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한중으로 가서 장로(張魯)를 토벌할 때, 겨우 7천명만을 합비(合肥)에 남겨두어 성을 지키게 했다. 이 기회를 틈타 손권(孫權)이 친히 10만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포위한다. 일거에 성을 점령하고 전체 회하지역을 통치할 기세였다. 병력차이가 커서, 수성마저도 문제되었다. 그런데, 수비장수 장료(張遼)는 팔백장병을 이끌고 성밖으로 돌진하여 적의 군영으로 쳐들어가고 손권의 대영으로 진격한다. 그리하여 손권이 손을 쓰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도록 만든다. 이 전투에서 동오의 군대는 철저히 사기가 꺽이고, 성을 지키는 군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리하여 손권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성을 나가서 적진으로 돌진한 조위의 장수는 장료와 그가 이끄는 팔백장사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있다. 또 한명의 장군이 장료와 함께 성을 나가 돌진했고, 이 사람의 능력이나 공로나 조조로부터의 신임은 모조리 장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럼 장료와 함께 합비성을 나가 돌진한 장군은 도대체 누구인가?
우선 사건의 경위를 보도록 하자.
건안20년(215년) 팔월,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토벌하러 떠난 기회를 틈타, 손권은 10만대군을 이끌고 합비성을 포위한다. 당시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서진하였기 때문에, 합비성을 지키는 장수는 장료, 이전, 악진(樂進)등이 이끄는 겨우 칠천여명이었다. 조조가 서진할 때 호군(護軍) 설제(薛悌)에게 하나의 글을 남긴다. 그리고 봉투에는 "적이 오면 그때 열어보라"고 적었다. 소설같은 '금낭묘계'라는 말이다. 손권이 오자, 설제는 조조가 남긴 글을 열어본다. 조조의 명령은 이러했다: "만일 손권이 오면, 장료, 이전 장군은 성을 나가서 싸우고, 악진 장군은 성을 지켜라. 호군은 손권과 싸워서는 안된다." 여러 장수들은 중과부적이라고 여겨서 적과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조조의 명령에 의문을 표시한다. 장료는 이렇게 말한다: "조공은 바깥에 멀리 토벌을 나가 있다.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면, 손권이 반드시 우리를 격파했을 것이다. 그러니, 서신에 남긴대로 우리가 적이 아직 모이지 않았을 때 그들과 싸워서 그들의 예기를 꺽어놓다. 그리하여 군심을 안정시키면 방어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악진등 장군이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장료는 분노하여 말한다: "성패의 관건이 이 전투에 달렸다. 여러분이 만일 망설이면 내가 단독으로 성을 나가서 싸울 것이다." 이전은 계속 장료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국가대사이다. 너의 모략이 어떤지 보자. 내가 사적인 원한으로 공적인 의리를 잃을 수는 없다. 당신과 함께 성을 나가 싸우겠다." 그리하여 장료는 밤애 결사대를 모아서 팔백명을 만든다. 소를 잡아서 그들을 배불리 먹인다. 다음 날 새벽, 장료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철극을 들고, 먼저 적진으로 돌격하여 수십명을 죽이고, 대장 2명을 죽인다. 큰 소리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적의 군영으로 돌진한다. 그리하여 손권의 깃발 아래까지 진격한다. 손권은 크게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물러나서 언덕 위에 올라가 장극으로 스스로를 보호한다. 장료는 손권에게 내려와서 싸우자고 소리친다. 손권은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장료가 이끄는 병력이 아주 적은 것을 보고는 인마를 모아서 장료를 겹겹이 포위한다. 장료는 급히 포위망을 뚫으려 수십명의 부하를 이끌고 나온다. 남은 부대가 크게 소리친다: '장군은 우리를 버리려는 것입니까." 장료가 다시 돌아와서 포위망으로 돌진하여 나머지 병사를 구출한다. 손권의 인마는 모두 추풍낙엽처럼 바라만 보고 있었고, 아무도 감히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지 못한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동오의 사병은 사기가 반으로 꺽인다. 성을 나갔던 병사들은 성으로 돌아와서 방어를 강화한다. 합비를 지키는 병사들의 군심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손권은 합비에서 십여일을 머물렀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결국 철수한다. 철수과정에서 장료는 다시 병사를 이끌고 돌연 쇄도한다. 다행히 대장 감녕, 능통등이 목숨을 내걸고 막아서 손권은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이상의 글을 종합적으로 <삼국지.무제기>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손권이 합비를 포위하나, 장료, 이전이 이를 격파한다."
왜 상세하게 기록된 것은 그저 장료뿐일까?아마도 장료가 가장 먼저 성을 나가서 싸우자고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전투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불렀고, 나중에 소요진에서 거의 손권을 죽일뻔했고, 그리하여 동오에서 가장 두려워한 장수가 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전은 장료에 가린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전은 먼저 성을 나가서 싸우자고 주장하지 않았을까? 이는 분명 이전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사서에 그는 "유아(儒雅, 선비의 우아함)를 숭상하며, 여러 장수들과 공을 다투지 않았다." 그는 재능과 덕이 있는 사대부를 존경했고,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예를 잃지 않도록 행동하여 군대내에서 그를 '어르신(長者)'르로 불렀다." 그리고 이때 장료는 '가절(假節)'의 대우를 받았고 서열이 이전보다 앞섰다. 그가 먼저 뭐라고 말하는게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위주인 사건에서는 그도 마찬가지로 주관있게 행동했다.
조조가 원담(袁譚), 원상(袁尙)을 칠 때, 이전과 정욱(程昱)을 파견하여 선박으로 군량을 운송하게 한다. 마침 원상이 위군태수 고번(高蕃)에게 병력을 딸려보내 황하의 가에 주둔하게 해서 수도를 막았다. 조조는 이전, 정욱에게 말한다: "만일 선박이 통과할 수 없으면, 육로로 바꾸어 운송하라!" 이전은 여러 장수와 상의한 후 말한다: "고번의 군대는 갑옷이 부족하여, 겨우 물의 험한 것만 의지하고, 느슨하다. 그들을 공격하면 물리칠 수 있다. 장수는 바깥에 있을 때는 군왕의 명도 듣지 않을 수 있다. 만일 국가에 유리하다면 우리가 단독으로 결단을 내려도 된다. 적을 급히 공격해야 한다." 정욱도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북으로 황하를 건너 고번을 공격하고 그를 격패시킨다. 이리하여 수로를 확보한다. 이전은 바로 이런 지용을 겸비한 인물이다. 소설에서 대거 떠드는 '화소박망파(火燒博望坡)'전투에서 바로 이전이 적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하후돈에 호응하여 매복기습지역을 돌파한다. 당연히 실제로 매복을 설치한 사람은 유비가 아니라 제갈량이다.
이전은 원래 군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친이 여포의 부장에게 피살당하고, 형도 일찌감치 죽는 바람에 조조가 그 형의 부대를 그에게 넘겨준 것이다. 원래 군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명장의 반열에 오르다니 이것도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더욱 어려운 일은 합비전투때 이전과 장료는 사이가 좋지 못해쓴데도, 그는 여전히 사적인 감정을 내려놓고 장료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료와 함께 나가서 싸운 것이다. <삼국지>의 작자가 단독으로 그를 평가하여, "이전은 유아를 숭상하고, 공적인 일을 위해서 사적인 감정을 내세우지 않았으니, 품성이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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