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유신파를 가장 먼저 배신한 사람은 강유위의 동생 강광인(康廣仁)이다.

중은우시 2018. 8. 2. 18:44

글: 당의문(唐宜雯)


유신변법의 실패원인을 얘기할 때 지금까지 원세개가 담사동 및 유신파를 배신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강유위가 조작해낸 말이다. 양계초조차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일 정말 원세개가 그랬다면, 민국이후, 양계초가 어찌 귀국하여 원세개를 위해서 일했겠는가? 원세개가 아니라면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강유위의 동생인 강광인이다.


강유위는 국외로 도망친 후에 자주 자기가 광서제와 관계가 아주 좋았다고 떠벌이고 다녔다. 실제로 광서제는 그저 강유위를 1번 만나봤을 뿐이다. 그리고 광서제 본인은 강유위라는 자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강유위는 기껏 육품의 하급관리였다. 그가 국외로 도망친 후, 담사동, 양예등의 공적을 모두 자기가 한 것으로 떠벌였다. 청나라 내부에서 완고파이건 양무파이건 모두 강유위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이홍장, 장지동, 유곤일등이 보기에 강유위는 그저 공리공담을 하지 실제 능력은 없는 문인일 뿐이었다. 


9월 19일, 광서제는 일본의 전수상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할 예정이었다. 서태후는 이 적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다. 다음 날, 서태후는 강유위를 체포하라고 명령한다. 기실 그녀의 본뜻은 강유위라는 교란자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같은 날 강유위는 이미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고 있었다. 강유위를 체포하러 갔을 때는 강유위가 이미 떠났고, 그의 동생 강광인만 있었다. 그리하여 강광인을 체포한다. 9월 21일 아핌,서태후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자금성에서 이화원으로 돌아갔다. 가는 동안 아주 여유있었다. 다만 이날 오후에 일이 터진다. 심문을 하니 강광인이 흥분하여 털어놓았다. 아마도 황제가 뒤를 받쳐주니 겁날 것이 없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유신파의 비밀을 모조리 털어놓는다: 원래 강유위, 담사동등은 쿠데타를 일으켜, 서태후를 죽이려고 했다고 말한 것이다.


서태후는 지노하여 이들 유신파들 중 활발한 분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한다. 즉 나중의 무술육군자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들 6명 중에서 4명만이 변법파라고 할 수 있다. 강광인을 절대 아니다. 정변발생후, 친일파인 양계초는 일본측의 도움하에 일본으로 도망친다. 친영파인 강유위는 막 상해에 도착했는데, 영국인이 그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통지한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서태후로 하여금 외국인은 모두 자신을 반대한다고 여기게 만든다. 나중에 그녀의 각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모두 유신변법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강유위가 해외로 도망친 후,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하여 자신의 동생이 잘못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원세개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강유위는 또한 의대조를 한 부 위조한다. 다만 나중에 대조해보니, 아예 청나라에서 성지에 쓰는 고유양식이 아니었다.


담사동이 원세개에게 쿠데타를 종용한 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원세개가 영록에게 이 일을 보고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일은 강광인이 진술을 하고 난 이후의 일이다. 즉, 원세개가 보고하기도 전에, 서태후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세개는 왜 영록에게 비밀리에 이를 보고했을까? 여기에는 3가지 주요한 원인이 있다.


첫째는 병력문제이다. 원세개의 신군은 겨우 수천명이다. 그리고 거리가 북경에서 아주 먼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경 주위에는 송경(宋慶), 섭사성(聶士成)등이 지휘하는 수만의 대군이 있었다. 원세개가 설사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둘째는 원세개가 유신파를 좋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세개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조선에 있는 동안 개혁을 해보았고, 그는 분명하게 유신파의 개혁은 성공하기 힘들고 많은 정책은 아예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셋째는 원세개의 사심이다. 원세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승진을 바랐다. 어쨌든 그는 포부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