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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당)

원화중흥(元和中興): 당제국의 유명무실한 중흥

by 중은우시 2016. 4. 22.

글: 자주군(煮酒君)


안사의 나(安史之亂)은 중국에 큰 영향을 미친다. 중국 당왕조가 그 영향을 받았을 뿐아니라, 이후의 중국이 그 영향을 받는다. 안사의 난 이후 중국은 소수민족의 침입에 대하여 진공에서 방어로 국면을 바꾸게 된다. 안사의 난 이후, 중국은 더 이상 외적을 문밖에서 치지 못하고, 소극적인 방어로 방향을 바꾼다. 이런 전략모델은 그후의 송, 명, 심지어 중화민국을 거쳐 오늘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당왕조의 실력은 약해지고 깊이 반성한다. 그 후 중앙군의 장수는 더 이상 호인(胡人)을 쓰지 않는다. 일률적으로 한(漢)족으로 바꾼다. 이전에 번진의 수가 중앙군대보다 많던 모델도 도태된다. 다만 중당(中唐)이후 당왕조의 국세가 쇠락한다. 국가에 번진할거의 문제가 나타나고, 일부 지방절도사는 병력을 스스로 갖고 나라를 만든다. 이는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에 영향을 미치고, 중앙의 통치역량을 약화시킨다.


그중 특별히 하삭삼진(河朔三鎭)이 특히 발호했다. 당덕종이 재위할 때, 중앙병력이 부족한 점을 고려하여 번진에 대하여 고식(姑息)정책을 쓴다. 그러나 폐해가 점점 나타난다. 당헌종이 즉위한 후, "법도로 번진을 제재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병력으로 번진에 대응하려고 한다. 그리고 일정한 성과를 거둔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원화중흥"이다.


당헌종 - 당왕조에 보기 드문 능력있는 군주


당왕조에서 랭킹 1위는 당태종이다. 랭킹2위는 당현종이다. 랭킹3위는 바로 당헌종이다. 랭킹4위는 당헌종의 아들 당선종이다. 이 몇몇 황제중에서 당헌종은 수성지군이다. 비록 당태종, 당선종의 웅재대략은 없었지만 그래도 업적을 세운 황제이다.


이순(李純)의 처는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의 아들 곽애(郭曖)가 승평공주와 결혼하여 낳은 곽황후이다. 이순 자신은 이 황후를 냉대하지 않았고, 그들이 결혼한 후 2년만에 곽씨는 아들 이유(李宥)를 낳는다. 그가 바로 나중의 당목종이다. 이순이 즉위한 후 당태종, 당현종의 사적을 침궁에 그려놓고 그들의 성취를 아주 선망한다. 그는 당태종의 창업과 당현종의 치리(致理)를 모두 본받아야할 모범으로 여겼다. 조정권력이 날로 쇠약해지고, 번진의 권력이 날로 강성해지는 국면을 시정하고자, 그는 재상의 권위를 높이고, 번진의 반란을 평정했다. 그리하여, "중외함리(中外咸理), 기율재장(紀律再張)"하게 되고 '당실중흥'의 성황이 나타난다.


안사의 난 시기에 강회는 장순(張巡)이 사수하고, 게다가 곽자의가 조정을 보호하여, 강남지구의 세무는 여전히 중앙조정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안사의 반군을 격패시키는데 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헌종은 재상 두황상(杜黃裳)의 의견을 받아들여, 불복하는 번진을 정벌한다. 강회의 세금을 정리정돈하여 재정수입을 증가시킨다. 번진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환관감군을 취소시킨다.


삼승상 - 당헌종이 사용한 3명의 능력있는 재상


이순이 전투에서 성공한 것은 3명이 재상을 맡은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배도(裴度), 두황상과 이강(李絳).


두황상은 이순이 기용한 첫번째 재상이다. 원화원년, 하수은(夏綏銀)절도사 한전의(韓全義)가 입조한다. 두황상은 한전의가 간사하고 아부를 잘하며, 아무런 실적도 없다고 여겨서, 그에게 관직을 내놓고 은퇴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이연(李演)을 절도사로 임명한다. 하수유후 양혜림은 거병하여 명을 받들기를 거부하다가, 부하 장수 장승금에게 참살된다. 얼마후, 서천절도사 유벽이 반란을 일으킨다. 조정신하들은 촉의 땅이 험준하여 수비는 쉽고 공격은 어렵다고 보고, 출병하여 토병하는데 반대한다. 오로지 두황상만이 주전파였다.


그는 환관감군을 없애고 군사를 신책군사 고숭문(高崇文)에게 위탁하고 조정에서 전략을 결정할 것을 주장했다. 두황상은 이렇게 간언한다: 당덕종의 고식정책으로 번진의 장수들은 권력이 팽창하여,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폐하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 법도를 엄정히 하여 번진의 권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해야 한다. 당헌종은 그의 말이 맞다고 여기고, 그의 건의를 들어, 조정의 기강을 정돈하고, 제(齊), 채(蔡)반군을 소탕하여 양하일대를 수복한다. 그리하여 정원(貞元)이래 어지러운 국면이 약간 바뀐다.


당헌종의 두번째 승상 이강은 광시제세(匡時濟世)하고자 여러번 상소를 올리면서 당헌종에게 현명한 사람을 뽑고 능력있는 사람을 써서 그들에게 정치를 맡기라고 권한다. 그리고 현명한 자에게 관직을 맡기고, 한번 맡기면 오래동안 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재상으로 있을 때, 여러번 황제에게 번진을 없애고 당파를 없앨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 계책을 논의한다. 번진의 내부갈등을 이용하여, 위박절도사 전흥이 조정의 명을 듣게 만든다. 그렇게 하여 일정한 정도로 번진세력을 약화시킨다.


이강은 희실염허(喜實厭虛)했다. 조정에서는 황제에게도 직언한다. 그리하여 자주 대전에서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다. "국가의 중요한 직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일신안위만 생각하여 감히 직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하로서 군왕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다. 만일 신하가 국가를 위하여 일하고 군주의 안색을 보고 말하지 않으며, 황상의 뜻에 따르지 않는 일을 감히 해낸다고 이를 치죄한다면 그것은 황상이 신하를 저버리는 일이다." 당헌종은 그의 이 말을 듣고 깊이 감동한다.


원화10년, 당헌종은 전공을 세운 명상 배도를 승상에 앉힌다. 배도는 간신, 환관, 번진할거세력과 투쟁한다. 당헌종을 보좌하여 오원제, 이사도의 난을 평정하여 '원화중흥'을 실현한다. 그는 국가를 다스리는데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는 원칙을 견지하고, 장수와 승상으로 20여년간 있으면서 이덕유, 이종민, 한유등 명사를 추천하여 등용시킨다. 그리고 이광안, 이삭등 명장을 중용하고, 유우석등을 비호한다. 역사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을 오가면서, 몸은 국가의 안위와 시대의 경중과 20여년간 묶여 있었다." 3명의 승상이 서로 협조하여 일시에 이름을 떨친 원화중흥을 연다.


원화중흥 - 유명무실한 중흥


원화원년, 먼저 고숭문은 검남서천절도사 유벽을 토벌하여, 첫 승리를 거둔다. 원화8년, 위박절도사 전계안이 죽고 전흥이 병력을 물려받아 권력을 장악한다. 중앙은 그를 절도사로 임명하고, 그는 중앙에 귀순하였고, 조정은 전홍정(田弘正)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원화9년, 회서절도사 오소양이 죽고, 그 아들 오원제가 신주,광주,채주의 3주를 할거한다. 당헌종은 병력을 일으켜 거의 9만명으로 토벌에 나섰으나 오랫동안 싸워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원화12년, 재상 배도를 회서선위처치사로 임명하고 전군을 통솔할 책임을 맡긴다. 당헌종은 이삭을 파견하여 회서절도사 오원제를 토벌하고, 신주, 광주의 두 수비군도 투항한다. 나중에 횡해절도사 정권이 주청을 올려 조정에 들어와 관직을 맡겠다고 한다. 조정은 창주, 경주 2개주를 회복한다. 유주의 유총도 글을 올려 귀순을 한다. 성덕진도 스스로 글을 올려 덕주, 체주 2개주를 바친다. 소의절도사 노종사는 환주사마로 강등시킨다.


원화15년, 성덕진 왕승종이 병사한 후, 그의 동생 왕승원이 글을 올려 투항한다. 이렇게 하여 당대종이래 '육십년간 번진이 하남하북 십십여주에서 발호하여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세금을 바치지 않으며 조정의 구속을 받지 않던' 국면이 끝난다.


다만 당헌종은 대국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고 번진을 없앤 성취에 취하여, 그후에 도교에 빠지고, 군대를 감축시킨다. 그리고 다시 태감을 보내어 감군하게 한다. 이는 나중에 당헌종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


이순은 번진세력을 약화시키고, 조정의 권력집중을 강화하는 방면에서 현저한 성과를 거둔다. 다만, 나머지 방면에서, 여러가지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지 못했다. 원화14년 고부원외랑 이발이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신이 사신으로 나가서 다니면서 병에 이로운 것을 구하였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위남현 장원향은 원래 400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100여호만 있다. 의현에는 원래 3000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1000호만 있다. 나머지 주,현도 개략 비슷하다. 적폐의 원인을 찾아보니 모두 세금부담을 피해 도망친 것때문이다. 10호중에 절반이 도망쳤다. 그래도 남은 5호가 나누어 부담한다. 이는 마치 우물에 돌을 던져서 끝까지 내려가는 것과 같다. 세금부담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가혹한 정치때문이다. 이는 신하들이 위에 잘보이고자 아래를 착취했기 때문이다. 이는 연못의 물을 뽑아서 물고리를 다 잡아버리는 것과 같다." 이런 근본문제에 대하여 이순은 전혀 해결하지 않는다. 원화중흥은 당나라의 부강하고 번영된 국면으로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당헌종은 이런 업적을 거둔 후, 스스로 불후의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하여 점점 교만해진다. 황보박을 승상에 임명하고 배도를 파면한다. 그리고 점점 장생불로를 추구하고, 화관을 봉상으로 보내어 부처사리를 영접하게 한다. 이순은 도교에 빠져서 장생약을 복용하고, 성격도 포악하고 조급하며 쉽게 화를 내는 쪽으로 바뀐다. 자주 좌우의 환관을 혼내거나 죽인다. 원화 15년 정월 왕수징, 진홍지등 환관은 이항을 황제로 세우기 위하여 침궁으로 몰래 들어가 이순을 죽인다. 그리고 궁문을 지키며 조정신하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이순이 '단약을 잘못 먹어서 독성이 발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조를 거짓으로 내려서, 이항으로 하여금 황위를 승계하게 한다. 그 후에 당나라조정의 환관의 화는 더욱 심각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