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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막수유(莫須有)"에서 "장무동(將無同)"까지...

by 중은우시 2018. 6. 18.

글: 영성비양(鈴聲飛揚)


아마도 여러분들은 "막수유"라는 단어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악비(岳飛)가 진회(秦檜)에게 모함당한 이야기이다.


송고종 소흥11년(1141년), 악비는 "일일십이금자패(一日十二金字牌)"로 임안으로 불러들여진다. 진회는 간의대부 만사설(萬俟卨)로 하여금 악비를 모함하게 한다. 모함에 대하여 악비는 웃으며 말한다. "하늘과 땅이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皇天后土, 可表此心)" 그리고 등에 새겨넣은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글자를 보여주며 무고함을 증명하려 한다. 악비가 감옥에 있을 때, 그가 결백하고 충성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한세충(韓世忠)이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하여 진회를 찾아가서 추궁한다. 그때 진회는 이렇게 말한다: "악비의 아들 악운이 장헌에게 쓴 서신에서 비록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일이 '막수유(莫須有)'하단 말인가?" 악비가 하옥된지 2달후에 옥중에서 사망한다. 그리하여 한세충은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한다. "막수유라는 세 글자로 어찌 천하인들을 납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송효종때 악비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예를 다하여 다시 매장하며, 돈 백만을 하사하고, 그의 후손을 찾아서 관직을 준다. 그리고 악(鄂)에 묘를 세우고, 충열(忠烈)이라 한다. 순희6년, 시호를 무목(武穆)이라 한다. 가정4년, 악왕에 추봉한다.


중학교때 평서 <악비전>을 읽어본 바 있다. 비록 평서이기는 하지만, 모두 이 역사에 기반을 둔 것이어서 이 이야기는 대강 알고 있다. 2002년 처음 항주의 악왕묘를 찾았고, 악비묘에 절을 했다. 묘앞에 진회 부부가 무릎꿇고 있는 모습이 아주 인상깊었다. 현재 나는 소흥에 거주하고 있다. 이곳은 일찌기 송고종때 이곳에서 3년동안 정무를 보며 수도로 삼은 적이 있다. 송고종은 사망후에 풍경이 아름다운 회계산 자락에 묻혔다. 남송은 이 도시에 많은 기억을 남겼고, 나같은 외지인들도 잘 느낄 수 있다. 항주에 대하여 매달 성회사회의에 참가하면서, 항주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항주를 좋아하게 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가 있다면 악왕묘는 반드시 찾아가봐야 한다.


현대의 말로 하자면, '막수'는 '설마 아니란 말인가(難道不 혹은 難道沒)이다." '막수유'라는 세 글자는 '설마 그렇지 않단 말인가?'라는 것이다.


위에 이 이야기를 한 것은 그저 다른 단어 즉 '장무동'에 대하여 얘기하기 위하여 꺼낸 말이다.


<자치통감> 제82권 진기사(晋紀四)의 기록에 따르면, 진혜제 원강7년의 구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왕융(王戎)을 사도(司徒)로 임명한다. 이 왕사도는 바로 죽림칠현(竹林七賢)중 한 명인 왕융이다. 그런데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실질적인 일은 하지도 않고, 매일 자기의 이익만 생각했다. 심한 사례로는 집안에 오얏이 있는데, 맛이 좋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 씨를 가져가서 심을까봐 우려하여, 매번 씨를 파내었다고 할 정도이다. 그가 얻은 것은 완전히 '허명'이다.


하루는 같은 죽림칠현의 한 명인 완함(阮咸)의 아들 완첨(阮瞻)이 왕융을 찾아왔다. 왕융은 완첨에게 한가지 문제를 낸다: "성인은 명교(名敎)를 중시하고, 노장(老莊, 노자장자)은 자연(自然)을 중시했다(聖人貴名敎, 老莊明自然), 그 뜻은 같을까 다를까?" 이 문제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기실 서진시대에 '명교'와 '자연'은 양대사상유파이다. 유가는 강상명교를 중시했고, '유위(有爲)로 명교를 드높일 것을 주장했다. 도가는 인성자연을 중시하고, '무위(無爲)'로 자연에 순응할 것을 주장했다. 청화대학 역사학과의 왕효의(王曉毅)는 이에 대하여 깊이있게 분석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왕융은 일생동안 도가의 '개성자유'와 유가의 '강상예교'간에서 고민했다. 한편으로 그는 관료사회에 나가서, 공명이록(功名利祿)을 쫓아서, 삼공의 고위직에 오르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을 추구하는 마음이 강하였다. 양자의 관계가 어떤지는 그를 고민하게 만드는 난제였다. 마침 죽림칠현의 한 명인 완함의 아들 완첨이 찾아오자, 왕융은 이 의미깊은 시대적 과제를 던진 것이다.


문제도 잘 냈지만, 대답도 멋졌다: "장무동(將無同)!"


무슨 뜻인가?


'장무동'이라는 이 말은 297년에 한 것인데, 후인들이 열심히 연구했고, 역대에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대체로 세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장무/동"으로 잘라서 해석하는 것인데, 여기서 '장무'는 발어사(發語詞)로 의미가 없다. '동'은 '같다'는 뜻이니, 그 의미는 명교와 자연은 같다는 것이 된다.


둘째는 "장/무동"으로 잘라서 해석하는 것인데, 여기서 '장'은 발어사로 아무런 뜻이 없다. '무동'은 '다르다'는 뜻이니, 그 의미는 명교와 자연은 다르다는 것이 된다.


셋째는 '장/무/동"으로 모두 잘라서 해석하는 것인데, 그 뜻은 명교와 자연의 양자의 공통된 본체는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3가지로 잘라서 해석하면 세 가지 뜻이 나온다: 상동(相同), 부동(不同), 동무(同無).


현대에는 노신이 <중국소설의 역사의 변천>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만 장무동(將毋同)이라는 세 글자를 도대체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다르다'는 뜻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어찌 같지 않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결국 하나로 두 가지 뜻을 나타내는 아리까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숙상은 <어문잡기>에서 '장무'는 위진시대에 자주 쓰던 말인데, '설마....이겠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추측이기는 하지만 긍정에 가까운 단어라고 한다. '장무동'이라는 것은 '설마 서로 다른 것이겠습니까'라는 정도의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한 마디 '막수유'로 진회는 조구를 대신하여 민족영웅 악비를 죽였고,

한 마디 '장무동'은 왕융의 혜안으로 완첨을 꿰뚫어 보았다. 칠현의 뒤에는 완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