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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주체(朱棣)와 주고후(朱高煦): 닮은꼴 부자의 서로 다른 운명

by 중은우시 2018. 7. 11.

글: 두문자(杜文子)


주고치(朱高熾)는 주체의 적장자(嫡長子)이다. 몸이 좋지 않아서, 무예에는 능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주체의 마음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후계자는 아니었다. 반대로, 주체는 정난지역때 많은 공을 세우고, 여러번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차남 주고후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다. 한때는 그에게 후계자의 지위를 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다만, 주고치는 적장자이고, 일찌감치 주원장(朱元璋)에 의하여 연왕(燕王)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고, 게다가 많은 중량급의 문관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주체의 눈에 "훌륭한 손자"로 여겨지는 주첨기(朱瞻基)라는 아들까지 두었다. 그래서 주체는 주고치를 태자로 삼는다. 영락2년의 일이다.


주고치가 태자에 오르자, 야심만만한 주고후는 당연히 불만이 컸다. 항상 태자의 자리를 빼앗고자 한다.


그리고 그 후에 이 주고후는 여러가지 실수를 저질러 주체는 그를 좋아하던 것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마음이 바뀌게 된다. 심지어 그의 왕위를 박탈할 생각까지 했었다.


태자의 자리를 놓치고 나서, 스스로 '정난지역'에 공로가 크다고 생각하는 주고후는 공에 비하여 봉상이 적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주체는 그를 한왕(漢王)에 봉했고, 번저(藩邸)는 운남(雲南)에 있었다. 주고후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만이었다. 남경에 남아서 봉지로 가지 않고 버텼다. 주체는 이 아들의 무지막지한 행동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그냥 놔둘 수밖에 없었다.


영락7년, 주체가 북경을 순행하는데, 주고후는 따라가겠다고 요청한다. 그러나 북경으로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한다. 아마도 형인 주고치와의 갈등 때문인 듯하다. 주체는 처음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고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청을 올린다. 주체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결국 주고후가 남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동의한다.


주체의 종용으로 주고후는 득촌진척(得寸進尺)했다. 그는 일찌감치 이세민의 현무문사변에 대하여 들었다. 그래서 그가 했던대로 정변을 꾀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고후는 속이 깊지 못했다. 남경으로 돌아간 후, 주고후는 주체에게 천책위(天策衛)를 자신의 호위로 삼게 해달라고 청하여 얻는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태종이 천책상장(天策上將)이었다. 내가 천책위를 얻은게 우연일까?" 이어서 그는 주체에게 청하여 두 호위를 얻는다. 이제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길거리를 다니면서도 사람들을 붙잡고 말했다: "내가 영무하니, 진왕 이세민과 같이 하지 않겠느냐."


스스로를 이세민에 비유했다. 이세민은 모반으로 황제위를 차지한다. 주고후의 속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주고후는 황제의 주변사람과 결탁하여 황제에게 참언을 올리고, 밤낮으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만 하면서 유언비어를 만들어 유포했다. 그리고, 세째동생 주고수(朱高燧)와 손을 잡고 황제와 태자의 사이를 이간질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주체는 계속하여 주고후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듣게 된다. 이전에 주고후가 운남으로 가지 않으려 했던 것을 떠올리고, 그를 산동(山東) 청주(靑州)로 보낸다. 그래도 주고후는 남경에 남아서 봉지로 가지 않는다. 이때부터 주체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명을 내려 반드시 부임하라고 한다.


그러나, 주고후는 역시 들은체 만체 했다. 생각해 보라. 당초 정난지역때 나는 여러번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의 생명을 구해주었고, 그때 당신은 나를 태자로 삼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정난에 성공하고나니 당신은 태자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다.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큰 공을 세웠는데 이제 기껏 지방의 번왕이나 하고 있으란 말인가.


주고후는 마음 속에서 분노가 끓어 올랐다. 그러나 드러내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체가 그를 청주로 고쳐서 봉했을 때도 그는 아예 갈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하고싶은대로 하면서 남경에 머물며, 음모를 꾸민다. 그는 원래 부친이 그에게 약속했던 태자의 자리를 빼앗아오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고후는 봉지로 가지 않고 계속 시간을 끌었다.


제2차북순이 끝나고 남경으로 돌아온 후, 주체는 자신의 눈과 귀들을 통하여 주고후가 벌인 불법행동들을 낱낱이 알게 된다. "그는 군사3천을 병부에 적을 올리지 않고 사사로이 한왕부에 가지고 있었고, 각 공주부의 목지와 민전을 차지하여 초장(草場)으로 삼았다." 한왕부의 장사(長史) 채영(蔡瑛), 기선(紀善)등에 여러번 권했으나, 주고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금의위의 감옥에 가둔다. 금의위 감옥은 한왕부의 부설기구가 아닌데, 주고후가 이렇게 한 것은 그 자체로 월권이다.


그후에 주고후는 더욱 거리낌없이 행동한다. 수하사병들이 남경에서 약탈하도록 종용하여, 인심이 흉흉해진다. 병부지휘 서야려(徐野驢,이름이 이상하긴 한데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명을 내려 약탈하는 사병을 체포한다. 그 후에 서야려는 주고후에게 맞아죽는다.


황위를 빼앗기 위하여, 주고후는 몰래 번왕의 법도를 벗어나는 "승여기물(乘輿器物)"을 준비한다. 미리 태자노릇을 해본 것이다. 당연히 계속 군대에서 일했던 주고후는 잘 알고 있었다. 황위를 빼앗으려면 군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비록 현재 자신의 손에 이미 삼위(三衛), 근 2만명의 정예병이 있지만, 그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남경 한왕부에 몰래 3000여 병사를 모집하여, "사사로이 병기를 만들고, 결사대를 양성한다. 도망친 자들을 모아서 칠피로 배를 만들고, 수군훈련을 한다."


이때, 주고후를 계속하여 총애하고 비호하던 주체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바로 명을 내려 주고후를 황궁대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힐문한다. 그가 저지른 수십건의 불법행위를 하나하나 얘기하며, 주고후에게 그 자리에서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한다.


주고후는 이미 놀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주체가 이렇게 화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벌인 일을 주체가 그렇게 정확히 알고 있을 줄도 생각지 못했다.


주고후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는 반란음모사실을 묵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때 주체는 고삐풀린 짐승같았다. 계속하여 황궁대전에서 포효하면서 주고후의 옷과 모자를 모두 벗겼다. 그리고 그를 서화문(西華門)안에 가둔다. 그리고 환관 황엄(黃儼)등에게 밤낮으로 감시하도록 시킨다. 그러나 이 정도의 조치만으로는 그의 마음 속의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재삼 생각해본 후에 주체는 마침내 가장 엄격한 처벌을 내린다: 주고후의 폐(廢)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킨 것이다.


그래도 주고치가 흉금이 넓었다. 그는 형으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부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하여, 주체에게 가서 둘째동생을 용서해달라고 청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주체는 주고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금 이 어리석은 놈을 없애려는 것은 바로 우리 대명의 미래를 위함이다. 네가 지금 나에게 그를 풀어주라고 하는데, 그것은 호랑이를 풀어줘서 산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같다." "너의 둘째동생은 항상 자신을 이세민에 비유하며, 너를 이건성으로 취급했다. 이런 자를 어찌 남겨둘 수 있겠느냐."


며칠이 지나서, 주고치는 다시 한번 주체를 찾아가서 둘째동생이 용서를 빈다. 주체는 말한다: "만일 네가 냐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럼 말해봐라. 너의 둘째동생이 그렇게 많은 불법을 저질렀는데, 현재 그를 어디에 두면 좋겠느냐. 남경에 그를 남겨둘 수는 없다. 오늘 네가 나에게 부탁하니 잠시 그의 왕위를 박탈하지는 않겠다. 그를 경기지구로 보내겠다. 일단 무슨 움직임을 보이면, 조정에서 아침에 병력을 보내면 저녁이면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생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렇게 하자. 한왕의 분봉지를 산동 낙안(樂安)으로 하자."


영락15년, 주체는 "한왕 주고후를 산동 낙안에 거주하도록 강제했다."


이렇게 하여 주고치의 태자자리의 가장 큰 위협이 일단 해소되었다.


나중에 주고치가 죽고, 주첨기가 즉위한 후, 역시 주고후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결과는 주체가 말한대로, 금방 친정온 주첨기에게 생포되고 만다. 반ㄹㄴ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역시 경험자인 주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