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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삼국소인물(9): 진도(陳到), 융중대(隆中對)의 발명자

by 중은우시 2018. 6. 28.

글: 진창(陳創)


진도(180-230), 자는 숙지(叔至), 여남(汝南) 사람이다. 그는 촉국에서 조운(趙雲)보다 뛰어난 맹장이다. 그는 유비의 근위통령이었으며, 유비의 안전을 책임졌다. 그는 삼국시대 5대정예부대중 하나인 백이병(白毦兵)을 훈련관 겸 지휘관이다. 그가 이 강력한 부대를 훈련시킨 것이다. 그는 광세기재(曠世奇才)이다. 그러나 역사서에 그에 대한 기록은 아주 적다. 그는 장기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으나, 삼국연의에는 그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그의 정치생애는 어떠했을까? 아래에서 삼국명장 진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진도가 유비에게 투신할 때, 유비는 예주(豫州)에서 인재를 모으고 있을 때였다. 유비는 이 영준하고 용맹한 16세 소년을 보고, 첫눈에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 진도는 얻기 힘든 장수재목이라고 여기고, 진도를 그의 부장(副將)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그가 서주에서 데려온 인력(백이병)을 훈련시키게 한다. 이렇게 진도는 자신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삼십여년의 생명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진도는 평생동안 군사분야에서 무슨 큰 업적을 낸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유비의 친위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유비의 사후에 계속하여 호분군(虎賁軍)을 이끌고 촉한의 동부변경의 방어를 담당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몇 개의 전투만 언급할 수가 있다.


당양지전(當陽之戰): 유비는 자신의 가족과 부대 그리고 백성을 데리고 남부형주로 간다. 뒤에는 조조의 추격병이 따라오고 있었다. 진도는 유비와 그 가족의 안전을 보호하며 철수했다. 그러나 조조와 유비는 교전을 시작하고, 진도와 유비 그리고 유비의 가족이 흩어지게 된다. 진도는 그 자리에서 과감하게 결정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비의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계속 유비를 엄호하며 철수한다. 그리고 조운이 앞으로 가서 유비의 가족을 찾는다. 마침대 진도가 죽음을 무릅쓰고 보호해서, 유비는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유비가족도 조운의 보호로 안전하게 철수한다. 비록 중도에 무슨 큰 적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진도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유비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탈익지전(奪益之戰): 익주전투에서 유비가 낙성(雒城)을 포위공격한다. 진도는 부대를 이끌고 장임(張任)이 성을 나올 때, 그를 습격하여 죽인다. 이렇게 그는 낙성을 함락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릉지전(夷陵之戰): 촉장 진도는 부동(傅)등을 위하여 복수하겠다고 맹세한다. 백제성 밖 백리지점에 원비각(猿譬角)이라는 곳이 있다. 진도는 칠백의 백이 장모(長矛) 병사들에게 한 사람당 2장 길이의 장모 1개, 안령도(雁翎刀) 1개를 지니게 하고 3개 분대로 나눈다. 왼쪽은 노위와(蘆葦窪), 괴석군 속에,  오른쪽은 구오(丘塢), 왜목총(矮木叢) 안에 각각 이백의 경갑병을 매복시키고, 나머지 삼백의 정예기병은 자신을 따라 중로이 입구 옆의 높은 언덕에 주둔한다. 오군(吳軍)이 추격해 왔는데, 선봉은 주재(朱才)였다. 그는 오나라의 노신 주치(朱治)의 장남이다. 전종(全綜), 이이(李異)의 두 장군이 중대(中隊)를 이끌고, 주환(朱桓), 주연(朱然), 유아(劉阿), 유타(劉陀)가 후방을 맡았다.병력은 거의 만명에 이르렀고, 기세가 흉험했다. 오군이 도착할 때, 촉군병사중 장모병이 길입구를 막고 맞이한다. 진도는 손에 장오수문창(丈五水文槍)을 쥐고 크게 소리친다: "오적(吳賊), 너무 심하게 괴롭히지 말라." 오나라장수 주재는 혈기방장하여 말을 달려 앞으로 가 월극(月戟)을 들고 싸운다. 진도와 몇삽을 겨루기 전에 진도는 거짓으로 패배한 척하며 물러간다. 오나라기병은 주재를 따라 앞다투어 길안으로 들어선다.


이이, 전종도 따라서 진격했다. 이이는 크게 소리친다: "바로 밟고 지나가라. 오늘 내로 유비를 생포하자!" 전종은 비록 마음 속으로 의심이 들었지만 역시 따라서 돌진한다. 원비각의 중심지역에 이르렀을 대, 촉군의 복병이 크게 일어나며, 양쪽에서 긴창을 찔러온다. 그 긴창은 아주 악독했고, 날카롭게 베어갔다. 오나라병사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놀라서 어쩔 줄 모르며 쓰러져간다. 길이 원래 좁은데다가, 기병이 창의 공격을 받다보니 기병들이 속속 낙마한다.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부딛친다. 깊이 들어온 자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직 길에 들어서지 않은 자들은 들어가야할지 말아야할지도 몰랐고, 길을 조금만 들어온 자들은 뒤로 물러나려고 하였고, 길입구에 있던 자들은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나라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지고, 진도의 그 이백명은 몸을 돌려 다시 맹렬하게 공격한다. 한명한명이 모두 일당십이었다. 진도는 주재를 향해 달려간다. 주재는 나이도 젊고 용맹하여, 전세가 위급한 것도 돌보지 않고, 반격하기 시작한다. 십합도 싸우기 전에, 진도의 그 수문장오창이 힘을 발휘하자, 주재는 버티지 못한다. 그는 죽어라 말을 돌려보니 빈틈이 한 군데 있었다. 거기로 도망친다. 진도는 혼전가운데 돌진해 들어가니 아무도 막지 못한다. 부딛쳐 가면서 수십의 기병이 쓰러진다. 이이는 놀라서 급히 맞이했다. 그러나 진도와 삼합도 싸우기 전에 창을 맞아 낙마하여 죽는다. 전종은 이미 상처를 입고 길밖으로 도망친다. 오나라기병은 절반이나 죽었고 ,촉군의 양쪽 사백명의 병사가 동시에 몰려나와서 촉군을 추살한다. 진도의 말은 빨라서 전종이 죽어라 도망치는 것을 본다. 활을 쏘아 어깨를 맞힌다. 주재는 놀라서 남은 기병으로 전종을 호위하여 힘을 다해 도망친다.


진도는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가 길입구 바깥의 주환, 주연의 앞까지 달려간다. 오나라군대의 보병은 기병에 짓밟히자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투지는 사라졌다. 주연은 전종이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 주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것을 보자 두 사람을 급히 맞이한다. 이이가 이미 전투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주환은 쌍도를 들고 진도를 막는다. 오,칠합만에 힘이 부쳤다. 주연은 유아, 유타로 하여금 전종, 주재를 보호하게 하고 자신은 주환을 도우러 간다. 어찌 알았으랴 삽시간에 남북에서 각각 군마가 나타나 황야를 태우는 불처럼 밀고 들어왔다. 오나라군대는 놀라서 소리친다: 조자룡이 왔다. 과연 북쪽에는 조운, 남쪽에는 뇌경(賴敬)이 양로로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다. 주환,주연은 두 명이서 진도 한 명과 싸우기 때문에 아직 낭패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바로 당황하여 흐트러진다. 유아, 유타가 이를 악물고 도우러 간다. 전종은 말등에 엎드려서 꼼짝도 못했다. 주재는 분연히 다시 말을 갈아타고 나서서 뇌경을 막는다. 주연은 스스로 조운을 막으러 나선다. 조운의 말이 도착하여 창을 한번 휘두르자 주연의 투구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다. 주연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말을 빼서 동쪽으로 달려간다. 주환은 일찌감치 계속 싸울 생각이 없었다. 몸을 돌려 도망친다. 유타가 급히 손발을 놀리고 있을 때, 조운이 달려오면서 손을 들어 창을 휘두르자 유타는 창에 찔려 죽는다. 유아는 도망칠 곳이 없어졌다. 진도가 소리치며 수문창을 휘둘러 유아의 인후를 잘라버려, 죽음을 맞이한다. 진도는 부대를 이끌고 이리(二里)를 살륙하고 멈춘다. 동쪽을 보고 크게 옷으며 소리친다: "세 마리의 돼지와 한 마리의 개(三猪一犬). 집으로 돌아가서 고기를 잘 찌워놓아라!ㅃ" 진도는 유비를 안전하게 보호하여 백제성까지 퇴각한다. 만일 진도가 없었더라면, 유비는 아마도 육손(陸遜)에게 생포되었을지도 모른다.


진도는 군사적으로 얘기할 다른 것은 없다. 어쨌든 사료가 너무 부족하다.

역사상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양희(楊戱): "정서충극(征西忠克), 통시선사(統時選士), 맹장지열(猛將之烈)"(<삼국지>)

둘째, 배송지(裴松之): "이충용칭(以忠勇稱)" (<삼국지.배송지주석>

셋째, "진도가 지휘하는 부대는 선제(유비) 산하의 정예부대이고, 촉국의 상등부대이다", 제갈량이 제갈근에게 보낸 서신에 나오는 말 <제갈무후전>


첫째 평가를 보면, 진도는 촉한의 조운에 비견할만한 맹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유비에게 아주 충성스러웠다. 관우처럼 유비를 배반한 전과는 없다.

둘째 평가를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진도는 용장이며, 충후하고 성실했다는 것을.

셋째 평가를 보면, 진도가 촉한의 정예병을 잘 훈련시키고 지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진도의 이미지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키는 170-185 사이가 될 것이고, 체중은 70-85 사이가 될 것이다. 용모는 그다지 추하게 생기진 않았을 것이고, 몸은 건장했으며, 성격은 충후하고 착실하며, 용맹하고 전투를 잘했다.


앞에서 진도는 장기적인 안목이 있다고 말했는데, 무슨 의미일가? 주로 진도 버전의 융주대와 그가 구상한 흥촉지로(興蜀之路)때문이다.


진도의 융중대는 적벽지전이 일어나기 1년전에 유비와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나왔다. 진도는 이렇게 생각했다: "조조는 단기간내에 칭제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조조가 만일 칭제한다면 그것은 그가 삼류일손(三劉一孫)을 멸망시킨 이후일 것이다. 그는 유비가 즉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보았다. 유표의 병이 위중한 틈을 타서, 먼저 형주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손권과 결맹을 맺는다. 북으로 대장을 파견하여 형주를 지키고, 그후에 남쪽을 개척한다. 교주의 오랑캐땅을 점령한다. 교주를 기반으로 하여 익주를 기습한다. 그리고 마초와 결맹을 맺어 장안을 기습한다. 황하를 따라 내려가서 낙양, 허창을 점령한다. 먼저 조조를 멸하고, 다시 손권을 멸한다. 이렇게 천하를 통일하면 시간문제이다. 그러나, 당시 유비는 어떻게 조조에 맞서 싸울까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어서, 지도의 융중대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진도의 융중대에 나온 구상을 살펴보자: 전체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형주를 취한다 -- 남으로 교주를 빼앗는다 -- 익주를 차지한다 -- 북으로 장안을 차지한다 -- 다시 사주(司州)를 빼앗는다 -- 먼저 조조를 멸하고 다시 손권을 멸한다.


진도의 이 계획은 당시의 실제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전체구상은 괜찮고, 제갈량의 융중대와도 여러가지 비슷한 점이 있다.


두번째로 진도가 유비에게 건의한 때는 유비가 이릉지전에서 패배한 후의 일이다. 그는 영안(永安)에서 유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재 촉국은 이릉지전의 패배로 원기가 크게 상했다. 아마도 몇년내에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재는 촉국의 남부 미개발지역 소위 '오랑캐의 땅'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하여 촉국의 남부 도시개발에 힘쓰고, 백성을 남하시켜 개간하게 해야 한다. 자식을 많이 낳도록 장려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20년안에 촉국이 흥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유비는 이릉지전에서의 패배후 매일 눈물로 지내고 있고, 그 본인도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어서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우리는 진도의 이 건의를 분석해보자. 이 건의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운남, 동남아는 토지가 비옥하여 경제발전에 유리하다. 만일 당시에 유비가 이 토지를 개발했다면 아마도 동남아도 지금의 중국판도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얼마 후에 유비가 죽는다. 제갈량은 진도를 데리고 북벌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진도를 영안으로 보내어 도독으로 임명한다. 나중에 230년 제갈량의 북벌이 연이어 실패하고, 장수들이 연이어 죽어갈 때, 그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쓴다. 서신에서는 이런 생각을 표시한다: 자신이 영안의 군대를 이끌고 촉의 남부로 가서 개발하겠다. 남부로 확장해서 촉국의 남부를 경제의 중심으로 삼고, 북부는 방어의 중심으로 삼는다. 이렇게 하면 20년만에 촉국의 경제, 인구는 크게 발전할 수 있다. 촉국의 경제중심을 남쪽으로 옮기면 촉국내부의 각 씨족간의 갈등도 완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진도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제갈량이 이 서신을 보고 진도가 자신의 사람과 세력을 키우려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촉국의 후방에 자신의 인마를 양성하고 정부에서 독립한 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진도에게 회신을 보내는데 글자를 한 자도 쓰지 않았다. 진도는 이를 제갈량이 자신에게 죽으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는 촉한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백포를 대들보에 걸고 자결한다. 이렇게 뜻도 이루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한다. 제갈량은 진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충신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했다고 후회했으나,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진도가 병사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백성들이 제사지내는 것도 금한다. 나중에 일부 대신들이 이에 관해 반대의견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제갈량의 압박으로 결국 모두 포기한다.


촉국은 사관(史官)을 두지도 않았고, 제갈량이 진도를 숨겼기 때문에 진도의 사적은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했다. 진수가 삼국지를 쓸 때도 이 반세기전에 촉국에서 크게 명성을 떨친 명장에 관한 자료를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삼국연의에서 나관중은 조운을 신격화하는 것을 선택하여 진도가 푸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단했던 인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