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청등(楓晴橙)
명나라때, 엄격하게 적장자계승제를 집행하였으므로, 황위쟁탈전은 다른 왕조때보다 많이 적었다. 그러나 명나라때, 비교적 격렬한 후계자쟁탈전이라면 영락제때를 꼽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후계자다툼을 영락제 주체의 편애때문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정난의 위기시기때, 주체는 그의 유혹에 가까운 방식으로 주고후(朱高煦)를 격려했다. "힘을 내라. 세자는 질병이 많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주고후에게 너의 형은 병이 많으니, 장래 변후가 많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너의 형은 병이 많으니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너에게도 기회는 많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고방식을 조금 바꾸어보면, 주체는 큰아들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찍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부친으로서, 황제의 자리에 뜻을 둔 사람이, 어찌 공연히 두 아들을 도발시키겠는가? 그렇다면 주체의 아이큐는 너무나 낮은 것이다. 기실 이 말은 아마도 그다지 깊은 뜻을 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주고후에게, 너의 형은 몸이 좋지 않으니, 군대를 이끌고 전투하는 것은 너를 믿겠으니 힘을 내라는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일 것이다.
세자 주고치(朱高熾)의 신체상황에 관하여 많은 자료는 과장되게 묘사하여 그가 거의 폐인인 뚱보라고 묘사하고 있다. 길을 걸을 때도 부축을 받아야 하고, 다리에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이 정말 그러했을까? 주고치는 홍무28년에 연세자(燕世子)로 세워지고나서, 그가 참여해야하는 모든 정치활동에 참여했었다. 예를 들어 다른 세자들과 함께 남경으로 가서 황제(명태조 주원장)를 배알하고, 할아버지로부터 칭찬까지 받았다. 주원장이 죽은 후, 남경으로 가서 장례식에 참가한다. 정난기간동안에는 북평을 굳게 지킨다. 황태자가 된 후에도 모든 의무를 이행했다. 부친이 북정하는 기간동안 장기간 감국으로 있었으니, 노동강도는 대다수의 태자들보다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앞에서 말한 것같은 그런 신체적 조건이었다면, 아마 이런 의무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외에 인종실록에서는 특별히 그가 사술(射術)에 능하다고 적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그저 그의 아들이 그의 얼굴에 금칠해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는 장점이 많았다. 일부러 단점을 가지고 장점인 것처럼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막 건국한 때도 아니었다. 그래서 모든 황제가 말을 타고 활을 쏘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이는 주고치가 사술에 정통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걸을 때도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어찌 활을 쏘아 백발백중할 수 있겠는가? 아마 활을 당기지도 못할 것이다. 또 다른 한가지가 있다. 그의 자녀는 수량이 제법 많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그의 신체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화상으로 보면, 그는 그 어느 황제보다 그다지 뚱뚱하지 않다. 설사 미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구분을 할 수는 있었을 텐데, 그는 그의 부친이나 아들에 비하여 더 뚱뚱해 보이지 않는다.
주체가 정말 주고후에게 큰 기대를 걸었을까? 주체는 정말 주고치, 주고후간에 망설인 적이 있을까? 필자의 생각에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주고치에 대하여는 망설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그가 주고후와 대체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다. 영락제는 자신의 황제자리를 적법하게 얻은 것이 아니었다.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지위합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가 이런 배경하에서 장남을 폐위시키고 동생을 태자로 세웠겠는가? 명분이 당당한 적장자를 버리고, 차남을 고려했을까? 이런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다. 그외에 그는 주고후를 머나먼 운남으로 봉한다. 이것도 아마 문제를 설명해줄 것이다. 그는 왜 주고수(朱高燧)는 북평을 지키게 하고, 주고후는 운남으로 보내버렸을까? 이치대로 하자면 주고후가 북평을 지키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주체의 생각은 아주 명확하다. 주고후를 멀리 보내버림으로써, 형제간의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생각한다. 소위 후계자다툼은 기실 누군가가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일부 문제의 처리에 있어서 의견차이가 있었던 것일 뿐이다. 주체는 주고치의 어떤 점이 불만이었을 것이다. 이 아들은 성격에서 그를 닮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만일 그가 황제의 자리를 승계하면, 자신의 정책을 뒤집어버릴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리고 부친으로서, 그는 개인감정상 둘째아들과 막내아들을 더 좋아했을 수 있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황제로서, 그가 그들 둘이 더 황제위를 승계하는데 적합한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이 부친의 총애를 믿고, 주고후, 주고수는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체는 기실 뼛속부터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피의 댓가를 치르며 후계자다툼을 마무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기실 역대왕조의 방식에서 황위를 두고 다투는 아들은 죽이거나 연금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해결방법이다. 주체의 방식은 어떠했는가? 단지 아들에게 번왕으로 만족하며 살라고 권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확실히 주고후, 주고수를 방종하게 만들었다. 만일 잘못이라면 영락제가 제왕의 방식대로 후계자다툼문제를 처리하지 않았고, 그저 부친의 방식으로 이를 처리했다는 점이다.
주체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마음이 약했다. 그리고 그의 자식은 많지도 않았다. 주고후는 또한 상대적으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래서 직접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은 주고후에 대하여 그는 계속 종용한 것도 이해가 된다. 다만, 시종 영락제는 황손을 그 어느 아들들보다 사랑했다. 명선종 주첨기(朱瞻基)가 나중에 당당하게 등극하게 하기 위하여, 설사 그가 정말 주고후로 하여금 즉위하게 하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금방 포기했을 것이다. 사실상 주체는 자주 북정을 갔고, 영락제의 재위기간동안 상당히 긴 시간동안 태자감국을 했다. 만일 그가 뚱보의 능력을 믿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강산을 장난처럼 그 뚱보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락제가 망설인 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시종 태자가 계승하기를 바랐다.
전체적으로 봐서, 영락2년에 주고치를 태자로 앉힌 후, 주체는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주고치라는 황태자는 장기간 남경에서 감국을 하였는데, 이는 주체가 그를 신임하였다는 말이다. 주고후가 형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했다는 점은 어느 둘째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양광, 이세민은 모두 장남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올랐다. 주고후도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영락9년초 주체는 주첨기를 황태손에 임명한다. 이미 세상사람들에게 명확히 밝힌 것이다. 장남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는다. 설사 장남이 없더라도, 그 다음 차례는 장손이다. 다른 아들에게는 돌아가지 않는다.
영락9년에 태자를 탄압한 일은 주고치가 일하는게 지나쳤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범위를 잊어버리고, 부친이 임명한 관리를 해임하고, 자신의 심복을 발탁했다. 생각해보라 재위하고 있는 그 어느 황제가 이런 일을 용납하겠는가? 설사 임명한 관리가 아무리 못하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해임해야 해임하는 것이다. 태자가 월권하여 자신의 심복을 심는 것은 안된다. 그래서 탄압받은 것이다.
주첨기는 영락9년에 황태손이 된다. 기실 황태손을 임명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무엇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홍무28년에 이미 법도로 정했기 때문이다. 황태자의 장남이 일정한 연령이 되면 황태손으로 삼는다. 문제는 영락5년, 후계자다툼이 아직 완전히 끝나기 전에, 서황후는 임종하였는데, 임종하면서 단지 9살된 주첨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장래 종묘사직을 책임져야 한다. 만일 이때 주체가 어느 아들에게 물려줄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그녀가 황위계승자를 결정한 것과 다름없는 행위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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