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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하안(何晏)은 누가 죽였는가?

by 중은우시 2018. 6. 10.

글: 시습사사(時拾史事)


하안은 조조의 양자인데, 나중에 조조의 사위가 된다. 그는 조위정권에서 아주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 동시에, 하안의 학문수양도 아주 높았다. 그는 천하의 명사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유학에 정통하면서 현학에도 조예가 깊어 위진시대 유유입현(由儒入玄)의 문화기풍을 열었고, 사상문화사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제왕(齊王) 조방(曹芳) 시기에 조상(曹爽)이 세력을 잃은 후, 하안은 조상의 일당으로 취급되어 정권을 장악한 사마씨에게 살해당한다. 사마의 부자가 왜 하안을 죽였는지에 대하여 <삼국지>의 기록은 의문투성이여서 연구해볼 만 하다.


1. 역사배경


삼국은 고립된 역사가 아니다, 앞으로는 동한을 잇고, 뒤로는 양진남북조를 연다. 전후의 역사를 연결시키고 당시의 사회상황을 고려해야 비로소 역사인물의 행위와 동기를 통찰할 수 있고, 역사의 진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동한에서 남북조까지, 정치,경제,사회기풍,문화예술의 어느 분야라 하더라도, 명문거족의 시대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명문세가는 이 역사시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중요한 사회변동은 명문세가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다만 이런 명문세족의 시대에 하나의 이례적인 정권이 들어선다. 바로 조위(曹魏)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조조는 관료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출신이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명문세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삼국지.무제기>에는 조조의 부친인 조숭은 출신이 불명하다고 되어 있다. 족보도 없어, 일반백성과 같다는 것이다. 진림(陳琳)은 <위원소격예주>에서 조조를 "췌엄유추(贅閹遺醜)"라 욕한다. 환관에게 양자로 들어간 더러운 족속이라는 뜻이다. 이는 명문세족들의 서족(庶族)에 대하여 경멸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말이다.


동시에 조조는 일방에 할거를 시작한 이래 명문세족과 호족을 억제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쓴다. 이런 방법은 조조의 개인적인 호오도 있겠지만, 현실적인 필요가 있었다. 동한말기의 난세에 인구가 감소하였다. 진군(陳群)은 "지금의 난세이후 인민이 줄어들어 한의 문경지치때와 비교하면 1개의 큰 군(郡)에 불과하다." 장제(蔣濟)도 이렇게 말한다: "지금 비록 12개주가 있지만, 백성의 수는 한나라때의 큰 군 1개에 불과하다." 인구감소는 전란에서 죽어서인가? 완전히 그런 것같지는 않다. <진서.지리지> 및 <통전.식화>에 따르면, 서진이 통일한 후 인구가 조위때 비하여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인구가 격감한 것은 그저 통계숫자상의 격감이지 실제로는 인구유실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즉 인구는 국가호구본에 등기된 인원이 줄어든 것이라고 봐야 한다.


유실되었다면 어디로 갔는가? 명문세족의 비호 아래로 흘러들어갔다.


당나라 중말기에 양세법을 시행하기 전에, 역대왕조는 모두 인두세를 거두었다. 호구등기는 실로 세금을 거두고 요역을 시키기 위한 근거였다. 세족은 사사로이 인구를 거두고, 보고하지 않는다. 호구에 올리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국가의 세원, 병원은 크게 손실을 입는다. 경제, 군사실력도 약화된다. 그래서 조조는 둔전정책을 실행하여 둔전에 여러가지 특권과 우대조치를 해준다. 물자를 축적하는 것 이외에 세족에게서 인구를 빼앗아 옴으로써 경제기반상 세족으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세족을 억제하는 것은 국가에 이롭다. 그러나 진나라는 이런 이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세족이 발전하도록 놔둔다. 그리하여 수백년의 부패한 세족정치가 나타나고 황위는 세족들의 손에 놀아난다. 이를 보면 조조가 선경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족을 억제하는 정책은 조위의 입국지본이다. 조조이후 조비, 조예가 모두 관철한다. 조비는 여러번 직접 광릉에서 손오를 친다. 그러나 당시 손권은 무창을 도성을 삼고 있었고, 광릉은 강의 너비가 넓어서 도강하기에 적당한 곳도 아니다. 이를 보면 조비의 뜻은 오나라를 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청주, 서주의 세족호족세력의 병력을 빼앗는데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를 통하여 조조가 남긴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조예는 사람을 동원하여 궁전을 짓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는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 이외에 요역을 부과하면서 호구를 다시 조사하여 세족들이 호구를 숨기는 것을 막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조예의 황비 우씨(虞氏)는 일찌기 "조씨가 스스로 비천한 자를 세우는 걸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는 조씨 3대가 모두 세족들과 통혼하지 않고 고의로 세족과 거리를 두었던 것을 원망하는 말이다.


세족이 아닌 조씨정권에 대하여 하내호족출신인 사마의는 마음 속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조가 그를 불렀을 때,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사마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분명히 그는 원소가 조조를 토벌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 후에 대세족인 원씨의 밑에서 일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조조가 원소를 이기고, 북방을 평정한다. 그래서 사마의는 부득이 "두려워서 직위를 받았다" 확실히 사마의는 진심으로 조씨를 위하여 일한 것이 아니다. 그는 마음 속을 항상 딴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는 죽어라 위장한 것이다. 조조같은 고수까지도 그에게 속아넘어간다. 그리하여 세족세력의 시한폭탄은 조위정권의 심장 속에 설치된 것이다. 시간만 되면 조위라는 평민정권은 폭발되어 가루가 되어 버릴 것이다.


2. 하안은 조상의 일당인가?


앞에서 이렇게 많은 얘기를 한 것은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즉 세족과 평민서족간의 복잡한 투쟁 가운데 하안의 죽음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안은 조상의 일당이라고 본다. 사마의가 조상을 제거하려면 자연히 하안을 죽여야 한다. 이것은 진수(陳壽)의 관점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근거로 삼은 것은 진나라의 관방자료이다. 거기에는 분명 하안사건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사마씨가 장악한 사법기관이 내린 결론이고, 사마씨 정권장악의 합법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래서, 진수는 교정의 여지가 없이 그대로 옮겨적을 수밖에 없었다.현재 우리가 보는 <조상전>의 하안에 관한 부분은 여러번 "안등(晏等)"이라고 되어 있다. 하안과 등양(鄧颺), 정밀(丁謐), 이승(李勝)과 완전히 혼재시켜놓았다. 그리하여 하안 개인이 이 집단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고, 개인책임을 모호하게 적었다. 그저 일군의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인정하였는데, 이는 사람에게 없는 죄를 떠안기는 관용수법이다. 그러니 믿기가 어렵다. 만일 우리가 <조상전>이외의 자료를 많이 찾아본다면, 발견할 수 있다. 하안의 정치적 입장과 조상집단은 완전히 일치하지는게 아니다.


(1) 조위의 기본국책은 세족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 국책은 조상이 보정할 때도 관철되었을까? 역사에 명확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사서에서의 흔적을 통해서 약간 추측해볼 수는 있다.


<삼국지>에서는 자주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조상등이 "옛 제도를 여러번 바꾸었다." "가볍게 법도를 고쳤다"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고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상과 가까웠던 하후현(夏侯玄)이 폐해를 통렬히 비판한 말을 보면, 이들 바구고 고친 것은 세족에 대한 일부 신정책 신조치일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동진의 환온, 유유가 시랭한 허명을 억제하고, 호구를 조사하는 것같은 류의), 그래서 세가대족의 반감을 샀을 것이다.


조상은 평범한 인물이지만, 그의 주위에는 인재들이 있었다.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등양이 '소유사명(少有士名)했다"고 되어 있고, 정밀이 "파유재략(頗有才略)하다."고 했고, 필궤는 "문아지의(文雅智意)하다"고 했으며, 이승은 "아유재지(雅有才智)하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명성을 날린 자들이니 자연히 업적을 내고 싶엇을 것이고, 사회개혁을 실행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지도자가 박력이 없어, 개혁은 실패하고, 이들은 관방문건에서 당파를 모아서 헛소리나 한 정치깡패로 묘사되었다. 이 부분은 의혹이 많다.


하안을 보면 그는 모조리 세족공자(世族公子)의 모습이다.


첫째, 하안은 대장군 하진(何進)의 손자이다. 출신이 황친이다. <세설신어>의 기록에 따르면, 하안은 일찌기 조조의 집안에 땅을 받아 집을 지었는데, 조조의 양자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태평어람>은 <하안별전>을 인용했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안은 조조의 여러 아들들과 서로 다른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는 서로 다른 족은 같이 앉지 않는 것이다." 이를 보면, 하안은 자신의 집안에 자부심이 강했고, 조씨를 멸시했다. 이는 사마의의 태도와 아주 닮았다.


둘째, 하안의 생활태도를 보면, 분을 바르고 화장을 하며, 길을 걸을 때 그림자를 살패며, 약을 지어 먹고, 현학과 도를 논한다. 이는 완전히 위진시대 세족의 타입이다. 조조의 '실질을 숭상하는" 풍격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셋째, 하안은 계속 "효"를 표방하는데, 소위 "효"는 당시 이미 세족이 문벌을 유지보호하는 이론도구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오로지 재능이 있으면 뽑는다"는 원직을 내세운 것이다. 각지에서 "불인불효하더라도 치국용병의 재주가 있으면" 추천하라는 것이다. 이는 세족인 사마씨와 정반대의 태도이다. 사마씨는 자칭 효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당나라 유지기의 <상효경주의>에서는 사마의가 일찌기 조방에게 상소를 올려 "조령을 내려 유학자들로 하여금 효경에 주석을 달도록" 청한다. 그리고 <수서.경적지> 및 <경전석문.서록>의 기록을 보면, 이 <효경주>를 편찬하는 유학자들 중에는 하안이 있다. 하안의 또 다른 대표작은 <논어집해>인데, 역시 사마씨의 심복인 정충(丁沖), 순의(荀顗)와 합작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안은 조씨와 문화배경이 크게 다르다. 오히려 사마의와 비슷한 점이 있다.


(2) 조상이 보정하기 전에, 하안의 지위는 조상보다 훨씬 높았다. 나이나 배분을 보더라도 하안은 조상 수하의 등양등과 같은 급이 아니다. 하안이 조상의 '심복'이나 '일당'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안은 조씨공자들과는 맞지 않았다. 조비는 심지어 그를 "가자(假子)"라고 욕한다. 조예때, 부마도위로 실권이 없다. 다만 지위는 아주 높았다. 신구 <당서>는 모두 하안이 <위명제의시표>를 썼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증에 의하면 <북당서초>에서 글을 인용하고 있다: "하안의 <위명제의시표>에서 말하기를, '안팎에서 러 신하들이 논의하는데 명(明)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를 보면, 조예가 죽은 후 여러 신하들이 그의 시호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 논의하는데, 하안이 주재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이때의 하안은 조씨황족의 어른이다. 그의 지위는 조상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나이로 보면, 하안은 조비, 조진과 비슷하다. 조상은 그를 '숙부' 혹은 '고모부'라고 불러야 한다.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이렇게 적었다. "(하안)이 지정초기에 이르러, 조상에 곡합(曲合)하였다. 또한 그의 재능으로 조상이 그를 산기시랑으로 쓰고, 시중, 상서의 직으로 옮겼다." 여기서 '곡합'이라는 기술로 봐서, 하안이 손윗사람이면서 손아래사람이지만 권력을 얻은 조상에 영합하여 비로소 권력을 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예는 경초3년 정월에 죽는다. 조방이 즉위한 후 그 해에는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지정초기라는 말을 보면 하안은 최소한 1,2년은 망설이다가 비로소 조상에 영합한 것으로 보인다. 하안이 조상과 가까워지는데는'곡합'했는데, 어찌 등양등 어린 친구들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일 수 있겠는가.


(3) <삼국지.조상전>에서는 "하안은 전선거, 필궤는 사례교위, 이승은 하남윤으로 여러 일들을...."이라고 하여, 하안을 필궤, 이승과 묶어서 모호하게 적었다. 마치 사마의의 하야가 하안, 필궤, 이승 세 사람때문인 것처럼 적었다. 이런 서술방식은 엄격하지 못한 것이다. <삼국지>의 곡필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진수는 자신이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정밀이 계책을 세워서, 조상으로 하여금 천자에게 말하게 했고, 조서를 내려 사마의를 태부로 삼았다. 겉으로 명호는 높아졌지만 안으로는 권한을 잃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보면 사마의의 하야는 정밀의 계책인 것이 분명하다. 하안은 바로 얼마 전에 막 조상에 '곡합'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극비이며 중대한 계획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4) 하안은 이부상서를 맡아서 간부선발업무를 처리하는데 아주 성적이 좋았다. 등양등이 재물을 탐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삼국지.부함전>에는 부함이 하안을 이렇게 칭찬한다: 정시때 하안이 선발을 맡으니, 내외의 많은 직위에 각각 맞는 인재가 앉았다." 다만 <삼국지. 조상전>은 <위략>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안은 상서로 관리선발을 맡았다. 그와 교분이 있는 자들이 많이 발탁되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기록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할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 <부함전>이 비교적 믿을 만하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조상전>의 자료의 근원은 관방의 사건자료일 것이다. 부함의 부친 부현, 종형 부하는 모두 사마씨의 심복인데, 하안에 대하여 좋게 말할 동기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보면, 부함의 평가가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동시에 <위략>은 그 자체로 하안을 위하여 변호하고 있다. "하안이 사람을 제대로 고르지 못한 것은 풍양이 공정하지 않아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같은 죄를 지은 것이 되었지만, 사람을 제대로 사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하안의 용인기준은 등양과 달랐는데, 그의 업무에서 등양의 간섭으로 두 사람은 비슷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5) 하안은 조상의 개혁정책에 찬성하지 않았다.


<소명문선>은 응거의 <백일시> 한수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선이 주석하여 인용한 <문장서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조상은 여러번 법도를 어겼고, 응거는 시로서 이를 풍자했다." <삼국지.왕찬전>에서는 <진양추>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응거의 <백일시>에는 130여편이 있는데, 이느 당시에 영향이 컸던 시리즈물의 정치문학작품이고, 주로 조상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심조룡>은 <초국선현전>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여남 응목련(응거)은 <백일시>를 지었다. 시사를 풍자했다. 당사자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모두 놀라고 의심했다. 혹은 불태워버려야한다고 여겼다. 하안만이 뭐라고 하지 않았다."


(6) 하안은 조씨와 사마씨와의 사이에서 사상적으로 큰 위기감을 느꼈다.


하안의 시에서 우리는 그의 곤경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하안은 조위황실의 인척이므로 사마씨의 신임을 받을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조상의 정책에 반대한다. 사상적으로는 사마시에 더욱 가깝다. 그리고 사마의의 주재하에 <논어집해> <효경주>등의 책을 쓴다. 이렇게 양대세력의 사이에서 누구에게 밉보여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하안이 어찌 조상의 일당이 될 수 있을 것인가.


3. 누가 하안을 죽였는가?


하안이 조상의 일당이 아니라면, 사마의는 왜 그를 죽였을까? <삼국지>가 인용한 <위씨춘추>에 기록된 것을 보자. 하안이 피살된 과정은 극적이다. 심지어 웃긴다고 볼 수도 있다.



사마의는 가장 먼저 하안으로 하여금 조상사건을 심리하게 한다. 하안은 심리를 마친 후 사마의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이 사건에는 모두 일곱 집안이 관련되어 있습니다."라고 한다.


사마의가 대답하기를, "틀렸다. 여덟 집안이다."


하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닙니다. 제가 조사해봤는데 일곱 집안입니다."


사마의는 손가락으로 하안의 코를 가리키며 말한다: "다시 생각해봐라."

하안은 멍해진다: "설마 나라는 말입니까?"

사마의가 웃으며 말한다: "맞다. 바로 너다."

사마의의 말이 떨어지자, 위사들이 몰려들어 하안을 붙잡아 땅바닥에 엎어버린다.


필자는 이 기록이 믿을 수 없다고 본다. 사건심리는 어느 시대이건 아주 엄숙한 사법활동이다(설사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소송절차는 제대로 취한다) 하물며 사마씨 집정과 관련된 중요한 대사건임에야. <위씨춘추>의 말대로라면, 사법사건처리가 무슨 장난같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후세인들이 만들어낸 것일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사마씨는 반드시 하안을 죽여야할 이유가 없다. 하안이 피살된 것은 아마도 개인적인 원한 때문일 것이다. 하안은 사마의와 개인적 은원이 있는가? 나타나지 않는다. 각종 자료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 하안은 사마사(司馬師)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마사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의 가까운 친구인 왕필(王弼)이 죽었을 때 사마사는 탄식하며 말한다: "천상여(天喪予)" '천상여'라는 말은 공자가 안회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다. 사마사가 이 말을 한 것은 스스로를 공자에 비유한 것이다. 공자는 당시에 지고무상의 성인인데, 사마사의 이런 언행은 스스로를 너무 높게 보는 것이다.


당시에 하후현, 하안이 모두 사마사와 나란히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하안의 자신과 하후현, 사마사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유심(惟深)으로 천하의 뜻을 통하니 하후태초(하후현)이다. 유기(惟幾)로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으니 사마자원(사마사)이다. 유신(惟神)으로 달리지 않아도 가고, 걷지 않아도 도달한다. 나는 그런 말은 들었지만,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를 '신'으로 비유한 것이다. '기(幾)'는 '기(機)'로 사마사가 심기가 뛰어나고, 지모가 있어 책략을 잘 세운다는 말이다. 겉으로는 사마사를 칭찬하는 것같지만, 그이 진정한 뜻은 스스로를 '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사마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공자에 스스로를 비유한 사마사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물평론은 한말위진때 아주 중대한 일이다. 이는 평론대상의 정치적 명성에 큰 영향을 준다. 사마사는 불손한 말을 내뱉은 하안을 죽였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같이 이름을 떨친 하후현의 최후를 보면, 그도 결국 사마사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를 보면 사마사는 그와 같이 이름을 날리는 사람을 모두 꺼려했다. 하황은 그와 나란히 이름을 날리는 것도 꺼리고, 오히려 그의 위에 서고자 했다. 그러니 사마사가 그를 그냥 놔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충해야할 것이 있다. 고령릉정변때, 사마사가 실제 주재자이다. 한편으로, 사마의는 당시에 나이가 이미 많았고, 다른 한편으로, 정변의 주력은 사마사가 암중으로 거둔 조직인 "사사삼천(死士三千)"이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사마의는 태부로 이미 병권을 잃었다. 다만 정변때, 사마의는 병마를 거느렸다.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대부분은 사마사의 그 3천명의 결사대일 것이다.


사마사 부자가 정변을 계획한 것은 은밀했다. 사마소조차도 정변하루 전에야 알았을 정도이다. 이는 사마사와 사마소가 비록 형제이긴 하지만, 명망이나 지위에서 차이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사마의가 죽을 때, 군신들은 모두 "이윤(伊尹)이 죽었으니 이척(伊陟)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하여 사마사를 무군대장군으로 보정하도록 한다. 그러나 사마사가 죽자, 사마소는 그다지 순조롭게 이어받지 못한다. 당시 사마사는 대군을 수춘(壽春)에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조모(曹髦)가 수완을 써서, 사마소로 하여금 허창을 지키도록 하고, 상서 부하(傅嘏)로 하여금 육군을 이끌고 경사로 돌아오게 한다. 마침 호하가 사마씨의 사람이어서 그는 종회와 모의하여 사마소가 대군을 넘겨받도록 하고 낙양으로 데려가게 한다. 이렇게 하여 대장군이 되었다. 만일 사마소가 잠깐 생각을 잘못하여 허창으로 갔더라면, 사마가의 혁명대업은 완수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사마사는 고평릉정변때 이미 아주 높은 명성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안을 죽일 충분한 이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하안이 사마사에게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최종 결론은 두 가지이다.


하나, 하안은 조상의 일당이 아니다. 억울하게 조상사건에 연루되었다.

둘, 하안의 죽음은 사마의가 아니라 사마사의 결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