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냉포역사(冷砲歷史)
소그드인(粟特人)은 중앙아시아 트랜스옥사니아(중국명 河中)등지의 이란어계통 민족이다. 그들은 처음에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무역네트워크를 확장했고, 전성기때는 그들의 발길이 유라시아대륙에 모두 미쳤다. 중세기초기의 <그리스사잔권>에는 소그드 대상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568년, 상인 마니야허(摩尼亞赫)는 비단을 중국에서 돌궐칸의 왕정까지 운송했고, 그 후에 그는 다시 스덴미(實點密)칸을 설득하여 지지를 받아, 외교사절단의 명의로 남은 비단을 비단틴으로 운송해서 이로 인해 이익을 크게 얻었다.
투루판에서 출토된 <고창내장주득칭가전장(高昌內藏奏得稱價錢帳)>에는 소그드상인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문서에 기록된 35건의 거래에는 거의 모두 소그드인이 참여한다. 이를 보면 그들은 비단길무역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외에 고창국(高昌國)내의 세수와 거래는 모두 사용가치가 비교적 높은 사산은화 혹은 비잔틴금화를 사용했고, 가치가 비교적 낮은 중국동전은 사용하지 않았다.1957년, 신강 우챠현(烏恰縣)의 고고발굴에서 당시 거래에 쓰이는 수백매의 사산은화와 16개의 금조(金條)를 발굴한다.
소그드인이 중국에서 가져간 화물은 주로 생사(生絲)였다. 그들을 통해서 중국에 수입된 화물은 더욱 다양하다. 그리하여 당시 중국사회의 모습에 큰 영향을 준다.
복식방면: 각종 호복(胡服), 호모(胡帽)가 한,위의 전통적인 복식을 대체한다. 번령(飜領), 대금(對襟), 착수(窄袖)등 새로운 스타일이 벽화, 도용(陶俑)에서 반복하여 나타난다. 이를 통해 서역복식이 중원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그외에 당나라때 출토된 직금(織錦)잔편에서는 적지 않은 사산의 꽃무늬가 나타난다. 이는 페르시아비단, 소그드비단등 중국생사를 이용하여 재가공한 제품이 당나라로 역수입된 후에 널리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소그드인이 독점한 사치품은 바로 보석이다. 당시에 진귀한 보석을 가장 잘 감별하는 상인으로서, 소그드인은 그들의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이익을 크게 취했다. 이 영향을 받아, 민간전설에는 대량의 소그드인과 진귀한 보석에 관한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송때 책으로 만들어진 <태평광기(太平廣記)>에는 이런 전설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장안에 아들도 딸 도 없으면서 전병을 팔아서 생활하는 소그드상인이 있었다. 그가 병들었을 때 한 거인(擧人)의 보살핌을 받는다. 이 상인은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거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완쪽 팔 안에는 가치가 상당한 보석이 숨겨져 있으니, 그가 죽은 후에 끄집어내서 큰 돈을 버시라고. 상인이 죽은 후, 거인이 과연 그의 왼팔 속에서 보석을 찾아낸다. 그리서 시장에서 수십만전에 팔았다.
이외에 소그드인은 각종 향료, 식물 및 명마등 희귀한 동물도 가져왔다. 예를 들어, 당현종은 일찌기 6필의 페이르간나에서 온 한혈마(汗血馬)를 얻는데, 소그드말의 "질발(叱拔, 네발달린 동물이라는 뜻임)"을 빌어, "홍질발", "자질발"등등으로 이름을 붙인다.
소그드인의 무역네트워크가 완비되면서, 중국에도 점차 소그드인 집단거주지역이 나타난다. 북조후기, 정부는 "살보(薩保)"라는 직위를 두어서 그들을 관리했다.
"살보"라는 단어의 원래 뜻은 '상단의 두령'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정교합일의 직위가 되어 집단거주지역의 일상사무를 처리하는 외에 배화교 제사도 주재했다.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사보의 묘지로는 태원(太原)의 우홍묘(虞弘墓), 서안의 안가묘(安伽墓), 사군묘(史君墓)가 있는데, 이들 묘장은 모두 전형적인 중앙아시아 페르시아풍이다.
살보들은 북조에서 지위가 아주 높았다. 안가묘는 북주황실묘지에 가까이 있을 뿐아니라 그 규모도 황릉에 가깝다. 이런 높은 대우는 당시의 외교적 필요와 관련이 있다. 여러 언어에 능통한 소그드인은 북주, 북제 및 돌궐인과의 외교활동을 벌이는데 빠져서는 안되는 역할을 했다.
수,당으로 접어든 후, 소그드인의 수량은 늘어났고 줄어들지 않았다. 장안은 상시에 서시호(西市胡)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이들 소그드인을 전용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동시에 남방의 주요도시 예를 들어, 양주, 성도 등지에도 소그드인이 모여사는 집단거주지역이 나타난다.
앙연이 중국에 온 모든 소그드인이 부호 거상인 것은 아니다. 일부 소그드인은 궁정에서 일을 했다. 예를 들어, 수나라의 소그드인 공장(工匠) 하조(何稠)는 페르시아 금포(錦袍)를 모방하여 제조하고, 실전된 유리제품을 복제하였기 때문에 계속 승진하여 태부승(太府丞)까지 관직이 오른다. 수문제도 하조를 아주 좋아했고, 양광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조는 일을 하는데 아주 세심하다. 나는 후사를 그에게 부탁했다. 네가 이후에 무슨 일을 하든 그와 상의하는 것을 잊지 말라."
고원(固原)에 소그드에서 온 사씨(史氏) 가족이 있었다. 이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중국으로 온 사물사(史勿射)는 수나라의 표기장군(驃旗將軍)까지 오른다. 그의 아들 사가탐(史訶耽)은 당나라의 제1대통역으로 장안궁에서 30여년간 재직한다. 손자대의 사철봉(史鐵奉)은 양마(養馬)를 책임졌다. 그의 같은 집안 사람중에는 사도덕(史道德)이라고 있는데 역시 같은 일을 했다. 그러나 사도적은 실적이 좋지 않아서 육호주(六胡州)에서 말을 기를 때 수십마라의 마필이 사망한다.
소그드인은 도잇에 서방의 무도(舞蹈)를 장안 궁정으로 가져온다. 소그드에서 온 무도는 호선무(胡旋舞), 호등무(胡騰舞), 자지무(柘枝舞)의 세 가지가 있다. 그중 호선무가 가장 대표적이고, 당나라의 호풍(胡風)을 대표한다. 춤추는 사람은 작은 카페트 위에 올라가서 음악에 맞추어 회전하면서 춤을 춘다. 그래서 호선이라고 불렀다. 소그드의 여러 도시에서는 호선무녀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남성도 이 춤을 출 수가 있었다. 무측천의 조카인 무연수(武延秀)는 바로 이 춤에 능했다.
이와 동시에, 서역의 음악과 악기도 중원으로 들어온다. <수서>에서는 강국악(康國樂), 안국악(安國樂)에 사용된 악기를 기록하고, 조묘달(曹妙達), 안마구(安馬駒)등 저명한 음악가들도 소개한다.
일부 싸움을 잘하는 소그드인은 군사활동에 종사했다. 안록산(安祿山)은 바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소그드 군인이다. 그의 이름인 "녹산"은 소그드인들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 그 뜻은 '광명(光明)'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러 언어를 잘 하기 때문에 동북변방에서 통역을 맡았다가 점차 승진하여 최종적으로 일방에 할거하는 절도사가 된다. 그의 주위에는 다른 소그드군인의 종적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그에게는 서역 강국(康國)의 무사로 구성된 척갈친위군(拓羯親衛軍)도 있었다.
그외에 일련의 군사화된 소그드인은 주로 오르도스고원에서 활동했다. 이 지구는 육호주라고 불리웠다. 현지 소그드인은 장사를 하는 외에 주로 전마제공을 책임졌따. 역대 중원왕조에 있어서, 전마는 아주 중요한 전략자원이다. 이들 전마를 훈련시키고 기르는 소그드인은 자연히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된다. 개원연간, 그들은 30필의 말을 제공하기만 하면,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직위를 얻을 수 있었다. 변방에서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받을 때, 그들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하에 제일차방어선을 맡았다.
돈도 없고 권세도 없는 소그드인들은 주로 식당업에 종사했다. 앞에서 언급한 전병을 파는 소그드인은 바로 이렇게 호식(胡食)을 파는 소상인이다. 당나라때 국수(麵)를 위주로 하는 호식(胡食)이 점차 전통적인 보리밥(麥飯)을 대체한다.
당시 비교적 유행한 호식은 주로: 호병(胡餠)이다. 즉 지마소병(芝麻燒餠, 참깨를 뿌린 구운 전병) 대시인 백거이는 이를 크게 칭찬해 마지 않는다. 면이 바삭바삭하고 향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탕면과 유사한 탕병도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파이인 "필라(畢羅)"도 있다. 고기속을 넣는 외에 앵두, 게살등 여러가지 맛을 선택할 수 있었다.
소그드인의 포도주도 마찬가지로 유명하다. 포판(蒲坂)지구에는 대량의 주가가 있었는데, 건화(乾和)포도주를 경영했다. '건화'는 돌궐어 qaran을 음역한 것인데, 그 뜻은 술을 담는 부대를 말한다. 그 말 그대로, 소그드포도주는 통상 부대에 담아서 팔았다. 고객이 사서 돌아간 후 다시 잔에다 붓는다.
당나라의 문인도 소그드포도주에 대하여 친미하는 글을 많이 남긴다. 왕한(王瀚)의 명구 "포도미주야광배(葡萄美酒夜光杯)"는 바로 전형적인 예이다.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하여 점포주인들은 왕왕 아름다운 소그드미녀를 판매대에 세워 술을 팔았다. 원진(元稹)은 바로 이들 호희(胡姬)를 원형으로 하여, 저명한 사랑이야기 <앵앵전(鶯鶯傳)>을 쓴다.
소그드인은 장사를 하는 동시에 그들의 종교와 명절도 가져왔다. 원소절(元宵節)에 거는 등롱(燈籠)은 중앙아시아 노로츠명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소그드인은 비록 다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로는 배화교였다. 그 습속이 중국에 많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흔적은 찾을 수 있다.
배화교는 근친결혼을 주장했기 때문에 유가와 차이가 아주 컸고, 여러 오랑캐중 가장 추악하다고 비판을 받아서, 중국에서는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소량처마씨묘지>에 한 페르시아인 소량(蘇諒)이 자신의 딸을 처로 취한 일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중국의 소그드인은 일반적으로 차선책을 취해서 동족과 결혼했다. 섬서박물관에는 <미계분묘지(米繼芬墓誌)>를 소장하고 있는데, 묘지에는 미계분이 원래 서역인이라고 하고, 또한 부인도 미씨라고 하였다. 아주 드러내놓고 당나라의 동성불혼(同姓不婚) 규정을 무시했다.
배화교의 장례습속은 천장(天葬)에 가깝다. 통상적으로 시신을 야외에 버려두고 들개가 먹도록 한다. 그 후에 뼈를 수습하여 항아리에 담는다. 중국에 온 소그드인에게 뼈항아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천장습속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구당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원의 배화교교도는 시신을 황갱(黃坑)에 버려두는데, 관리들도 이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거동이 여러 달 여러 해 쌓이면서 대량의 들개와 늑대들이 평민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천보연간, 태원에 부임한 이고(李暠)는 군대를 풀어 들개를 모조리 죽여버린 후 비로소 이 습속이 그쳤다고 한다. 태원은 북제때부터 대규모의 소그드인 부락이 있었다. 이를 보면 이 습속이 거의 이백년가까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그드인의 명절경축활동은 배화교를 둘러싸고 전개된다.당나라사람들이 상당히 열중했던 명절중 하나는 "발한호(潑寒胡)"라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카니발과 같은 활동이다. 거행할 때,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술을 마시켜 축하하고, 서로 물을 뿌린다. 그래서 아주 요란하게 보낸다. 발한호는 중앙아시아에서 원래 봄에 파종하기 전에 풍년을 기도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단순히 겨울에 물뿌리는 축제로 바뀐다. 당나라황실도 이에 흥취가 있어서, 당중종, 당예종은 친히 구경한 적이 있다.
또 다른 자주보는 종교활동은 환표연(幻表演)이다. 이 약간 피비린내나는 표현은 원래 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다만 중국에서는 단순한 환술(幻術)로 변모된다. 환술의 공연자는 오주(袄主)라고 불렀다. 제사활동을 거행할 때, 배화교도는 먼저 돼지와 양을 죽이고, 그 후에 오주를 불러낸다. 오주가 칼날이 날카로운 칼을 자신의 배를 찌르면, 칼끝이 등으로 나온다. 그외에 오주는 칼로 내장을 마구 흐트러 놓는다. 오주는 다시 물을 한모금 뿌린다. 그러면 몸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둘러싸고 구경하던 관중들은 속속 동전을 던지며 감탄한다.
양주의 환술공연은 더욱 과장되었다. 오주는 쇠못을 이마에서 박아넣는다. 턱아래까지. 그 후에 오주는 수백킬로미터 바깥의 장액(張掖)까지 날듯이 달려가서 오사(袄祠)에서 춤을 춘 후 다시 달려서 돌아온다. 못을 뽑아낸 후 침대에 며칠을 누워 있으면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된다.
배화교는 교의가 태생적으로 유교와 맞지 않아서, 한족관리들은 여러번 상소를 올려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당고종때 명을 내려 장안에서 환술공연을 금지하고 발견하면 일률적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 금지령도 그다지 엄격하게 집행되지는 않았다. <조야첨재>의 기록에 따르면, 유사한 환술공연이 무측천통치시기에도 여전히 나타났다. 오늘날 관중 분지에는 "혈사화(血社火)"라는 공연이 있는데, 바로 소그드인 풍속이 남은 것이다.
소그드인은 오랫동안의 경영을 통하여 군인, 정부관리와 상인의 집단으로 구성된 완비된 소그드인사회를 이룬다. 이들 무리는 중원대륙에서 매우 발전한다. 그러나, 안사의 난은 중국에서 생활하던 소그드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들의 명성은 악화된다. 당나라 문인은 개원성세를 회고하는 동시에 불가피하게 반군수뇌인 소그드인을 적대시하게 된다.
당나라때 사람들의 소그드인에 대한 적대감은 말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많은 마장(馬場)을 잃게 된다. 부득이 회흘에서 마필을 구매하게 된다. 소그드인은 회흘과 당나라간의 마필무역을 중개했는데, 당연히 중간에서 이익을 취한다. 소그드인의 중개노력하에, 1필마의 가격이 25필생사에서 40필생사까지 급등한다. 그리하여 당나라사람들의 미움을 산다. 그리하여 780년, 일군의 소그드인에 불만을 가진 당나라사람들이 장광성(張光晟)의 영도하에 회흘-소그드상단을 습격하여 상단의 마필, 비단을 모조리 강탈해버린다.
차별대우를 피하기 위하여, 소그드인은 속속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시작한다. 설사 조정의 중신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부변방을 수비하던 안중장(安重璋)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안록산과 '같은 집안'인 것이 부끄럽다며, 사성을 청하여 이씨성을 사성으로 받아 이포옥(李抱玉)으로 개명한다.
성을 고칠 능력이 없던 소그드인은 그저 출신에서 약간의 조치를 한다. 우리는 남방에서 출토된 몇몇 소그드인의 묘지를 볼 수 있는데, 묘지에 자신의 출신을 회계(會稽)라고 적었다. 이것은 소그드인의 생존을 위한 위장술이었다. 회계는 남방의 유명한 도시인데, 돈황에 가까운 작은 도시 상락(常樂)도 당시에 회계라고 불리웠다. 이렇게 지명이 중복되는 것을 이용하여 소그드인은 자신을 성공적으로 의관남도(衣冠南渡)이 후손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었다.
소그드 집단거주지역에 최후의 일격이 된 것은 그들의 고향인 중아시아에서 왔다. 이슬람교세력의 장기간 침략을 받아서 소그드는 점차 그 독립성을 잃고, 사만왕조에 합병된다. 동시에 해상비단길이 무슬림의 통제하에 신속히 흥기하여, 육로의 무역기능을 대체한다. 무역선을 잃은 소그드인은 더 이상 그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고 점차 역사의 긴 흐름에 매몰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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