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황보밀(皇甫謐): 중국 침구학(鍼灸學)의 비조

by 중은우시 2018. 6. 20.

글: 금릉물(金陵物)


침구학의 발전사를 얘기하자면, 부득이 침구역사의 중요인물인 황보밀을 언급해야 한다. 황보밀은 서진(西晉)시기의 저명한 사학자, 문학가, 철학가이다. 그리고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의 작자이다. 현재 중의중 침구학은 바로 그의 이 저서의 기초 위에서 발전되어 내려온 것이다. 황보밀은 침구학의 비조라 할 수 있다.


이 의학의 대가가 이 의학저작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스스로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


황보밀은 황보씨집안에서 태어났다. 동한의 명장 황보규(皇甫規), 삼국시대에 가장 먼저 나타난 대장 황보숭(皇甫嵩)은 모두 그의 선조이다. 황보밀의 시대에 이르러, 집안은 몰락하고, 장수집안이라는 옛날의 영광은 사라졌다. 황보밀의 부친인 황보숙후(皇甫叔侯)는 겨우 거효렴으로 관직에 나갔고, 황보밀이 출생한 후에는 숙부에게 양자로 보내어진다.


황보밀의 일생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소년 황보밀은 아주 장난꾸러기였다.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매일 하는 일없이 놀았다. 나중의 근면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를 바보로 여기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를 아끼던 숙모 임씨(任氏)는 가슴이 아팠다.


하루는 황보밀이 몇 개의 과일을 임씨에게 건넨다. 이를 통해 효성을 나타낸 것인데, 임씨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너는 이미 스물이 되었는데 매일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아무런 교양도 없는 무뢰배같지 않느냐. 몇 개의 과일로 어찌 내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너는 누습을 바꾸고 공부를 열심히 해라.


임씨는 황보밀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황보밀은 창피하면서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때부터 공부에 정진하여, 유학의 대가가 된다.


황보밀의 두번째 단계는 책에서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책을 들고 농사를 짓는다. 병을 앓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깨달음을 얻은 황보밀은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 나갔다. 농사를 짓거나 병을 앓을 때도 책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별명이 하나 붙는다. "서음(書淫)" 그는 장난꾸러기 소년에서 "침정과욕(沉靜寡慾)"의 학자로 성장한다. 황보밀은 수십년을 하루처럼 공부하여 마침대 위진시대의 문단의 거장이 되었다. 그러나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는다.


황보밀은 동한때 태어나서, 위진때 성장했다. 그때는 전란이 빈번했던 시기이다. 명사들 중에서 선종(善終)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인 원인으로 피살되거나 유배를 갔다. 선종을 하려면 반드시 정치를 멀리 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황보밀이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이유이다.


정도를 걷기 시작한 후 곁에 있던 사람중 누군가가 사람들과 교류를 많이 해서 인맥을 쌓으라고 충고한다. 황보밀의 대답은 이러했다: 농사를 짓고, 책을 읽는게 얼마나 좋으냐. 왜 하필 명리를 다투려 하고, 관직에 오르려 하는가. 황보밀은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황보밀의 사촌형제인 양류(梁柳)가 성양태수(城陽太守)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황보밀에게 그에게 송별선물을 할 것을 권한다. 이때 황보밀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가 포의일 때 나는 그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재 그에게 그렇게 한다면, 성양태수에게 잘보이려는 것이나 양류에게 잘보이려는 것이냐. 그러고는 가지 않았다.


조위의 후기에, 조정에서는 38명의 산림은사를 조정으로 불러 관직을 내린다. 황보밀도 그 명단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거절한다. 나머지 37명은 모조리 관직을 받았다.


서진 초기에 진무제 사마염도 '조서를 내려 그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황보밀은 역시 거절한다.


1년후, 사마염은 다시 황보밀을 부른다. 이번에도 그는 병을 핑계로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사마염에게 한 수레의 책을 빌린다. 이를 통해 자신은 집에서 책을 읽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후 사마염이 여러번 그에게 태자중서자, 저작랑, 사례교위공조등의 관직을 내렸지만, 황보밀은 모두 거절한다. 282년이 되어 그가 병사할 때까지 그 어느 관직도 받지 않는다.


권력귀족에 빌붇지 않고, 정치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글을 읽고 책을 썼다. 이것이 바로 황보밀의 "서음" 인생이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황보밀은 저술이 아주 많다. 후인들은 "진나라때 책을 많이 쓴 사람을 따지자면 황보밀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말하게 된다.


우선, 황보밀은 문학가이며 사학가이다.


권력자의 부름을 거절하기 위해, 황보밀은 많은 글을 써서 자신의 심정을 밝힌다. 예를 들어, 유명한 <현수론(玄守論)>, <석권론(釋勸論)>, <독종론(篤終論)>의 삼론에서 그는 내심의 도를 견지하고 진보된 장례개념을 내놓는다. 그는 일생동안 저작이 풍부한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제왕세기(帝王世紀)>이다. 이 책은 위로는 삼황으로부터 아래로 한위에 이르기까지 역대제왕의 사적을 썼을 뿐아니라, 고대의 농업생산, 국토면적, 인구증감등 방면에 대하여 대량의 연구를 했고, 후인들이 사회경제를 연구하는데 많은 토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당송이전에 아주 중시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황보밀이 문학사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서진에서 대명이 자자한 명신 장궤(張軌), 지우(摯虞), 좌사(左思), 이밀(李密)등이 모두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음으로, 황보밀은 철학가이다. 황보밀은 <주역해>를 편찬한다. 이를 통해 천지만물의 원시를 토론하고, 참위학설을 받아들인다. 자신의 인생관, 천지관, 국가관, 민족관이 그 안에 들어 있고, 은일불사(隱逸不仕), 국가민족의 통일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황보밀은 현대침구학의 비조이다. 황보밀은 본인의 몸이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질병을 앓아서, 몸의 반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오른쪽 다리가 짧았다. 나중에는 몸이 붓고 사지가 쑤셨다. 병마로 아주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다. 부득이 오석산을 먹고 통증을 완화시키고, 심지어 자살하려는 생각까지 한다.


마지막으로 황보밀은 고통가운데 분기하여 전인의 <영추(靈樞)> <소문(素問)>등 의학저작을 기초로 <침구갑을경>을 저술한다. 이 책은 고대이건 현대이건 모두 의학의 경전으로 취급된다. 내용에는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의 여러 학과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각종 침을 놓는 원칙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선인들이 연구해놓은 백여개의 혈위를 349개로 증가시킨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면서 세상사람들의 질병도 치료했다.


당연히, 황보밀이 후인들에게 남긴 것은 이들 문학저작과 <침구갑을경>만은 아니다. 그가 역경 가운데 자강불식한 굳건한 정신은 모두 후인들이 배워야할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