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정정(張晶晶)
100여년전의 청나라말기를 되돌아보면 비록 당시에 서풍이 이미 동점(東漸)하기 시작했지만, 여자들은 보편적으로 전족을 하고 "무재변시덕(無才便是德)"(재주가 없는 것이 덕이다)이라는 관념에 빠져 있어, 손을 내려뜨리고 남자들의 뒤에 서 있어야 했다.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것은 그야말로 전설중의 전설이다.
당시의 중국에서, 4명의 젊은 여자들이 대담하게 미국의 대학으로 가서 선진의학을 배우고,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나중에는 중국으로 돌아와서 조국에 보답한다.
우리는 그녀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김아주(金雅珠), 허금굉(許金訇), 강애덕(康愛德)과 석미옥(石美玉)이다. 그녀들은 근대중국 최초의 여자유학생들이었다.
최초의 여자유학생
1881년의 어느 날, 한 여객선이 동경에서 출발하여 뉴욕으로 가고 있었다. 승객중에는 검은 머리에 노란 피부를 지닌 얼굴이 청수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김아주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 17살이다.
김아주는 영파(寧波) 동전호(東錢湖) 가의 한령촌(韓嶺村)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2살반때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교회목사를 맡고 있던 부모는 연이어 세상을 떠난다. 그녀를 길러준 사람은 부친의 친구인 맥카시 박사와 그의 부인이었다. 맥카시는 미국인으로 1844년 중국으로 와서 전도와 의술을 행했다. 일찌기 미국주영파 초대영사를 지내기도 했다. 김아주는 맥카시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리하여 일어와 영어를 모두 배운다. 양녀가 총명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자 맥카시는 그녀를 미국으로 보내서 공부시키기로 생각한다. 그녀를 위하여 선택한 전공은 의학이었다.
바다위에서 몇주간 보낸 후 마침내 김아주는 미국에 도착한다. 그리고 유명한 뉴욕병원부속여자의과대학에서 공부한다. 이 학교의 유일한 중국유학생이었다. 졸업후에는 뉴욕과 플로리다 그리고 워싱턴의 병원에서 실습한다. 1888년말, 김아주는 중국으로 돌아온다. 복건 하문의 한 교회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1907년 그녀는 천진으로 가서 북양여의원(北洋女醫院)의 원장이 된다. 북양여의원은 중국최초의 공립 여성병원이다. 그녀의 주재하에 의원은 질서정연하게 운영되었고, 환자가 끊이지 않아서 천진의 유명병원이 된다.
의료과정에서 김아주는 국내의 부녀와 영아의 의료조건이 낙후된 것을 보고, 전문적인 의료인원을 배양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느낀다. 1908년 그녀는 원세개를 설득하여, 천진해관에서 2만냥을 받아 북양여의학당(北洋女醫學堂)을 만든다. 그녀는 교장이 된다. 이는 중국최초의 공립 간호사학교가 된다.
1934년 2월 김아주는 폐렴으로 협화의원에 입원한다. 3월, 이 걸출한 여성은 협화의원에서 사망하니, 향년 70세이다.
훈련을 잘받은 여의사
1884년 또 다른 몸매가 아담한 중국여자가 미국땅을 밟는다. 이 여자아니는 또 다른 통상항구도시 복주에서 왔다. 그녀의 이름은 허금굉이다. 허금굉은 먼저 육영여숙(毓英女塾)에서 공부했으나, 재미없는 과목에 만족하지 못하고 복주부녀의원에서 의술을 배운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동정심이 있었다. 병원원장은 그녀의 뜻과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위하여 미국의 부녀외국전도회와 연결시켜 그녀가 미국유학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당시 허금굉은 겨우 18살이었다. 영어도 몰랐다. 부모와 친지들은 모두 그녀가 멀리 떠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확고했고, 가족들과 이별하고 두 미국전도사를 따라 복주를 떠난다.
허금굉은 먼저 오하이오주의 감리교감독교회에서 만든 웨슬리안대학이었다. 나중에 필라델피아여자의과대학으로 옮겨간다.
1895년, 허금굉은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친지들은 모험정신에 충만했던 여자아이가 이제는 훈련을 제대로 받아 우아하고 세심한 여자의사가 되어서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바뀌지 않은 것은 그녀의 굳건한 성격과 남을 도우려는 품성이었다.
허금굉은 복주성교부유의원에서 의료를 행하며, 부녀와 아동을 치료한다. 나중에는 병원을 책임지기도 한다. 1899년, 그녀는 다시 복주 창산마크아이병원의 원장이 된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그녀가 여자인 것을 보고 그녀의 병원에서 진료받으려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허금굉이 많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고 금방 명성을 떨쳐 얼마후 병원은 인산인해가 된다.
1926년, 허금굉은 병원원장을 사직하고 남양으로 간다. 3년후 싱가포르에서 병사하니 향년 64세이다. 허금굉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운명을 깨버린 말
강애덕은 1873년 강서 구강의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다. 집안에 이미 딸이 다섯이나 있어서, 그녀는 이웃집안의 동양식(童養媳, 민며느리)으로 들어간다. 이웃집에서는 점쟁이를 불러 그녀의 운명을 점치게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점을 친 결과는 이 여자아이의 운명은 천구(天狗)를 범해서 혼인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웃집에서는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집안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한 서방선교사가 강애덕의 부모에게 건의한다. 그녀를 그가 가르치는 여선교사에게 거두게 해달라고. 이렇게 하여 미국선교사 호거여사는 당시 두 달된 여자아이를 양녀로 거두게 된다.
9살때, 어린 강애덕은 호거여사를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간다. 거기서 영어를 배운다. 나중에 그녀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서, 호거 여사를 따라 중경에서 2년간 생활한다.
1892년 호거여사는 3명의 사내아이와 2명의 여자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간다. 이 두 명의 여자아이는 바로 강애덕과 그녀의 구강교회여숙에서 공부할 때 같은반학생인 석미옥이다. 그녀들 둘은 순조롭게 입학시험을 통과하여 미시간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1896년 강애덕과 석미옥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다. 구강부두에서 땅을 밟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3일후, 그녀들은 현지 병원의 요청에 따라 몇 건의 수술을 하는데,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일시에 명성을 떨친다. 그녀들이 일하던 병원에서 다음해 말까지 모두 5491명이 환자를 치료하고, 그녀들은 모든 수입을 교회재정부서에 헌금한다. 그리고 4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번 돈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비용을 보상한다.
1907년, 34살의 강애덕은 다시 해외로 공부하러 떠난다. 4년후 남창으로 돌아와서 계속 의료업에 종사하다가 1931년에 사망한다.
모든 사랑을 환자에게
강애덕과 나란히 미국유학을 떠난 석미옥은 호북 황해에서 태어났고, 강서 구강에서 자랐다. 부친은 목사이고, 모친은 교회여숙의 교장이었다. 석미옥은 그들의 장녀였다. 전족을 하지 않아서 동네에서 유명했다.
8살되던 해, 석미옥은 부친이 보낸 교회여숙에서 공부한다. 거기서 10년을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강애덕과 평생친구가 된다. 나중에 같이 미국으로 유학가고, 같이 귀국하여 의료를 행한다. 그녀들은 뛰어난 의술로 강서백성들의 신임을 얻는다.
석미옥은 부인과 전문의였다. 그녀의 명성을 듣고 의술을 배우려 전국각지에서 학생들이 찾아왔다. 베트남, 버마, 싱가포르와 하와이에서까지 찾아왔다.
1928년 산동에서 대재난이 닥치고 많은 난민들이 상해로 몰려든다. 하루는 석미옥이 전화를 받는데, 300명의 고아가 곧 상해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도를 한 후에 기차역에 나가서 100명의 고아를 받고, 그들을 거두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여러가지 곤란을 극복하면서 고아원을 세운다. 그리고 부설소학교와 중학교를 세운다. 이들 고아들이 자란후 그녀는 다시 그들을 대학에 보내어 공부시킨다.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녀를 따라 유학을 다녀와서 조국에 봉사한다.
1954년 12월 30일 석미옥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향년 8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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