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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장손성(長孫晟): 당태종의 장인은 일전쌍조(一箭雙雕)의 고수

by 중은우시 2018. 6. 25.

글: 임염(任艶)


돌궐(突厥)은 막북지역에서 흉노, 선비, 유연의 뒤를 이어 일어난 또 하나의 유목민족이다. 남북조시기가 전성기였고, 항상 남하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중원을 교란했다. 북조때의 북제, 북주는 부득이 화친과 조공의 책량으로 평화를 얻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다보니 돌궐의 기세는 날이갈수록 드세졌고, 이런 말까지 내뱉는다: "나는 남쪽에 말잘듣는 아들이 둘이 있는데, 가난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뭐냐!" 두 아들은 바로 북제와 북주를 가리킨다.


581년, 양견은 북주의 주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왕조를 건립한다. 돌궐에 대하여, 양견은 더 이상 눌려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전의 북제, 북주의 고분고분했던 방식을 바꾸어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이리하여 돌궐의 우두머리인 사발략칸(沙鉢略可汗)의 화를 돋군다. 그는 각 칸과 연합하여 40만의 군대로 수나라를 공격한다.


큰 전투가 일촉즉발이었다. 그러나 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나타났고, 돌궐에 '잠복'했던 경험을 살려, 돌궐내부를 손쉽게 와해시켜서 전세를 뒤집는다. 그가 바로 장손성이다.


장손성에 대하여 아마도 여러분은 잘 모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딸은 아주 유명하다. 그의 아들은 장손무기(長孫无忌)로 당태종의 심복이다. 딸은 장손황후로 바로 당태종의 처이다.


비록 장손성의 명성은 아들이나 딸보다 못하지만, 그의 능력이나 담량은 뛰어났다.


551년, 장손성은 장수집안에서 태어난다. 조상은 북위의 저명한 장수인 장손도생(長孫道生)이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데다, 총명하기까지 했다. 사서를 널리 읽었을 뿐아니라, 두 가지 재주를 타고 난다. 바로 탄궁(彈弓)과 궁사(弓射, 활쏘기)이다. 당시는 무술을 숭상하던 시기이고 사람들은 무예를 겨루기를 좋아했다. 장손성은 항상 기예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나중에 18세의 장손성은 일을 시작하는데 상사위상사(上司衛上士)가 된다. 이것은 위사들 가운데서 하급장교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장군, 주국이자 나중에 수문제가 되는 양견(楊堅)의 관심을 끈다. 그는 장손성의 무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기발한 모략도 지니고 있어 나중에 크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여긴다.


580년, 돌궐의 사발략칸이 북주와의 통혼을 요청한다. 북주의 주선제는 종실의 딸을 천금공주(千金公主)로 봉하여 그에게 시집보낸다. 그녀를 데려갈 사신을 찾는데 곤란을 겪는데, 사신은 무예도 뛰어나야 하고, 인물도 뛰어나야 했다. 그래야만 국가의 위신을 드러낼 수 있다. 적합한 후보자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양견이 장손성을 추춘한다. 장손성은 순조롭게 부사(副使)로 천금공주를 호송하여 돌궐로 간다.


돌궐과 북주는 서로간의 왕래가 적지 않았다. 북주의 사신을 사발략칸은 그 동안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모두 눈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냉담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장손성을 만나본 후에는 마음에 들어서, 송친인원들이 귀국할 때 장손성은 남아있도록 한다.


장손성을 남아 있게 한 후에, 사발략칸은 자주 그와 교류했고 사냥을 같이 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다가 공중에 두 마리의 독수리가 서로 먹을 것을 다투는 것을 보게 된다. 사발략칸은 장손성에게 두 자루의 화살을 건네며, "저 둘을 쏴보아라!"라고 말한다. 좋게 보자면 그냥 솜씨를 발휘하라는 것이지만, 나쁘게 보면 구밀복검(口蜜腹劍)이다. 한 마리의 독수리를 맞히는 거야 활을 잘 쏘는 사람에게 별 일이 아닐 수 있지만, 두 마리를 한꺼번에 쏘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장손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활에 화살을 당겨서 한발만 쏜다. 그리고 두 마리의 독수리가 모두 화살을 맞고 땅바닥에 떨어진다. 현장은 조용해지고, 수행인원들은 놀라서 턱을 다물지 못한다. 그 후에는 환호성이 울린다. 장손성의 뛰어난 기예에 돌궐인들이 탄복한 것이다. 여기에서 성어가 하나 나온다: 일전쌍조


이렇게 되자, 사발략칸은 더더욱 장손성을 귀국하지 못하게 한다. 귀족자제들에게 장손성과 친하게 지내면서 활쏘기를 배우도록 명령한다.


장손성이 돌궐에 머문 기간은 1년이다. 1년동안 그는 하루종일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잠복'한 스파이처럼, 사냥을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돌궐의 산천형세, 풍속인정을 살피고, 이를 마음 속에 담아둔다; 사발략칸의 동생인 처라후(處羅侯)과 두터운 교분을 쌓으면서, 돌궐내부가 분열되어 있고, 칸들 간에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등의 중요한 정보를 알아낸다. 1년후, 장손성이 귀국했을 때, 그가 알고 있는 돌궐의 상황을 모조리 양견에게 보고한다. 양견은 매우 기뻐하며 장손성을 봉거도위(奉車都尉)에 앉힌다.


581년, 돌궐의 각 부족이 병력을 모아서 수나라를 공격한다. 양견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장손성이 일어선다. 자신이 1년간 있으면서 알고 있던 돌궐의 모든 자료를 가지고 분석한 후 사발략칸과 아파(阿波), 달두(達頭)등 몇몇 칸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들어, '원교근공'의 수법을 쓸 것을 제안한다.


'원교'의 정책에서 장손성은 반간계를 쓴다. 그는 군대를 따라 출정하며 가는 도중에 사람을 보내어 달두칸을 만나서 흠모하는 뜻을 전한다. 달두칸의 사신이 수문제를 만나러 왔을 때, 수문제는 달두칸의 사신을 사발략칸의 사신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하고, 하사하는 상도 더 많이 한다. 이렇게 하니 사발략칸은 달두칸을 더욱 의심하고 시기한다. 원래 달두칸은 사발략칸에게 불만이 있었는데, 이번에 철저히 갈라선다. 그리하여 달두칸은 중도에 철군해버린다.


그후, 장손성은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어 북강으로 깊이 들어가 처라후를 만난다. 처라후는 원래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많이 얻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발략칸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었다. 장손성은 옛 교분을 이용하여 그를 회유한다. 결국 그를 수나라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마찬가지로, 장손성은 다시 사람을 보내어 아파칸에게 말을 전한다. 당신은 사발략칸과 병력도 비슷한데, 우리와 싸우면서 그는 한번 싸워서 바로 이기고, 당신은 한번 싸워서 바로 졌다. 분명히 사발략칸은 이를 핑계로 삼아서 당신의 부대를 없애려 할 것이다. 한번 깊이 생각해봐라 당신이 사발략칸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는가?


그후에 장손성은 다시 쇠뿔도 단김에 빼란다고, "달두는 이미 우리 수나라에 귀순했다. 사발략도 그를 어쩔 도리가 없다. 너희도 아예 우리에게 귀순하는게 어떠냐. 그때 달두칸과 손을 잡으면 강대해질 수 있다. 어쨌든 지금처럼 힘은 힘대로 쓰고 병력은 병력대로 손실되고, 돌아가서는 사발략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사발략칸은 아파칸이 수나라에 귀순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수나라군대와 싸워서 지게 되자, 엄청나게 분노한다. 그리하여 병력을 이끌고 아파한의 부족을 몰살시키고, 아파칸의 모친을 죽인다.


아파칸은 돌아갈 곳이 없게 되자 달두칸에게 귀순하여 둘이 하나로 된다. 아파칸은 달두칸의 병마를 이끌고, 복수하기로 맹세한다. 그리하여 사발략칸은 도망칠 곳도 없이 세력이 크게 줄어든다. 다시 힘을 얻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수나라에 귀순한다. 칭신하며 조공을 바치겠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돌궐내부는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고, 내란이 끊이지 않는다. 다시는 강대해지지 못한다.


사발략칸이 죽은 후, 아들이 뒤를 이으니 도란칸(都蘭可汗)이다. 이 도란칸의 수나라에 대한 태도는 오락가락이었다. 장손성은 수문제에게 주청을 올려, 돌궐내부에서 처라후의 아들인 돌리칸(突利可汗)을 도와서 권력을 잡게 하자고 건의한다. 그는 역량이 적어서 쉽게 다독일 수 있고, 그를 가지고 도란칸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도란칸이 수나라에 통혼을 청하자, 장손성은 다시 이간계를 쓴다. 수문제에게 돌리칸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상을 두텁게 내릴 것을 청한다. 도란칸은 과연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회를 봐서 수나라를 기습하려 한다. 그러나 항상 돌리칸이 수나라에 미리 서신을 보내어 알려준다. 개황19년, 도란칸은 달두칸과 손을 잡고 돌리칸을 습격한다. 돌리칸은 중과부적으로 대패한다. 장손성의 권유로 수나라로 도망가서 귀순한다. 수문제는 이 기회를 잡아 그를 계민칸(啓民可汗)으로 세운다. 계민칸도 글을 올려 수문제를 "성인칸(聖人可汗)"이라 칭한다.


그 후, 장손성은 계민칸을 따라 주둔지로 간다. 그를 도와 돌궐의 기타 부족을 수습하고, 귀순한 인원들을 안치한다.


얼마후 도란칸이 죽구, 그의 무리도 모두 계민칸에 귀속된다. 이때는 여러 칸들 중에서, 달두칸(그는 스스로 보가칸(步迦可汗)이라 칭한다)만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수문제는 장손성을 보내어 양광(楊廣)과 함께 추격하게 한다. 장손성은 천여명을 죽이고, 백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가축은 수천두를 노획한다.


투항해온 한 돌궐관리는 이렇게 말한다: "돌궐의 내부에는 장손총관을 크게 두려워한다. 그의 활소리를 들으면 벽력(霹靂)이라고 부르고, 그의 말을 보면 섬전(閃電)이라고 부른다." 이를 보면 장손성의 명성이 돌궐내에서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있다. 마지막에, 보가칸은 토곡혼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되고, 나머지 무리는 모조리 계민칸에게 복속한다.


돌궐과 싸우는 과정에서, 장손성은 돌궐에 여러번 사신으로 간다. 그는 칼하나 창하나 쓰지 않고, 계책과 세치 혀만으로 강대한 돌궐을 와해시켰다. 이렇게 하여 수나라의 변방의 우환은 사라졌으니, 그의 재능이 얼마나 탁월한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대업5년(609년) 장손성은 사망한다. 대업11년, 수양제는 다시 북순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안문(雁門)에서 시필칸(始畢可汗)(계민칸의 아들)에게 포위된다. 급하게 되자 이렇게 탄식한다: "만일 장손성이 아직 살아있었더라면, 짐이 이 지경에 처하지는 않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