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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역사상 이름난 32명의 공주중에서 누가 가장 미인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18. 1. 31.

글: 이자지(李子遲)


중국은 수천년의 유구한 문명역사를 지니고 있다. 수백개에 이르는 역대왕조에는 수천에 이르는 황제와 국왕이 있었고, 수만에 이르는 제왕의 딸 즉 공주가 있었다. 그녀들은 금지옥엽이라 부를 만하다. 제왕의 딸로서 온나라의 상하, 백성들 중에서 가장 찬란한 진주이다. 일생동안 천자국색으로 영화부귀를 누리며 누구나 부러워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공주들 중에서 유명한 공주는 누가 있을까?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예쁜 공주는 누구였을까?


하나, 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원고시대의 성군인 요(堯)임금 이방훈(伊放勛)의 두 딸이다. 모두 순(舜)임금 요중화(姚重華)에게 시집을 간다. 그들은 함께 창오산(蒼梧山)으로 남순(南巡)을 갔고, 순임금이 병사한 후, 그녀 둘이 울어서 그 눈물은 호남 동정호의 상비반죽(湘妃班竹)이 된다. 모주석의 시 중에서 "구의산상백운비(九嶷山上白雲飛), 제자승풍하취미(帝子乘風下翠微)"는 바로 이를 가리킨다.


셋, 하희(夏姬). 춘추시대 정목공(鄭穆公)의 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미모였으나, 사생활은 문란했다. 그녀는 우선 친오빠인 공자만(公子蠻)과 관계를 맺고 나중에 진(陳)나라의 대부 하어숙(夏御叔)에게 시집간다. 그리고 아들 하징서(夏徵舒)를 낳는다. 어숙이 병사한 후에는 진나라의 국군 진령공(陳靈公)과 사통하며 동시에 조정대신 공손녕(公孫寧), 의행보(儀行父)와 몰래 만난다. 하징서는 진령공을 쏘아죽이고, 자신도 이 기회에 진나라를 토벌하러온 초나라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희는 다시 초나라의 초장왕(楚莊王)가 공자반(公子反)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대상이 된다. 이때 무신(巫臣)이 하희는 불길한 여자라고 말하여 두 사람을 포기하게 한다. 초장왕을 그녀를 연윤양로(連尹襄老)에게 하사한다. 얼마후 연윤양로는 죽고, 그녀는 다시 연윤양로의 아들 흑요(黑腰)와 사통한다. 그후 하희를 흠모하던 굴무(屈巫)의 계략에 따라 하희는 정나라로 되돌아가고, 다시 굴무는 사신으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를 데리고 제나라 진나라로 도망가서 산다. 이에 따라 초나라에 남은 가족은 공자반으로부터 멸문의 보복을 받는다.


넷, 다섯. 춘추시대 제희공(齊僖公)의 두 딸. 언니 선강공주(宣姜公主)는 위선공(衛宣公)에게 시집가고, 동생 문강공주(文姜公主)는 노항공(魯恒公)에게 시집간다. 이 두 미녀공주는 일생동안 곡절이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선강은 원래 젊고 영준한 태자 희급(姬及)에게 시집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부친인 위선공이 그녀를 보고는 자신이 취하여 일련의 비극을 낳는다. 동생 문강은 오랫동안 오빠인 제양공(齊襄公)과 난륜관계였고, 기형적인 사랑은 아주 뜨거웠다.


여섯, 관도장공주(館陶長公主). 즉 유표(劉嫖)이다. 한문제 유항과 두황후 사이의 외동딸이다. 한경제 유계의 유일한 동모 누나이기도 하다. 한무제 유철의 고모이면서 장모이다. 즉 황후 진아교(陳阿嬌)의 모친이다. 그녀의 남편은 당읍후(堂邑侯) 진오(陳午)이다.


일곱, 김속(金俗) 황제의 소생이 아닌 공주이다. 한무제의 모친인 왕지(王娡)는 원래 가난뱅이 김왕손(金王孫)에게 시집을 가서 딸 김속을 낳았다. 왕지는 나중에 태자 유계(劉啓)에게 시집을 가는데, 그가 바로 한경제이다. 그리고 한경제와의 사이에 유철(劉徹) 즉 한무제를 낳는다. 그는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누나인 김속을 수성군(修成君)에 봉했고, 그녀의 딸도 회남왕비(淮南王妃)가 된다.


여덟, 평양공주(平陽公主). 한무제 유철과 가장 친했던 누나이다. 한경제와 왕지 사이의 딸이다. 그러나 일생의 운명은 기구했다.


아홉, 오소공주(烏孫公主). 원래 이름은 유세군(劉細君)이다.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이다. 한나라때 화친공주의 최초이다. 한무제는 그녀를 오손왕 곤막렵교미(昆莫獵驕靡)에게 시집보낸다. 나중에는 그의 손자인 잠추(岑陬)에게 시집가고, 우울하게 일찍 죽는다.


열, 해우공주(解憂公主). 초왕(楚王) 유무(劉戊)의 딸이다. 한무제에 의하여 공주신분으로 오손왕 잠추에게 시집보내다. 나중에 다시 잠추의 당제인 옹귀미(翁歸靡), 잠추의 아들 니미(泥靡)에게 시집간다. 국군, 오아공, 장수, 공주 및 왕후 여러 명을 낳는다. 그리하여 "오손국모(烏孫國母)"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는다.


열하나, 서한 동한 사이의 왕망(王莾)의 딸. 부친에 의하여 강제로 서한말기의 어린황제 유기자(劉箕子)에게 시집간다. 그리하여 황후가 되나 부친이 어린황제를 독살하여 황위를 찬탈하고 신왕조를 세운다. 반란군이 쳐들어오자 이 여자는 성격이 굳세서, 불을 질러 자살한다. 후인들은 그녀를 존경하여 "효평황후(孝平皇后)"라 불렀다.


열둘, 산음공주(山陰公主) 유초옥(劉楚玉). 남북조시대 송(宋)의 효무제(孝武帝) 유준(劉駿)의 딸이다. 역사상 가장 음란했던 공주로 유명하다. 그녀는 유명한 미남자 하집(何戢)에게 시집갔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인 동생 유자업(劉子業)과 난륜일 뿐아니라, 미남인 고모부 저연(褚淵)도 탐했다. 그리고 황제인 동생에게 30명의 젊고 잘생긴 남자를 면수(面首, 남총)로 얻어낸다.


열셋, 낙창공주(樂昌公主). 남북조시기 진(陳)나라의 망국지군 진숙보(陳叔寶)의 여동생. 그녀는 스스로 강남재자 서덕언(徐德言)을 골라서 시집간다. 두 사람은 혼인 후에 서로 사랑이 깊었다. 나중에 수나라군대가 경성을 공격하자, 부부가 흩어지게 된다. 각자 절반으로 쪼갠 거울을 갖고 헤어진다. 용모와 재주를 모두 갖춘 낙창공주는 수나라의 권신 양소(楊素)의 총희(寵姬)가 되고, 반쪽 거울을 가지고 힘들게 서덕언을 찾아낸다. 양소는 그들 부부를 다시 만나서 살게 해준다. 이리하여 "파경중원(破鏡重圓)"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긴다.


열넷, 대의공주(大義公主). 북주(北周) 조왕(趙王) 우문초(宇文招)의 딸이다. 재색을 겸비했고, 시가에 능했다. 나중에 돌궐 사발략(沙鉢略)칸에게 시집간다. 북주가 양견에 멸망한 후, 수문제는 그녀에게 양씨성을 내리고 여전히 공주로 대우한다. 그녀를 시를 써서 전왕조를 추억했다가, 수문제의 분노를 산다. 그리하여 칸을 압박하여 그녀를 죽이게 한다.


열다섯, 평양공주(平陽公主). 당고조 이연의 셋째딸. 당태종 이세민의 여동생. 남편은 시소(柴紹). 고대에 보기 드문 건괵장군(巾幗將軍)이다. 용기도 있고 모략도 있어 풍운을 질타했다. 당왕조를 건립하는데 큰 공훈을 세운다. 지금의 산서성 "낭자관(娘子關)"은 바로 그녀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열여섯, 문성공주(文成公主). 당왕조때 모 종실의 딸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공주로 봉하고, 천리먼 서장의 토번수령 송찬간포(松贊干布)에게 화친으로 시집보낸다. 부부는 서로 사랑했고 서장의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운다. 그녀와 송찬간포는 라싸의 포달락궁에 살았고, 대소소사(大小昭寺)를 세운다.


열일곱,장락공주(長樂公主). 본명은 이여질(李麗質)이다. 당태종의 적장녀이다. 장손황후 소생이므로 당태종이 특별히 아꼈다. 나중에 종정소경(宗正少卿) 장손충(長孫沖)에게 시집간다. 그는 제국공 장손무기의 적장자이다. 부부 둘은 사촌간이었다. 다만 23세에 병사하니, 당태종이 애통해 마지 않았다.


열여덟, 고양공주(高陽公主). 당태종 이세민의 딸이다. 용모가 예뻤고, 오만하고 제맘대로 하였다. 성격은 개방적이었다. 일찌기 명신 방현령(房玄齡)의 아들인 방유애(房遺愛)에게 시집간다. 나중에 삼장법사의 제자인 변기(辯機)와 사통한다. 변기는 당태종이 요참형으로 죽인다. 고양공주는 다시 다른 승려들과 사통한다. 당고종 이치가 즉위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고양공주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당한다.


열아홉, 진양공주(晋陽公主). 당태종 이세민의 딸이다. 모친은 장손황후이다. 성격은 온유하고 내성적이었다. 다만 몸이 약했다. 12살때 병사한다.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서 "소재녀(小才女)"로 불리웠다.


스물, 태평공주(太平公主) 당고종 이치와 일대여황 무측천 사이의 딸. 그녀는 교만하고 음란했다. 그녀는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며 거의 천하를 가졌다. 일찌기 모친처럼 황제에 오르겠다는 망상도 한다. 조가 이융기와 다투었어나 실패하여 결국 당현종 이융기에게 사사당한다.


스물하나, 금성공주(金城公主). 본명은 이노노(李奴奴)이다. 당중종 이현의 양녀이고, 생부는 빈왕(邠王) 이수례(李守禮)이다. 나중에 화친으로 서장의 토번찬보 척대주단(尺帶珠丹)에게 시집간다. 그녀는 당나라와 토번의 교류에 어느 정도 공헌을 한다. 문성공주가 서장으로 간 후에 당나라와 토번 사이에 맺은 화친연맹을 공고해 한다. 그러나 그녀 본인의 운명은 기구했고, 아주 불행했다.


스물둘. 영태공주(永泰公主) 이선혜(李仙蕙). 당중종 이현의 딸이고, 무측천의 손녀이다. 남편은 무연기(武延基)이다. 운명은 비참했다. 나이 겨우 17살때 요절한다. 사인은 수수께끼이다. 일설에 따르면 무측천이 독살했거나 처형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난산으로 죽었다고 한다. 어쨌든 수수께끼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사후에 묘지에 "릉(陵)"으로 명명된 공주이다. 원래 "릉"은 황제의 묘에만 쓸 수가 있다.


스물셋, 안락공주(安樂公主). 당중종의 막내딸. 안락공주에 대하여는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한다.


스물넷, 승평공주(昇平公主) 당대종(唐代宗) 이예(李豫)의 딸.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의 아들 곽애(郭曖)에게 시집간다. 나중에 희곡 <타금지(打金枝)>의 여주인공으로 유명해진다. 일생동안 성취는 아주 컸다. 사망한 후에는 제국소의공주로 칭해진다.


스물다섯, 동창공주(同昌公主). 당의종(唐懿宗) 이최(李漼)와 곽숙비(郭淑妃)사이의 딸. 신과진사 위보형(韋保衡)에게 시집간다. 동창공주는 용모도 예쁘고, 온유하고 단정하며 부모를 잘 모시고, 다재다능했다. 그래서 당의종의 총애를 많이 받는다. 당의종은 천하의 모든 재물을 그녀에게 주려고 한다. 맛있는 것이나 좋은 것이 있으면 모두 그녀에게 보냈다. 아쉽게도 어린 나이로 요절한다. 위보형은 마음이 좁은 소인배였다. 이 기회를 빌어 여러 어의와 대신들을 모함하나, 자신도 선종(善終)하지 못하고 해남으로 유배를 가는데, 가는 도중에 사사당한다.


스물여섯, 복경공주(福慶公主). 북송의 송철종과 사척 낙산의 맹씨황후 사이의 딸이다. 비록 어린 나이로 요절하지만, 그녀의 모친 맹황후는 일생동안 풍우를 거치지만 놀랍게도 선종한다. 그녀는 딸이 항상 자신을 보우한다고 생각했다.


스물일곱, 영국공주(寧國公主). 명태조 주원장의 딸이다. 여남후 매사조(梅思祖)의 종자(從子) 매은(梅殷)에게 시집간다. 부부는 서로를 아꼈고, 조카 건문제 주윤문의 존중을 받는다. 나중에 오빠인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키고, 부마인 매은과 잘 맞지 않아서, 주체는 사람을 보내 그를 물속에 집어넣어 익사시킨다.


스물여덟, 장평공주(長平公主) 본명은 주휘착(朱徽娖). 김용 소설에 나오는 아구(阿九)이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주유검의 딸이다. 나라가 망하면서 부친의 칼에 팔 하나를 잃는다. 전설에 따르면 나중에 출가하여 독비신니(獨譬神尼)가 되었다고 한다.


스물아홉, 화석장공주(和碩長公主). 청나라초기의 홍타이시 청태종의 막내딸. 순치제의 여동생. 강희제의 고모. 김용소설에서는 강희제의 동생인 장난을 잘치고 성격이 마음대로인 건녕공주(建寧公主)로 나온다. 그녀는 오삼계의 아들인 오응웅(吳應熊)에게 시집간다. 소설에서는 나중에 위소보에게 가는 것으로 나온다.


서른,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제의 열째딸. 생모는 순비(淳妃)이다. 총명하고 영리했다. 나중에 권신 화신(和珅)이 독자인 풍신은덕(豊紳殷德)에게 시집간다. 처음에 부부는 금슬이 좋았다. 건륭이 죽자 가경제는 화신의 온집안을 몰수한다. 고륜화효공주는 가경과는 오누이의 정이 깊어서 부부는 처형당하지 안흔다. 다만 풍신은덕은 고륜화효공주에 불충했고, 나중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구금되었다가 일찌감치 병사한다.


서른하나, 서른둘. 북경의 서쪽교외에 유명한 곳인 "공주분(公主墳)"의 주인이다. 경요(瓊瑤)의 TV드라마 <환주거거>가 인기를 끌면서 여러가지 설이 난무한다. 일설에는 건륭제의 의녀라고 하고, 일설에는 김태(金泰)의 처라고 하고, 일설에는 한인기녀(奇女)로 효장황태후의 양녀인 공사정(孔四貞)이라고도 한다. 사실은 청인종 가경제의 두 딸이다. 즉 건륭제의 손녀이다. 장경화석공주와 장정고륜공주이다.


이들 공주가운데 도대체 누가 가장 예뻤을까? 만일 단 1명만 골라야 한다면, 필자는 당나라의 안락공주를 고르겠다. 어쨌든 이 32명의 유명한 공주들 가운데, 당나라때의 공주들이 가장 많아서 11명에 이른다. 이당황실의 여자들은 모두 예뻤다. 그리고 안락공주는 그 중에서도 가장 예쁜 공주였다.


안락공주(684-710), 본명은 이과아(李裹兒)이고, 당중종 이현의 딸이며, 황후 위씨(韋氏) 소생이다. "대당제일미인"이라고 불리웠다.


그녀가 출생했을 때는 마침 부친 이현이 조모 부측천에게 폐위되어 호주 방주(지금의 방현)으로 유배가는 도중이었다. 위씨는 유배가는 도중에 분만한다. 당시 상황이 어려워서 급한 가운데 옷을 벗어서 강보로 삼는다. 그래서 아명을 "과아"라고 지었다.


안락공주는 먼저 무삼사(武三思)의 아들인 무숭훈(武崇訓)에게 시집간다. 나중에 다시 무승사(武承嗣)의 아들인 무연수(武延秀)에게 시집간다. 모두 조모 무측천의 무씨집안 사촌형제들이다. 


당중종의 통치시기에 그녀는 개부설관(開府設官)하여 조정에 간여한다. 그리고 관직을 매매한다. 재상이하의 관리들이 그녀에게서 많이 나왔다. 그녀는 권력욕이 특별히 강했고, 성격이 제맘대로였다. 일찌기 부친 당중종에게 자신을 황태녀(皇太女)로 삼아달라는 요구까지 했으나, 부친에게 거절당한다. 그녀는 욕심이 끝이 없었고, 생활은 아주 사치스러웠다. 그래서 토목공사를 대거 벌이고 무수한 민간의 논밭과 집을 빼앗는다.


710년, 당중종 이현이 사망한다(일설에는 안락공주가 독살했다고 한다), 그후 당예종의 아들인 이융기(안락공주의 당제)가 정변을 일으켜 황제에 오르니 그가 당현종이다. 그리고 안락공주를 주살한다.  


안락공주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신당서>의 기록을 보면 이러하다: "주수변민(姝秀辯敏), 후우애지(后尤愛之)"(예쁘고 말을 잘해서 황후가 더욱 사랑했다), "제복위(帝復位), 광염동천하(光艶動天下), 후왕병신다출기문(侯王柄臣多出其門)" (황제가 복위하자, 그녀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천하를 흔들어다. 왕,후,신하들이 그녀의 문하에서 많이 나온다) 이과아는 나이 겨우 13살때 미녀로 유명했다. 자색도 뛰어나지만 총명하고 영리했다. 이현과 위후는 그녀를 아주 총애해서, 어려서부터 그녀가 하고 싶다고 하면 뭐든지 허락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기마음대로 하고, 분수를 지키지 않는 성격과 태도가 길려진다.


안락공주는 당시에 여러가지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예쁜 공주, 태어날 때 가장 힘들었던 공주, 가장 야심이 큰 공주, 가장 총애받는 공주, 그리고 가장 불효한 공주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