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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유학순(劉學詢): 문가화국(文可華國), 부가적국(富可敵國), 첩가경국(妾可傾國)

by 중은우시 2014. 8. 26.

글: 유계흥(劉繼興)

 

 

 

 

청말민초, 유씨성의 대인물이 하나 있다. 진사출신으로 재주가 뛰어나서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일찌기 '도왕(賭王)'으로 700만은원의 재산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국가재정수입의 10분의 1에 상당했다. 그리고 여러 아름다운 첩을 거느렸는데, 모두 침어낙안의 미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유삼국(劉三國)"이라고 불렀다. 즉, "문가화국(文可華國), 부가적국(富可敵國), 첩가경국(妾可傾國)"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찌기 서태후를 대표하여 일본에 방문하여 천황을 알현하였는데, 암중으로 손중산과 여러번 만나서 손중산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손중산은 그에게 밀서를 보내어 혁명이 성공한 후, 그를 총통 또는 황제로 모시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밀서는 <손중산전집>에 있음)

 

이 대단한 인물의 이름은 바로 유학순이다.

 

유학순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마도 낯설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항주(杭州) 유장(劉莊)(원래 이름은 수죽거(水竹居))을 얘기하면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옛날의 유장은 지금의 항주서호 국빈관(國賓館)으로 유명하다. 서호의 서쪽에 위치하고, 삼면이 호수에 접해 있으며, 한면은 산에 접해 있다. 환경이 아름답고 건축이 정교하다. 북쪽에 자리잡아 춘방도화하관하(春訪桃花夏觀荷), 추래상계동첨송(秋來賞桂冬瞻松)"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더더구나 죽풍일창(竹風一窓), 하풍반상(荷風半床)의 청염(淸恬)한 정경이 있다. 눈을 들어 동쪽을 보면, 십리호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항주서호 국빈관은 공화국의 풍운을 질타한다. 1954년, 신중국의 최초 헌법초안이 이곳에서 쓰여진다. 1972년 <미중공동성명>을 이곳에서 이니셜한다. 그외에, 이곳에서는 모택동을 포함한 국가지도자들 및 많은 국가원수들을 접대한다.

 

유학순, 1855년 광동성 향산현 삼향고학촌에서 태어난다. 손중산과는 같은 고향사람이다. 그의 집은 손중산의 집에서 10여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24살때, 유학순은 거인이 되고, 광서13년(1886년) 다시 진사가 된다. 광동문단의 "4대금강'중 한 사람이다. 진사에 급제한 후 규정에 따라 "귀반전선(歸班銓選)'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후보도대(候補道臺)가 되어, 빈 자리가 나면 실제로 부임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조하게 관직이 나기를 기다리는 와중에 유학순은 점점 관직에 흥미를 잃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산서순무에서 양광총독으로 숭진하여온 장지동(張之洞)은 조사연구를 거쳐 광동에서 양무운동을 벌이는데, 재정자금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금원을 늘이기 위하여 도박업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장지동은 당시 관료사회의 개명인사였다. 그의 사상은 개방적이었고, 항상 '기풍을 선도'했다.

 

그리하여 장지동은 당시 전국도박금지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병부상서 팽옥린에게 신청하여, 광동성의 도박업을 허용해줄 것을 강력해 요청한다. 팽옥린도 만청의 저명한 개혁파이다. 개혁개방사업에 열심이었다. 그는 조정에 주청을 올려 그중 한 가지를 개방한다. 즉, "위성(闈姓)" 도박이다. 조정도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계속하여 도박을 금지하게 되면 광동의 재정난으로 새로운 성장점을 발굴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광동에서 "관독민판(官督民辦)"의 "위성'도박사업을 허용한 것이다.

 

'위성'은 일종의 게임형 도박이다. 게임방법은 과거시험전에 모든 응시자의 성을 채표(彩票)에 인쇄한다. 그리고 가격을 정해서 판매한다. 구매자는 그중 급제자의 성을 채워 넣는다. 만일 맞으면 큰 돈을 받을 수 있다. 진사출신의 유학순은 두뇌가 과연 기민하였다. 그는 민첩하게 이 기회를 잡아서, 광주에 '위창(闈廠)'을 연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정부에서 조직한 입찰에 참가한다. 제2기 위성도박의 입찰에서 유학순은 마침내 낙찰받는다. 그리하여 1890년에서 1896년까지 6년간 위성도박을 도급받아, 엄청난 이익을 얻는다.

 

'위성'도박은 유학순에게 거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다. 1899년 일본인 친구가 상해에서 유학순을 방문했을 때, 그가 700만은원의 재산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당시 국가재정수입의 10분의 1에 상당했다. 당시에 부호랭킹이 있었다면, 유학순은 분명 독보적이었을 것이다. 국민당 원로인 풍자유(馮自由)는 <혁명일사>라는 책에서 유학순의 당시 영향력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의 금전세력은 선비의 성배를 좌우했고, 관리의 진퇴를 결정했다. 전시에 참가하는 자들도 모두 그에게 의존했다."

 

부유해지면 음욕이 일어난다. 큰 부를 얻은 후, 유학순은 여러 명의 아름다운 첩들을 얻게 된다. 광주 서관 여만에 '유원(劉園)"을 짓고 호화사치생활을 한다.

 

유학순은 강유위와 같은 고향이다. 또한 사적(死敵)이다. 그 원인은 강유위가 1896년과 1898년에 두 번이나 광동총독 담종린을 탄핵하는데, 그 사유가 바로 '거두(巨蠹, 두는 '좀'을 가리킴)" 유학순을 비호하고 그와 한패가 되어 농간을 부린다는 것이다. 유학순은 100만냥은자의 벌급을 내고 어쩔 수 없이 광동을 떠나 항주로 가서 화를 피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강유위를 뼛속까지 미워한다.

 

또 다른 고향사람인 손중산에 대하여 유학순은 자금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1895년, 손중산이 일본에서 귀국하고 제1차무장의거를 일으킨다. 이 기간에, 그는 반청복명의 정치적 야심을 품은 유학순과 알게 된다. 부유한 유학순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고 스스롤르 주원장, 홍수전에 비견하고, 손중산은 단지 서달(徐達)이나 양수청(楊秀淸)이라 여겼다. 손중산의 이후 여러번의 혁명활동에, 그는 자금을 계속 지원했다. 금액은 오천은원에서 오만은원까지 각각 다른데 송금횟수만 30여번에 달한다.

 

<손중산전집>에는 손중산이 1900년 혜주기의 전날 유학순에게 쓴 서신이 수록되어 있다. 서신에서 그는 혁명성공후 유학순에게 '주정(主政)"을 맡기겠다고 한다. 혹은 총통이 되거나, 혹은 황제가 되거나.

 

아쉬운 점은 유학순이 이 서신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국이 계속 변화하면서 그는 점점 정치무대에서 물러난다. 그는 서호에 은퇴하여 호광산색(湖光山色)을 즐기며 독서나 한다.

 

1898년, 유학순은 무당 200은원의 고가를 들여, 항주서호 정가산 남쪽에 호수를 면한 36헥타르의 토지를 매입한다. 이곳에 그는 자신의 모든 정력을 투입하여 개인 별장 "수죽거"를 짓는다. 5년의 시간을 들여 기본적인 건축을 완성하는데, 건축면적은 1,369평방미터이다. 이는 "송장(宋莊)"을 초월하는 서호의 제일명원이 된다. 이 극히 호사한 수죽거'는 바로 나중에 천하에 이름을 떨친 '유장'이다.

 

조화농인(造化弄人)이라고, 나중에 유학순은 날로 쇠퇴하고 경제상황도 일년 일년이 못해진다. 1905년, 즉 '수죽거'를 완공한 그 해에 채무문제로 유장이 압류된다. 어쩔 수 없이, 유학순은 항주를 떠나 상해로 옮긴다.

 

1912년, 민국정부는 유학순이 대청은행에 빋진 대출금이 공금이라고 인정하고 유장을 경매하여 충당하고자 한다. 입찰가격은 2천만냥이었으나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았다. 유장은 그후 절강군정부에서 가져가 공용으로 쓰게 된다.

 

1916년, 절강독군 여공망은 강유위를 항주로 불러 피서하게 안배한다. 거처한 곳이 바로 '수죽거'이다. 1달을 거처한 후, 강유위는 '수죽거'의 북쪽 정가선 및 산자락에 대량의 토지를 매입하여, 유장과 이웃한 곳에 4년의 시간을 들여 자신의 공관 천원(天園)을 짓는다. 즉 강장(康莊)이다.

 

원수 강유위가 '수죽거'에 거처한다는 소식은 유학순의 내심에 상처를 크게 준다. 그리하여 화가 가라앉지 않은 그는 모든 가치있는 부동산을 팔아서, '수죽거'를 되사온다. 그리고 이 곳에 은거한다. 몇년후, 강유위가 세상을 떠나자 유학순은 아주 기뻐한다.

 

1935년 1월 3일, 유학순은 병으로 유장에서 사망하니 향년 81세이다.

 

1953년 유학순의 팔이태(八姨太, 이태는 첩) 범원영(范媛英, 유학순보다 52살이 어리다)이 유장을 국가에 헌납한다. 나중에 개축을 거쳐, 유학순이 살던 유장은 지금의 서호국빈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