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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주원장의 모사 유기(劉基)는 왜 관작을 사양하고 은퇴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4. 7.

글: 노후(老猴)


모사(謀士)는 자기의 지혜로 제왕을 위하여 계책을 내고, 공을 세우는 자이다. 주공의 곁에 머무는 무명영웅이다. 그들의 현저한 특징은 봉헌(奉獻), 공을 내세우지 않고, 관직에 연연하지 않으며,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일을 처리한다. 주나라때로부터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주요한 모사중에서 부귀를 누리지 않고 공성신퇴(功成身退)한 고풍양절(高風亮節)을 지키며 선종(善終)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유방의 모사 장량, 유비의 군사 제갈량, 주원장의 모신 유기등이 있다. 장량은 운주유악, 결승천리를 한 인물로, 주군인 유방조차도 자신이 그만 못하다고 탄식하게 만든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염량세태를 잘 알았고, 상을 받아 관직에 오르기 보다는 병을 핑계로 고향에 물러나서 은거한다. 제갈량은 국궁진췌, 사이후이하면서 분묘를 높고 튼튼하게 만들려 하지 않고 그저 관을 내려놓기만 바랐다. 촉한과 유씨황실을 지키는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썼다. 그러나, 유기의 조용한 일처리는 아주 특별하다. 그는 작위를 고사했고, '공을 이루고 명성을 얻으려하지 않으면서' 은퇴하여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의 이런 거동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공을 세웠다고 자랑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했다. "봉관부당(逢官不當), 유의겸양(有意謙讓)"그러나 그는 출산후에 주원장이 제업을 이루도록 도왔고, 명나라 개국공신의 경력이나 그가 얻었던 봉상을 보면 사실이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주원장의 언행이 불일치하고, 친내배외(親內排外)하며, 봉상불공(封賞不公)하여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과 큰 관계가 있다.


지정20년(1360년), 삼월, 주원장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유비가 삼고초려끝에 제갈량을 하산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청전의 명사 유기를 하산하게 만들었다. 부임한 때로부터 그는 주원장에게 글을 올려 십팔조의 책략을 건의한다. "반드시 이구(二寇, 먼저 동남의 장사성을 멸하고, 나중에 서북의 진우량을 멸한다)를 평정해야 북으로 중원을 얻고 왕업을 이룰 수 있다"는 전략계책이다. 유기는 군무를 주관하며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자문한다. 주원장은 유기를 존중하여 선생으로 부르고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유기를 "나의 장자방(장량)이다"라고 하였다. 실로 군신이 제대로 만나서 물만난 고기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은 유기의 계책을 그대로 실행한다. 유기가 말한 전략적 계책은 한걸음 한걸음 추진하면서 전과를 확대하고 계속 승리를 거둔다. 오원년(1367년) 주원장이 오국공이 된다. 그때 유기는 태사령을 맡는다. 홍무원년(1368년) 정월 사일, 주원장이 황제에 즉위하며, 이선장, 서달을 좌우승상으로 삼고, 동궁관을 겸하게 한다. 유기는 겨우 어사중승 겸 태사령을 맡는다.


유기는 전락기획자로서 하산해서 주원장이 등극할 때까지, 주공을 따라 8년간 출생입사한다. 관직을 받을 때 태사령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선장, 서달등 주원장의 동향인물들은 집행자인데, 승상을 맡는다. 작위도 자신보다 훨씬 높았다. 확실히 불공평한 일이다. 그래서 주원장(명태조)이 측위한 후 팔개월만에, 유기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명태조는 유기가 은퇴하고 물러나려는 심정을 자연히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명태조는 그에게 다시 관직을 맡아줄 것을 간청한다. 홍무원년 십일월, 즉 유기가 고향으로 돌아간지 3개월이 되던 때, 친히 조서를 유기에게 내린다. 유기의 공적을 일일이 언급하면서 북경으로 부른다. 그리고 풍성하게 상을 내리고 조부와 부친도 영가군공으로 봉한다. 유기의 작위도 올려 주려고 하였으나, 유기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서 고사하고 받지 않는다.


유기가 다시 관직을 맡은 후의 여러 가지 사실은 증명한다. 명태조가 그를 다시 부른 것은 그를 중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여러번 작위를 사양한 것도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3년이후, 즉 홍무삼년(1370년) 십일월, 주원장이 공신들에게 작위를 내린다. 6명의 국공(國公, 이선장, 서달, 상무, 이문충, 등유, 풍승)을 봉하는데, 이선장이 수석공작이 된다. 그리고 28명의 후작(侯爵)도 봉한다. 중서우승 왕광양은 충근백(忠勤伯)이 되고, 유기는 국익운과정,문공,자선대부,상호군이 되며 성의백(誠意伯)의 작위를 받는다. 봉록은 240석이다(최저작위인 종삼품의 5백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명나라의 관제에 따르면, 작위는 공,후,백의 삼등이다. 백이 최하등급이다. 유기는 국공에 봉해지지 않았을 뿐아니라, 백작에서도 왕광양보다 뒤의 서열이 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대명자자한 유기가 본봉작위에서 말석을 차지한 것이다. 명태조는 스스로 공신의 순서와 논공행상을 정했다. 그 순서의 선후는 공적의 대소와 관련이 된다. 명태조는 입만 열면 유기가 '나의 장량'이라고 말하면서, 좋은 말은 다 해주었는데, 분봉시의 순서에서는 그를 전혀 중요한 지위에 놓지 않았다. 유기가 명태조의 마음 속에서는 '차이우차(次而又次)'의 지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기의 불만정서에 강정불아, 직언불휘(直言不諱)하여 여러번 명태조의 미음을 산 것도 그가 이런 대우를 받게 된 원인일 것이다.


명태조는 승상을 바꾸는 문제에서도 유기를 갖고 놀았다. 명태조가 '당금의 소하'라고 얘기하던 이선장의 관직은 우승상에 이르고, 한국공에 봉해지다보니 약간은 교만하게 된다. 명태조는 거짓으로 재상을 바꾸려고 한다고 말한다. 유기는 그의 말이 거짓임을 눈치챈다. 그래서 이선장을 그대로 재상의 직에 남겨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명태조는 유기를 우상에 임명하겠다고 말하니,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기둥을 바꾸려면 반드시 큰 나무를 써야 합니다. 만일 작은 나무로 기둥을 삼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됩니다. 신은 실로 작은 나무이니, 어찌 재상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고사한다. 명태조는 다시 묻는다: "양헌(楊憲)은 어떤가? 왕광양은 어떤가? 호유용은 어떤가? 이렇게 계속 묻는데에는 숨은 의미가 있다. 생각해보라. 주원장을 보좌하여 제업을 이루게 해주고 이름을 천하에 떨쳤으며 주군에 의하여 '나의 장량이다'라고 불리던 모사가 어찌 이런 말에 숨은 의미를 모르겠는가? 분명히 자신의 충성도를 시험하려는 것이다. 만일 명태조가 자신을 재상에 앉힐 생각이 있었다면, 양헌, 왕광양, 호유용 3 사람이 어떤지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태조의 뜻을 유기는 일찌감치 알아차린다. 자신이 재상이 되어 자신을 이용하여 이선장을 제거하려는 것이고, 자기를 살수로 쓰려는 것이다. 그래서 유기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런 불의한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홍무4년 정월, 다시 고향으로 물러난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유기가 은퇴한 후, 아주 조용히 지내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한다. 그는 바둑, 술, 시문을 즐기면서, 한번도 자신의 공적을 내세운 적이 없다. 고향의 백성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의 모습을 보려고 찾아와도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승상이 된 호유용의 암산을 당하고, 그가 고향에서 '왕기'가 있는 묘지를 차지했다는 모함을 받는다. 그리하여 주원장의 의심을 사게 되고, 봉록을 박탈당한다. 나중에 우울증이 도지고, 명태조의 묵인하에 호유용이 그를 독살한다. 홍무8년(1375년) 사월십육일 사망하니 향년 65세이다. 이때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지 겨우 4년여 되던 해이다.


부록: 육공, 이백의 관적 및 관계


이선장(李善長). 안휘 정원 사람. 주원장의 사돈(임안공주의 시아버지)

풍승(馮勝). 안휘 정원 사람.

상무(常茂). 안휘 정원 사람. 풍승의 사위

서달(徐達). 안휘 호주(濠州) 종리(鍾離) 사람

이문충(李文忠). 강소 우이(盱眙)사람. 주원장의 외조카

등유(鄧愈). 안휘 사수(泗水) 사람. 원명 등우덕(鄧友德). 주원장이 등유라는 이름을 내림.


왕광양(汪廣洋). 강소 고우(高郵) 사람

유기(劉基). 절강 청전(靑田) 사람


이상의 상황을 보면, 주원장은 누구를 가까이 하고 누구를 멀리 했는지 알 수있다. 친내배외하였다. 이선장이 공작의 으뜸이 되었지만, 나중에 주원장이 제거한 것이라든지, 유기가 배제된 것등도 이상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