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숭정역서
<명태종실록> 권9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을축(乙丑, 건문사년 육월 십삼일, 서력 1402년 7월 13일)
당시, 여러 왕과 문무 군신, 부로등이 모두 내조(來朝)했다.
건문군도 나가서 맞이하고자 했으나, 좌우가 모두 흩어졌다. 오직 내시 수인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만난단 말인가!" 그리고 궁문을 닫고 스스로 불을 질렀다.
황상(영락제)가 궁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급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구하게 했다. 도착했으나, 이미 늦었다. 중사는 그(건문제)의 시신을 불 속에서 꺼내어 황상에게 아뢰었다.
황상은 곡을 하며 말했다: "과연 멍청하구나. 내가 와서 도와주려 했고, 그대의 날개가 되면 좋았는데, 그대는 이를 모르고, 경솔히 이렇게 하였단 말인가."
그 때, 누군가 방효유를 붙잡아 와서 바쳤다. 황상은 궁중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가리키며 방효유에게 말한다: "이것은 모두 너희들이 한 짓이다. 너의 죄를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방효유는 고두기애(叩頭祈哀)한다. 황상은 좌우를 보며 말했다: "급히 죽이지 말라" 그리고 그를 거두었다.
- 정축(丁丑, 건문사년육월이십오일, 1402년 7월 25일)
간신 제태(齊泰), 황자징(黃子澄), 방효유(方孝孺)를 궐하로 끌고 와서, 황상이 그들의 몇 가지 죄를 지적하고, 모두 죄를 인정했다(咸伏辜), 그래서 저자거리에서 죽인다(遂戮於市)
우선, <명태조실록>의 사적의 진위는 논하지 말기로 하자. 어찌되었건 날짜를 틀리게 적을 이유는 없다. 주체가 방효유를 만난 날은 육월 십삼일 을축일(1402년 7월 13일)이다. 그후에 갇혀 있다가, 12일후 제태, 황자징과 함께 처형당한다.
<명사>의 일자도 마찬가지이다. <명사> 본기제5 성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을축(乙丑, 건문사년 육월 십삼일, 서력 1402년 7월 13일). 금천문에 이르러 곡왕 혜, 이경륭 등이 문을 열고 왕(연왕, 즉 영락제)을 맞이했고, 도성이 함락된다.
그날, 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남경성과 황성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용강에 주둔하며, 명을 내려 백성과 군민을 안위시켰다. 크게 제태, 황자징, 방효유등 오십여명을 수색했고, 방에는 그 성명을 간신(奸臣)이라고 적었다.
- 병인(丙寅). 여러 왕과 여러 신하들이 표를 올려 황제에 오를 것을 권했다.
- 을사(乙巳, 건문사년 육월 십칠일, 1402년 7월 17일). 왕은 효릉(주원장의 능)을 배알한다. 여러 신하는 법가를 준비하고, 옥새를 바치며 만세를 외쳤다. 왕은 연(輦)을 타고, 봉천전으로 가서 황제위에 오른다. 주왕 소, 제왕 박등의 작위를 회복시킨다.
- 임신(壬申), 건문황제를 장례지낸다.
- 정축(丁丑, 건문사년 육월 이십오일, 1402년 7월 25일), 제태, 황자징, 방효유를 죽이고, 그 일족을 멸하다.
명나라 중기에 이르러, 야사에서 주체가 방효유에게 조서를 초안하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타난다. 이때는 사건이 발생한지 이미 100년이 흐른 뒤였다.
명나라말기에 이르러 야서에서는 십족을 주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때는 사건이 발생한지 이미 200년이 지난 때였다.
청나라때 명사를 편찬할 때는 '십족을 주살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그저 주체가 방효유에게 조서를 초안하게 했다는 이야기만 실었다.
<명사> 열전 제이십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을축, 금천문이 열리고, 연왕의 병사가 들이닥친다. 황제는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한다. 그 날, 효유는 붙잡혀 옥에 갇힌다....효유는 붓을 땅바닥에 던지며 곡을 하며 욕을 했다: "죽으면 죽는 것이다. 조서는 쓸 수가 없다." 명성조(영락제)는 노하여, 저잣거리에서 걸형(磔刑)에 처하도록 명령한다. 방효유는 분연히 죽음을 맞이하고, 절명사를 쓰는데 그 내용은....."
이를 읽어보면 마치 주체가 방효유에게 화를 내서, 그 자리에서 방효유를 걸형에 처한 것처엄 보인다.
그러나, 방효유는 실제로 영락제를 만난지 12일만에 제태, 황자징과 같이 죽임을 당했다.
만일 정말 방효유에 분노했다면, 영락제가 어찌 12일이나 참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조서초안' 사건은 을축일(1402년 7월 13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보다 며칠 후에 있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많은 사서를 뒤져보았다. 대부분은 '조서초안'사건의 확실한 일자를 적어놓지 않았다. 단지 명말 담천(談遷)의 <국각(國榷)>에 정축일이라고 명시했을 뿐이다: "정축....나라가 망하다. 효유는 밤낮으로 울었다. 황상이 여러번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진무 오운집이 들어왔다. ....황상이 말한다: '나는 구족을 죽일 수 있다.' 이에 대답하여 말하기를 '죽을텐데 어찌 나의 족을 더할 수 있겠는가' 하옥시키고 그의 친척들을 붙잡아서 계속 보여주었다. 곡을 하며 욕하기를 똑같이 했다. 황상이 노하여, 그의 입을 찢고, 그의 혀를 뽑게 하였다. 효유는 여전히 피를 어좌에 뿜었고, 그를 걸형에 처한다..."
이렇게 하면 논리는 맞다. 그날 화를 내서 그날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는 이미 기사일(1402년 7월 17일)에 즉위했다. 그런데 방효유에게 조서를 초안하라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거기에 제태, 황자징과 함께 죽인 것으로 보면 '조서초안'의 사건이 없더라도, 반드시 방효유를 죽였을 것이다. 그래야 정난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뜻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주체가 방효유의 십족을 멸하였는가?
1. "명나라 만력연간, 만력제는 조서를 내려, 방효유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제전(祭田)을 하사하고, 방효유의 차남 방중헌(方中軒)의 후손을 송화강 화정현에서 찾아내어, 대데로 절강 영해에 지금까지 살게 했다. 이 지계는 극근공(방효유의 부친)을 1대조로 하여, 지금까기 25대가 내려왔으며, 후예는 약 500명이 된다. 이 일은 명청양대의 <영해현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2. <송강부지>의 기록에 따르면, 방효유의 가까운 친구인 전 형부상서 위택은 피살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방효유의 9살된 아들 방덕종(方德宗)을 거두어 준다.
3. 방효유가 막 죽고나서, 그의 제자인 요용, 요명, 왕여가 방효유 피살후, 몰래 방효유의 유해를 후습하여, 그를 취보문밖의 산 위(지금의 남경 중화문 밖 우화대 동록)에 매장한다.
4. 그후 방효유의 23세손이라는 방하준(方何俊)은 28권의 <방하종보>를 증거로 내놓았고, 북경의 전문가들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이 방하준 선생은 방효유의 후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
5. 또 한 갈래가 있다. 방건평(方建平)이라는 사람은 자칭 23세손이라고 하며 집안족보를 증거로 내놓았다.
6. 그외에 자칭 증거가 있다는 방효유의 후손은 30여지계에 이르고, 약 10만명이나 된다.
7. 민국시대 <근현지>에 따르면, 방효유의 장남인 방중유(方中愈)의 후손인 방구성(方九成)은 명나라 만력연간부터, 자계에서 근현으로 이주하여, 백악향 방가에 거주했다. 자계에 있을 때는 주(朱)씨로 살다가, 근현에 온 후부터 방(方)씨를 회복했다. 방구성은 이렇게 하여 시조가 된다.
8. 기록에 따르면 방효유에게는 친숙부가 있었는데 이름이 방극가(方克家)이다. 그의 아들인 방효복(方孝復)은 홍무25년 경원(지금의 광서성 의산 일대)에 유배를 가서 충군(充軍)된다. 군적을 취하는 것으로 죽임을 면한다. 방효복의 아들 방완(方琓)은 나중에 군적에서 벗어나 민적을 얻는다.
9. 방효유가 주체의 방에 있는 간신이라면 청군측(淸君側)의 악인이다. 그런데 방효유와 같은 간신에게 등극조서를 쓰게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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