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연비(燕飛)
오랫동안, 전체 국가와 민족에게 거대한 재난과 굴욕을 안겨다준 의화단운동은 서방침략에 저항한 애국주의운동으로 미화,포장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상 1900년의 이 중국북방을 석권한 운동을 살펴보면, 마사(馬士)가 <중화제국대외관계사>의 통계에 따를 때, 의화단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서양인의 수는 겨우 231명이고, 그중 대다수는 좋은 일을 하고 덕을 쌓아오던 선교사였다.
그런데, 의화단에게 죽임을 당한 중국교민과 무고한 백성은 수십만에 이른다. 북경지역에만도 4만명의 교민이 피살되었다. 그외에 일부 기독교를 믿지 않는 백성들도 피살되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서양과 관계만 있으면, 모조리 매국노로 취급하여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화단사건은 실제로 대규모의 소위 "매국노를 죽이는 군중운동"이다. 의화단은 모든 서양인과 관계된 사람을 매국노라고 보았다. 기독교를 믿거나, 서양인기업에서 일하거나, 서양책을 읽거나, 심지어 서양물건을 쓰는 사람도 모조리 매국노로 취급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당시 의화단은 "일룡이호삼백양(一龍二虎三百羊)"을 죽이겠다고 호언했다. 소위 "일룡이호삼백양"은 광서제(光緖帝), 이홍장(李鴻章), 장음환(張蔭桓),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등 서방에 배워야한다고 주장하는 양무파이다. 당시 조정에 남아 있던 개명한 대신들이 선후로 피살된다. 이홍장은 다행히 북경에 없었다. 만일 그가 북경에 있었더라면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서방을 배우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모조리 서양과 관계있는 사람이다. 단순히 서양물건인 연필만 쓰더라도 의화단운동기간에는 모조리 숙청대상인 매국노로 취급되었다. 당시의 북경거리는 도처에 모두 시신이었다. 많은 부녀자와 아동들까지 난자되어 죽었다.
전체 북방에서 의화간운동기간에 참안이 아주 많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그중 3건의 참안만을 언급할 것이다. 이 3건의 참안에서 이 소위 애국운동의 배후에 있는 진상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첫번째 사건: 주가하참안(朱家河慘案)
주가하참안은 주가하교당참안(朱家河敎堂慘案)이라고도 부르며 서방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거의 북경의 서십고교당(西什庫敎堂)이 포위공격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명하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감추어져 있어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주가하촌은 오늘의 하북성 경현(景縣)에서 개략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 두 개의 마을로 나누어지는데, 그중 동주가하촌에는 일찌감치 교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주가하교당은 이 지억의 첫번째 교회가 되며, 남녀학교, 육영원(育嬰院), 병원등을 두었다.
주가하촌 주위의 교인들이 의화단의 공격을 받은 후, 속속 노약자를 데리고 주가하교당으로 숨어든다. 일시에, 주가하교당은 현지 교인의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 당시, 경주, 오교, 부성, 고성, 교하, 무읍등 7,8개현이 교인들이 속속 주가하교당으로 피난온다. 이곳에 모인 교인들은 3천여명에 달한다.
금방, 주가하교당은 의화단 폭민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이들 의화단의 두목은 성이 왕(王)이다. 이 왕씨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그저 직업없이 떠도는 유민이었고, 주가하촌에서 한 교인인 마을여인을 희롱했다가 교인들에게 한바탕 혼난 적이 있다. 그가 현지 의화단의 우두머리에 오른 후, 처음 한 일은 바로 주가하교당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교당에 숨은 촌민이 너무 많아서, 이 왕씨는 이번에도 예전처럼 오히려 당할까봐 겁을 내서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그저 포위만 하고 치지는 않았다.
이때 두 명의 핵심인물이 나타난다. 채씨형제(蔡氏兄弟)이다. 그들은 현지의 선비였다. 한 명은 거인(擧人)이고 한 명은 수재(秀才)였다. 이 형제 둘은 일찌감치 서양교당을 미워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두 사람은 병력을 이끌고 지나가던 청군(淸軍) 지휘관 진택림(陳澤霖)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주가하교당은 서양인과 매국노의 집결지라고 알리며, 자주 향민들을 괴롭혔으니, 진택림이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해달라고 청한다. 진택림은 채씨형제의 말을 믿고, 밤을 새워 군대를 이끌고 주가하교당으로 간다. 대포로 먼저 포격을 한 후에, 이천여명의 의화단과 3천여명의 관병들이 '매국노'를 향하여 용감하게 돌진한다. 그들은 신속히 교당으로 돌진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륙했다.
이 도살이 끝난 후, 교당안에 숨어 있던 3천여명의 백성은 극수소만이 요행히 도망칠 수 았었다.
이 살륙에서, 교인들이 피살된 장면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총에 맞아죽은 사람, 불에 타 죽은 사람,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죽은 사람,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은 도망치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나중에 진택림은 현장에서 발견한다. 피살된 절대다수는 부녀자 어린아이 노약자들이었다. 거기에 매국노는 없었다. 외국인도 겨우 2명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무척 화가나서, 의화단의 다음 교당을 치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거절한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진택림은 겨우 목숨을 건진 몇몇 교인을 북경까지 호송해준다.
두번째 사건: 북경참안
진택림은 원래 산서에서 병력을 이끌고 북경으로 근왕(勤王, 황제를 보호하는 것)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때의 북경은 일찌감치 인간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북경이 통제되지 않게 된 것은 역시 두 명의 핵심 인물 때문이다. 한 명은 당시 중국의 진정한 우두머리인 서태후이고 다른 한 명은 단왕(端王)이다.
서태후는 처음에는 기실 역대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의화간과 같은 미신 색채의 사회조직에 대해 잔혹하게 진입하고 토벌하는 정책을 쓴다.
예를 들어, 원세개는 당시에 산동에서 순무로 있었는데, 의화단에 대하여 전혀 봐주지 않았다. 그는 의화단의 대사형, 이사형을 연회에 초청한 다음, 너희는 도창불입(刀創不入)이라고 하니, 오늘 한번 증명해보라고 말한다. 증명의 결과는 대사형과 이사형이 창에 찔려 죽은 것이다. 그래서 의화단은 산동에서 아예 자리잡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속속 북경, 천진, 하북 일대로 도망친다.
그렇다면, 서태후는 나중에 왜 생각을 바꾸어 의화단을 지지하게 되었을까?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시키려 했다. 그리고 단군왕(端郡王) 재의(載漪)의 아들을 황제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조치는 장지동(張之洞)등 양무파의 반대에 부닥쳤을 뿐아니라, 서방열강의 반대에도 부닥친다.
단왕은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보좌에 오를 수 없게 되자, 양무파와 서양인을 극도로 미워하게 된다. 그리하여, 청나라 통치집단내에 단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배외집단(排外集團)이 형성된다. 이들은 양무파와 서방열강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서태후의 원래 생각은 서방열강과 강화(講和)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왕 재의등은 이익에 눈이 멀어, 서방열강의 서태후를 핍박하여 광서제에게 권력을 돌려주라는 조회(照會)를 위조한다. 이것을 본 서태후는 진노한다: 내가 어찌 권력을 잃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서방에 선전포고흘 하게 된다.
다만, 청나라는 갑오청일전쟁이후, 국력, 군력이 모두 형편없었다. 의화단의 난을 진압할 수도 없었고, 서방열강에 군사행동을 취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의화간으로 서방열강에 항거하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하여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인류역사상 가장 미친 짓을 하게 된다. 그녀는 동시에 11개 국가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이 11개 국가는 모두 당시의 세계최강국들이다.
이렇게 되니, 의화단은 명을 받들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된다. 명분을 얻었다. 그리고 아들이 황위에 오르기 바랐던 단왕은 기회가 왔다고 여긴다. 그는 의화단을 이용하여 광서제와 양무파대신을 모조리 죽여버리려 한다. "일룡이호삼백양"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은 그가 내놓은 것이다. 그의 지시와 고무하에 수만의 의화단 폭민은 북경으로 몰려든다.
이렇게 하여 당시의 수도인 북경은 전체 의화단운동에서 '피해가 가장 극심한' 도시가 된다.
<경자국변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에서는 방화 약탈이 있었다. 불이 붙어 밤낮을 갔다....옛날에 원한이 있던 자는 교인으로 몰아서 일가족을 죽인다. 죽은 자가 십수만메 이른다. 살인방법은 칼과 창을 같이 써서 사지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영아로 한달이 되지 않은 자도 역사 잔혹하게 죽였다. 여인의 시신은 왕왕 유두를 잘라내고 음부에 상처를 입는다. 남녀노소가 슬퍼하는 모습이 갖가지여서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악취가 나서 하루종일 코를 막고 있어야 한다."
평민백성만 화를 입은 것이 아니라, 조정관리들 중에서도 양무에 관련된 사람 예를 들어 이부좌시랑 허경징(許景澄), 태상시경 원창(袁昶), 내각시독학사 연원(聯元), 호부상서 입산(立山), 병부상서 서용의(徐用儀)등이 모조리 목을 잘리고, 가산몰수당한다. 만일 서태후가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광서제까지도 의화단이 입궁하여 죽여버렸을 것이다.
당시의 북경성은 몸에서 서양물건이 하나만 나와도, 설사 그것이 서양종이일지언정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람은 의화간들이 "삼모자(三毛子)"라고 불렀다. 서양인은 "대모자(大毛子)"이고, 교인은 "이모자(二毛子)"이고, 서양물건을 쓰는 사람은 "삼모자"이다. 의화단은 대모자부터 십모자(十毛子)"까지 모조리 죽이겠다고 맹세한다.
왕대점(王大點)이라는 사람이 쓴 일기가 있다. 의화단이 북경에서 대거 살인을 저지를 때 그들이 거두어들인 서양물건은 없애버리지 않고 모조리 가져갔다.
예를 들어, 왕대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빙곡후통에서 의화단 권비두목이 항사조 사진관 장자청의 일가 3식구를 약탈하는데, 자전가, 화갑자(話匣子), 양물(洋物)등 물건이 적지 않았다. 모두 남횡가노단으로 보냈다."
빼앗은 이들 서양물건을 마지막에는 의화단 두목들에게 보내어 쓰게 했다는 것이다.
의화단은 북경에서 살인방화약탈등 나쁜 짓은 모두 했다. "노덕기(老德記)"서양약방등 서양상품을 파는 점포를 불태울 때, 북경남성에서 가장 번화한 대책란(大柵欄)상업지구의 1800여개 점포와 7000여개의 민간가옥이 불에 탄다. 그 불길이 흉맹하여, 높은 정양문의 성루에까지 화가 미치고 결국은 모조리 타서 무너진다.
이희성(李希聖)은 <경자국변기>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큰 불로 정양문 외에 4천여가가 불에 탔다. 경사의 부상이 모두 모여있는 곳이다. 수백년의 정화가 모조리 재가 된다. 성벽까지 이어졌고, 불길이 하늘로 솟아서 삼일동안 꺼지지 않았다.
세번째 참안: 산서태원참안
북경이 인간지옥으로 바뀌었는데, 전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단왕 재의는 수석대신이 된 후에 각지의 양인을 주살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여기에서 특별히 말해둘 것이 있다. 서태후가 미쳐가고 있을 때, 관리들 중에는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장지동, 이홍장과 같이 오랫동안 양무운동에 종사해온 봉강대리들이다. 그들은 연합하여 "동남호보(東南互保)"를 결성한다. 간단히 말해서, 동남의 몇 개 성은 연합하여, 서태후의 미친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독으로 서방열강과 상호불가침의 조약을 맺는다. 이렇게 하여 국가의 명맥을 유지한 것이다. 통일된 전제국가에서, 이것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았던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거동은 기실 공공연히 조정과 분열하고, 이미 항지(抗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서태후와 같이 미쳐간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산서(山西)의 육현(毓賢)이다.
학자 마용(馬勇)의 연구에 따르면, 선서는 예로부터 구미선교사들이 중요하게 활동하던 지역중 하나이다. 이탈리아의 천주교 선교사는 일찌기 만력48년(1620년)에 산서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한다. 그리고 자선사업도 한다. 명나라말기, 벨기에의 천주교 선교사는 태원으로 간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태원지격에는 이미 60여개의 교당이 있었다. 이들 교회조직은 거기에 적지 않은 수도원, 고아원, 교회학교, 교회병원 및 교회공묘등을 만들었다. 실사구시적으로 말해서, 서방선교사들은 거기에서 수십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일했고, 현지 민중에게 적지 않은 이로운 일들을 했다.
장지동이 산서순무로 있을 때, 교안국(敎案局)을 특별히 설치하여, 교회와 관련된 사무를 책임지고 처리했다. 그래서 산서지역의 백성과 교인의 관계는 비교적 좋았다. 산서의 선교사 및 교인들은 재난구제, 자선, 교육등을 하면서 좋은 이미지를 지녔다. 그리하여 산서인민이 존경하고, 백성과 교인이 화목하게 살았으며 거의 중대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아쉽게도 이 모든 것이 육현이 오면서,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육현은 극단적인 배외주의자이다. 서방문화를 적대시했다. 당시의 지방관리중에서도 유명했다.
"교당내에서 부녀자 211명을 수색해서 찾아냈다. 나이 많은 자가 수인이고, 5,6세에서 10여세 내지 2,3십세가 많았다...서양인은 모조리 붙ㅈ바아서, 쇠줄로 몪어서 모조리 처결했다. 도망친 자는 유일하게 한 서양여자가 유방이 잘린 후 도망쳤다. 성벽아래에 숨어 있다가 발견되었는데, 이미 죽어 있었다."
이는 육현이 공을 내세우기 위하여 스스로 쓴 상소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통계에 따르면, "산서교안(山西敎案)"은 전체 성 79개주,현을 석권한다. 중국교인과 그 가족자녀 1만여명이 도살되고, 교당, 병원 225개소가 불태워진다. 가옥 2만여간도 불태워진다. 각 성들 가운데 죽은 자가 가장 많았다. 그 결과는 심각했다.
필자는 자료를 찾으면서 마음이 침중해졌다.
특히 일부 친히 겪은 사람이 남긴 기록은 정말 촉목경심(觸目驚心)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태원의 한 점포를 하는 주인은 이렇게 기록했다:
교당이 불탈 때, 한 영국선교사가 그 안에서 도망쳐 나온다. 사람들에게 울면서 호소한다: "요 몇년간 나는 산서에서 오육만냥 은자를 쓰면서 수천명을 구했다. 설마 이것으로도 목숨을 바꿀 수 없단 말인가." 결국 그는 목이 잘린다.
또 한 영국부녀는 영아를 데리고 빠져나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나는 여기에서 병츨 치료하는데 몇년을 보냈다. 내가 목숨을 구해준 사람만 수백명이다. 우리 모자의 목숨을 살려달라." 말을 마치자, 의화단 권비들은 그녀모자를 불구덩이에 밀어넣는다. 그 영국여의사는 죽어라 빠져나오려 했지만, 여전히 밀려 들어갔고, 아들과 함께 불에 타 죽었다.
너무나 많다. 여기서 이런 글을 다시 쓰고 싶지 않다.
나중에 영국 침례교회 선교사 이제마태(李提摩太)등이 산서로 들어가서 재난구조를 한다. 의화단운동때 드러난 중국인의 우매, 무지와 잔혹함으로 이제마태는 태원에 대학을 만들겠다고 고집한다. 이를 통하여 민중을 계몽하고 교화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국,미국등 공사와 협상한 후 그는 이홍장에게 요구한다. 산서에 은50만냥의 벌금을 내도록 하라고, 이 자금으로 '산서성의 인민의 지식을 보급하는 학당을 열고 교육을 하여, 다시는 관료나 서민들이 혹세무민당하지 않도록 하자'고 한다.
이제마태와 잠춘훤(岑春煊)은 여러차례의 협상을 거쳐, 중서대학당(中西大學堂)이 다음해에 개설된다. 막 성립된 산서대학당과 합병하여, 전국에서 경사대학당, 북양대학당에 이어 세번째 대학이 된다.
중국이 현대문명사회로 나가는 것이 이런 방식을 통해서 열렸다니 정말 탄식을 금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정치,문화적인 측면에서 간단히 의화단운동으 배후의 진상을 분석해보기로 한다.
1. 권력다툼, 정치농간
만일 서태후가 발표한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일본,러시아,스페인,벨기에,네덜란드,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11개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서를 잃어보면 아마도 서태후가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비분강개한 문장에 감동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서태후도 좋고, 단왕도 좋고, 그들은 모두 권력때문에 모든 것을 걸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모든 전제통치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수중의 권력을 놓치는 것이다.
권력을 위하여, 수억인민을 그들의 전차에 납치하는 것도 감히 저지르고, 권력을 위하여라면 산하가 무너지고, 생령이 도탄에 빠지고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도 기꺼이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주의로 포장할 것이다. 그러나 기실 소위 적은 그저 백성을 우롱하고 선동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2. 하층민중, 우매잔인
의화단 성원의 절대다수는 최하층의 민중이다. 그들은 아마도 20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가장 우매한 무리일 것이다.
각지의 의화단 우두머리는 왕왕 직업없는 유민이거나 무산깡패이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아주 총명한 사람도 있다. 그들 자신은 무슨 도창불입을 믿지 않지만, 싸울 때는 모두 형제들을 선두에 서게 하지만, 일단 전리품이 생기면, 그것이 여자이건, 아니면 빼앗아온 서양물건이건 그들이 먼저 가진다.
이들 교활한 자들 외에, 대부분의 의화단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배신당하고도 그들을 위하여 돈을 헤아려주고, 바람이 어디로 불면 거기로 가는 전혀 사고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그들의 무지에 관한 사료를 지금 읽어보면 황당하기 그지없을 정도이다.
그들은 우매할 뿐아니라 잔인했다. 역사학자 장명(張鳴)의 연구에 따르면, 의화간이 가장 미워한 것은 중국여자신도들이었다. 여자교인들에 대하여는 더욱 원한을 품었다. 여자교인이 발견되기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가서 그녀를 도륙냈다. 산서태원교안에서 그들은 영아조차도 그냥 살려두지 않았다.
이렇게 우매하고 무지하며, 잔인하고 야만적인 저층민중은 당연히 나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최후는 또한 아주 가련하다. 통치자들은 그들을 이용할대로 이용한 후, 다시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결국 나타난 장면은 정부군과 서양군이 힘을 합쳐서 의화단을 도살하는 것이다.
오호 애재라
저명한 역사학자 진인각(陳寅珏) 선생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중국의 사람은 아랫사람은 멍청하고(下愚) 윗사람은 간사하다(上詐)"
나는 이 말이 중국의 상황을 가장 심각하고 가장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본다. 의화단운동에서 십년문혁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우'와 '상사'가 공모한 결과이다.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려면 둘 중 하나가 빠지면 안된다.
이런 일종의 '하우이상사'의 사회구조 속에서 지식인 혹은 문화엘리트들은 사회의 수호자로서 사회의 마지막 보루로서 어떻게 해야만 이런 비극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먼저 1900년의 엘리트들은 어떠했는지 보도록 하자.
3. 사신문화(士紳文化), 극단협애(極端狹隘)
조정에 있던 서동(徐桐)과 같은 대학사이건, 아니면 민간의 사신이건 그들이 보여준 것은 모두 극단적이고 협애한 문화의식이다. 주가하참안에서, 정부군을 이끌고 교인을 도살한 채씨형제 둘이 바로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의화단운동의 남상은 당시 사신계층이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의화단의 자료를 살펴보면, 각지에서 모두 사신들이 도처에서 백성을 선동하고, 서방문화를 배격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도처에서 강연하고, 대자보를 붙여서 서방문화를 욕하고 서양인을 욕했다.
예를 들어, 도처에서 서양인은 교당 내에서 어린라이의 눈알을 파낸다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는데, 유사한 글이 곳곳에 퍼진다. 무슨, "교회를 믿자는 것은 하늘을 독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신,불을 모시지 않으며 조상도 없다. 남자는 윤리가 없고, 여자는 절개가 없다. 서양인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다. 만일 못믿겠으면 자세히 보라. 서양인의 눈은 파란 색이다. 비가 내리지 않고 땅에 가뭄이 드는 것은 교회가 하늘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우이상사'는 중간의 이들 지식인들이 이렇게 멋모르고 날뛰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체 사회는 이성을 완전히 잃고 통제불가능한 상황이 오는 것이다. 비극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 사신이 당시의 문화엘리트들이 서방문화를 제대로 대면하지 못했던 것은 천조상국의 심리가 작용을 한 것 이외에 기실 이기심 때문이다.
새로운 문화의 도전으로 그들의 발언권이 도전받고, 그들의 사회지위가 도전받았기 때문이다. 서방문화가 들어오기 전에, 문화해석권이건 아니면 도덕재판권이건, 모두 그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방문화를 대할 때 일시에 어찌해야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당황하고 불안해 하면서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본능으로, 서방문화에 대하여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문화적 지위를 지키려는 속셈이다. 바로 그들의 이기심과 협애함으로 그들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사상은 전체국가, 전체민족에 거대한 재난을 가져오게 되었다.
역사가 오늘날까지 발전해오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전통문화와 현대문명의 관계를 처리할 것인가. 어떻게 서방문명을 대할 것인가.
아마도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답변과 견해를 내놓을 것이다. 다행히 일백년이래, 비록 부정적인 사례도 있지만, 예를 들어 의화단운동, 그래도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청말의 양무우동, 그리고 최근 수십년의 개혁개방. 경험이 있으면 교훈도 있다.
이들 역사를 정리해보면 우리는 아마도 상대적으로 정확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오늘의 우리는 최소한 한 가지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극단적 민족주의는 남을 해치고 자신을 채힌다. 나라를 해치고 민족을 해친다.
다만 유감스럽고 걱정스러운 점이라면 현재 일부 중국인들은 상처가 나으면 아픔을 잊는 것같다. 일부 양심없는 매체는 민중에 영합하여 극단적 민족주의 사조에 영합하여, 채씨형제, 서동의 옛 길을 다시 걸으려 한다.
사회에서, 인터넷에서, 각종 매체에서, 그들은 극단적 민족주의사상을 극력 선전한다. 심지어 학술의화단이 되어 한편으로 서방문화가 만든 현대문명을 누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방문화를 반대하고 깍아내린다.
이것은 또 뭐하는 짓인가. 정말 조그만치의 지혜도 늘지 않았단 말인가.
전철이 있는데, 지식인이 그것을 보지 못한단 말인가.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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