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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영락제)

영락제(永樂帝)에 배향(配享)된 네 명의 공신

by 중은우시 2018. 10. 16.

글: 역사상적나점사아(歷史上的那點事兒)


명나라 영락22년(1424) 명성조 주체는 북정에서 회군하는 도중에 유목천(楡木川, 지금의 내몽고 우주무친)에서 사망하고, 장릉(長陵)에 묻히며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한다. 영락제 주체가 22년간 재위하는 동안, 명왕조는 경제가 번성했고, 국력이 강성했다. 영락제는 5번에 걸쳐 몽골을 친히 정벌하고, 안남을 수복하였으며, 동북에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두고, 서북에 합밀위(哈密衛)를 두어 남북의 변방을 공고히 했고, 영토의 판도를 지켜냈다. 여러번 정화하서양을 통해 외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수립한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영락대전>을 편찬하고, 북경으로 천도하여 북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천하를 안정되게 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며 강역을 넓힌다. 그리하여, '영락성세(永樂盛世)'라는 말을 듣는다. 영락제가 죽은 후, 4명의 공신이 배향되는 영광을 누린다. 그들을 하나 하나 보기로 하자


하간왕(河間王) 장옥(張玉)


자는 세미(世美)이고 지금의 하남 개봉 사람이다. 장옥은 원래 원나라 추밀지원(樞密知院)인데, 나중에 명에 투항한다. 여러번 공을 세워 연산좌호위지휘첨사(燕山左護衛指揮僉事)가 되어, 주체의 휘하에 들어간다. 그는 전투에 용감하고 지혜가 많고 계책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주체에게 점점 중용된다. 그는 정난지역대 북평구문을 탈취하여 도지휘첨사로 승진한다. 그리고 연군선봉(燕軍先鋒)이 되어, 남군의 총사령관 경병문(耿炳文)을 대파한다. 당시 연군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 "장옥선모(張玉善謀), 주능선전(朱能善戰)"(장옥은 계로를 꾸미는데 뛰어나고, 주능은 전투에 뛰어나다)라믄 말이 있을 정도로 주체의 오른팔, 왼팔이었다. 나중에 장옥은 연군중군 주장이 되어, 정촌패, 백구하에서 두 번에 걸쳐 남군대장 이경륭(李景隆)을 물리친다. 건문2년 십이월(1401년 1월), 장옥은 동창(東昌) 전투에 참가하여, 주체를 구하기 위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한다. 당시 나이 58세였다. 영락연간에 영국공(榮國公)으로 추봉되고, 시호를 충현(忠顯)이라 받는다. 주체는 그를 "정난때 공로는 마땅히 제일이다."라고 평했다. 홍희원년(1425) 삼월, 장옥은 하간왕으로 추봉되고, 시호를 충무(忠武)로 고친다. 그리고 '태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얻는다. 그리하여 동평왕(東平王) 주능, 금향후(金鄕侯) 왕진(王眞), 영국공(榮國公) 요광효(姚廣孝)와 더불어 명성조 영락제에게 배향된 4명이 공신이 된다. 


장옥의 장남 장보(張輔)는 공으로 영국공(英國公)이 되며, 9대를 세습하여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차남 장예(張輗)는 처음에 신책위지휘사가 되었다가 관직이 중군도독부 우도독, 태자태보에 이르고, 문안백(文安伯)에 봉해진다.

삼남 장월(張軏)은 처음에 금의위지휘첨사가 되었다가, 관직이 전군도독부 우도독에 이르고, 태평후(太平侯)에 봉해지고, 죽은 후 유국공(裕國公)에 봉해진다.

딸 장씨는 영락제의 귀비(貴妃)가 된다.


금향후 왕진


"왕진처럼 죽어라 싸우면 무슨 일을 못이루겠는가? 죽지만 않으면 공은 마땅히 여러 장수들 중 으뜸이다." 이 말은 영락제가 왕진을 평가한 말이다. 왕진은 함녕(咸寧) 사람으로, 정난지역때 용감하게 적과 싸워서 매번 전투가 있을 때마다 앞장섰다. 그리하여 공으로 도지휘사에 봉해지고, 나중에 남하할 때 전사한다. 영락제때 금향후에 추봉되고, "태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는다. 


아들 왕통(王通)은 초기에 부친의 직위를 세습하여 도지휘사가 되어 부친의 병마를 이끌며 각지를 전전하며 여러 공을 세운다. 관직이 도독첨사에 이르고 무의백(武義伯)에 봉해진다. 선덕(宣德)연간에 태자태보, 성산백(成山伯)인 왕통은 정이장군(征夷將軍)에 봉해져서 군대를 이끌고 교지(交趾, 월남)을 정벌하러 나선다. 그러나 기후가 맞지 않고 매복에 걸려서 관군이 대패하여 2,3만명이 전사한다. 그리고 몰래 여리(黎利, 월남 여조의 개국군주)와 화의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영락제가 대노한다. 왕통은 사형을 판결받고(공신의 후손으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를 간다), 고권(誥券)을 빼앗기며, 가산이 몰수된다. 경태원년(1450), 명경제 주기옥이 즉위한 후, 왕통을 도독첨사로 기용하고, 경성을 수비하도록 한다. 경태3년(1452) 왕통이 사망한다. 천순원년(1457), 왕통의 아들 왕종(王琮)으로 하여금 성산백의 작위를 계승하게 한다. 왕종의 아들 왕용(王鏞)은 명나라 성화연간에 다시 고권을 돌려받고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자손후대가 세습한다.


동평왕 주능


자는 사홍(士弘)이고, 지금의 안휘 회원(懷遠) 사람이다. 주능은 일찌기 연산 중호위의 부천호(副千戶)였다. 연왕(주체)을 따라 막북을 정벌하며 용맹하게 싸웠다. 그는 정난지역때 북평구문을 탈취하고, 전후로 경병문, 이경륭을 격패시킨다. 영벽(靈璧)에서는 평안등 남군의 명장을 포로로 잡고, 십만의 남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여러번 공을 세워 좌군도독부 좌도독이 된다. 주체가 등극한 후, 주능은 봉천정난추성선력무신이 되고, 영록대부, 우주국, 좌군도독부 좌도독이 되며 성국공(成國公)에 봉해지며, 태자태부(太子太傅)를 겸한다. 영락4년(1406), 영락제는 주능을 정이장군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서평후(西平侯) 목성(沐晟), 신성후(新城侯) 장보를 이끌고 안남을 정벌하게 한다. 같은 해 십월, 주능은 용주(지금의 광서)로 가고 군중에서 병사한다. 당시 나이 37살이었다. 그는 동평왕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를 무열(武烈)이라고 얻는다. 홍희원년(1425), '태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는다. 주체는 그를 이렇게 칭찬한 바 있다: "나를 보좌하여 대업을 이루게 한 사람은 바로 주능이다."


아들 주용(朱勇)은 관직이 태보(太保)에 이르고, 성국공의 작위를 승계한다. 그는 토목보의 변때 사망하고, 평음왕(平陰王)으로 추봉되며 시호는 무민(武愍)이라 한다. 주능의 성국공 작위는 모두 9세12대에 이르러 계승되고,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끝이 난다.


영국공 요광효


법명(法名)은 도연(道衍)이고, 지금의 강소 소주 사람이다. 명나라의 정치가, 불학가(佛學家), 문학가이다. 정난지역의 주요 기획자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흑의재상(黑衣宰相)이다. 요광효는 젊었을 때, 소주의 묘지암(妙智庵)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그는 삼교(三敎, 유불도)에 정통했다. 홍무15년, 명태조 주원장에게 뽑혀서, 연왕 주체를 알게 되고, 경수사(慶壽寺)의 주지가 되고, 주체의 주요 모사(謀士)가 된다. 주체의 정난지역 셋째해에 요광효는 북평을 지키고 있으면서, 주체에게 경기(輕騎)로 돌진하여 남경을 점령하도록 건의하여, 주체가 순조롭게 남경을 취하고 황제로 등극할 수 있게 한다. 영락제가 즉위한 후, 요광효는 승록사(僧錄司) 좌선세(左善世)가 되고,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된다. 그는 '흑의재상'으로 불렸다. 영락16년(1418), 경수사에서 병사하니 향년 84세이다. 그는 영국공에 추증되고, 시호를 공정(恭靖)이라고 받는다. 그리고 그의 양자(養子)인 요계(姚繼)는 상보소경의 관직을 받는다. 황제가 친히 그를 위하여 신도비(神道碑)의 명문을 써주고, 문신의 신분으로 태묘에 배향되었는데 그는 명나라 첫번째 사례이고, 또한 유일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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