다. 청사 <화전>에는 이홍조를 단독으로 조목을 만들었다.


이홍조는 정파이다. 역사기록에는 "지궁검약(持躬儉約), 독수정(獨守正), 지대체(持大體), 소천다단사(所薦多端士)"라고 적었다. 그는 사직대국을 중시하고, 시시로 창생을 생각했다. 1868년부터 1871년까지, 동치제와 서태후는 여러번 원명원을 중수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국력이 날로 쇠퇴하며, 서방열강은 중국의 영토와 주권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조금만 헛점을 보이면 수시로 파고들 상황이었다. 이홍장은 국력이 날로 쇠퇴하고, 백성이 곤궁해지는 것을 생각여 여러번 "명소(明疏)" 혹은 "밀간(密諫)"을 하며 명확히 "급하지 않은 일에 돈을 써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여 극력 원명원을 중건하려는 시도를 막아낸다. 결국 동치제와 서태후로 하여금 명을 거두게 만든다.


이홍조의 최대공로는 만평방킬로미터 이상의 영토를 지켜낸 것이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81년 5월(동치십년 사월), 제정러시아는 아고백(阿古柏)의 신강침략으로 나타난 변방위기를 빌어, 병력을 출병시켜 이리(伊犁)지역을 점령한다. 그리고 주변으로 확장해나갔다. 1877년, 좌종당은 군대를 이끌고 아고백을 격패시킨다. 1878년, 청정부는 흠차대신 숭후(崇厚)를 러시아에 사신으로 보내어 이리를 반환받는 문제를 가지고 러시아와 교섭한다. 그러나, 숭후는 다음해 크림반도의 리바디아에서 제정러시아의 대리외교대신 길레스와 <리바디아조약>을 체결하여 이리성 이외의 영토를 잃게 된다. 이홍조는 이 조약의 체결에 결사반대한다. 조정에서 그는 비분강개하며 이치를 들어 따진다. 그리고 청류파(淸流派)를 동원하여 이홍장(李鴻章)이 사람을 잘못 썼음을 탄핵하고 황상에게 숭후를 치죄할 것을 청한다. 그리고 사신을 다시 러시아에 파견하여 이 조항을 수정하도록 주장한다.


청나라정부도 이 조약은 '폐해가 극심하다'는 이유로 비준을 거부한다. 그리고 숭후를 삭탈관직하고 책임을 묻는다. 이홍조, 장지동등의 공동노력하에 (曾紀澤, 증국번의 아들)을 러시아로 보낸다. 반년여의 교섭을 거쳐, 증기택은 러시아외교대신 길레스와 러시아주중공사와 1991년 2월 24일 러시아 성페테르스부르크에서 <중러이리조약>을 체결하여 마침내 <리바디나조약>에서 잃은 이리의 남쪽영토 및 여러 군사요새와 관구를 되찾아 온다.


이홍조의 이름은 이홍장과 단 1글자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주 청나라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다. 그가 이홍장과 형제관계일 것으로 추측한다. 최소한 동족의 형제일 것으로 본다. 기실 이 두 명은 같은 조정에서 일했을 뿐이고, 이름이 비슷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다. 이홍장은 안휘 사람이고, 이홍조는 하북 사람이다. 전혀 혈연관계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공통점도 있다. 첫째, 둘은 모두 청나라말기의 중요인물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지위도 난형난제이다. 둘째, 두 사람은 모두 공계훈(孔繼勛)의 학생이다. 공계훈은 도광24년(1844년) 갑진과이고, 내각학사로 순청향시의 부고관으로 있을 때 이홍조와 이홍장을 합격시킨 바 있다.


이홍장의 형인 이한장(李翰章)은 관직이 양광총독에 오른다. 역시 청말의 봉강대리중 하나이다. 만청사에 이름이 많이 나온다. 이홍장의 동생은 이봉장(李鳳章)으로 일찌기 두 형과 나란히 봉강대리가 된다. 이홍장의 가족은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한 시대를 풍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홍조도 이홍장의 형이나 동생일 것으로 오해한다.


기실, 이홍조와 이홍장은 혈연관계가 없을 뿐아니라, 정치적 입장도 달랐다. 조정에서는 숙적이었다. 이홍조는 '청류파'의 우두머리이고, 이홍장은 '양무파'의 우두머리이다. 이홍조는 일찌기 청류파를 동원하여 양무파 이홍장을 탄핵하기도 했다. 청일전쟁때 이홍장은 직예총독으로 주화파이고, 당시의 한림은 일치하여 주전파였다. 이홍조는 예부상서로 주전파였다. 중외에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는 모두 이홍조가 주장하고 반포를 주재한다. 북양군대의 패전후, 이홍조는 조정에 이홍장을 처벌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광서제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홍장의 전횡, 발호는 연갱요나 화신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이홍조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다. 모두 승장(繩匠)후통에서 태어난다. 장남 조영(兆瀛)은 요절했다; 차남 곤영(焜瀛)은 자가 부증(符曾)이고 관직은 우전부시랑에 이른다; 삼남 은 이석증(李石曾)은 1906년 손중산이 이끄는 혁명조직 동맹회에 가입한다. 장정강(張靜江), 채원배(蔡元培), 오치휘(吳稚暉)와 함께 '국민당4대원로'로 불린다. 그는 근공검학운도으이 최초 창도자이고, 고궁박물원의 제1대 이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