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변연(歷史邊緣)
현무문사변이 있던 그날 아침, 이세민의 유일하게 돋보이는 장면은 화살 하나로 아무런 방비도 하고 있지 않던 형 이건성을 쏘아죽인 것일 것이다. 그 후에, 아마도 자신의 형이 자기의 화살에 맞아죽는 장면에 너무 흥분해서인지 이세민의 모습은 전쟁터에서 백만군대 앞에서 보여주었던 영명한 모습과는 차이가 컸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탄 말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빨리 달려가는 말에서 떨어졌고, 하마터면 동생 이원길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다. 만일 용맹스러운 위지경덕이 적시에 다가와서 이원길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현무문사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날의 현무문사변에서 주인공은 마치 위지경덕같다. 그는 먼저 이원길을 쏘아죽이면서 진왕 이세민을 구하고, 다시 두 황자(이건성과 이원길)의 수급을 들고서 이들을 구하러 달려온 태자부와 제왕부의 호위대를 쫓아보낸다. 이어서 다시 갑옷을 입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당고조 이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연의 손에서 병부인신을 가져오고, 태자와 제왕의 잔당을 제거한다. 그런데, 이처럼 너죽고 나살기식의 형제간의 잔혹한 싸움에서 진왕 휘하의 제일용장으로 불리던 진경은 전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진경은 일찌감치 이름을 날랐다. 그는 처음에 수나라의 명장인 내호아(來護兒)의 하급군관이었다. 진경의 모친이 사망했을 때, 내호아는 따로 사람을 보내어 위문했다. 그때 내호아 수하의 많은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진경은 겨우 하급군관에 불과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내호아는 이렇게 말한다: 진경이라는 사람은 문무를 모두 갖추었고, 지절(志節)이 완비되어 있으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과연 그의 말대로 이후 여러번의 전쟁에서 진경은 뛰어난 용맹을 보이며 명성을 떨친다.
나중에 진경은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간다. 당시 와강군의 우두머리인 이밀(李密)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그를 장내표기(帳內驃騎)로 임명하고, 후하게 대우한다. 이밀과 우문화급의 여양전투때, 이밀이 화살을 맞고 낙마한다. 추격병이 쫓아왔을 때, 진경이 혼자서 막아내어 이밀이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난세의 진경은 다시 왕세충(王世充)의 휘하로 들어간다. 왕세충은 즉시 그를 용양대장군에 임명한다. 그러나 문무를 겸비한 진경은 금방 왕세충의 사람됨이 간사하고, 장신농귀하여 절대 난세를 끝낼 군주가 될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정교금과 함께 장안의 이씨정권에 투신한다.
왕세충을 떠날 때, 진경은 몰래 떠난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난다. 왕세충은 진경의 명성에 겁을 먹고 감히 그를 핍박하여 남도록 하지 못한다. 이렇게 진경은 이당정권에 투신했고 결국 이세민 수하의 우삼통군이 된다. 이세민의 수하로 있으면서 진경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저명한 위지경덕도 진경에게 격패당해 이세민에게 투항한 것이다. 사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진경은 이세민을 따라서, 왕세충, 두건덕, 유흑달을 토벌하면서 매번 전투때마다 앞장서서 싸웠고, 앞을 막을 자가 없었다. 매번 적군의 진영내에 용맹스러운 장수가 있어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 진왕은 진경으로 하여금 가서 취해오라고 명했다. 진경은 말을 타고 사람들 틈으로 달려가서 취해오곤 했다.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의 마음 속에 진경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가장 큰 위협중 하나였다. 이건성은 일찌기 여러가지 수단을 써서 진경이 진왕부를 떠나게 하려고 했다. 이원길은 더욱 분명하게 말한 바 있다. 일단 이세민을 죽이려면 가장 먼저 죽여야할 자는 바로 진경이다. 바로 이런 문무를 겸비하고 용맹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 왜 이세민의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는 사서에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사서에서 우리는 진경이 이세민의 현무문사변에 도움을 주었다는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신당서>에서 그와 현무문사변에 관한 유일한 기록은 단지 한 마디이다. 현무문사변후 진경이 봉읍칠백호를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현무문사변에 참여해서 뛰어난 공을 세웠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현무문사변에서 진왕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남자주인공 위지경덕은 현무문사변후 1300호의 봉읍을 받는다. 유명한 장공근, 후군집은 봉읍1000호를 받는다. 모두 진경보다 많이 받았다.
<구당서>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진경은 그날 확실히 진왕을 따라 현무문으로 갔다. 그렇다면 봉읍의 다소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626년의 그 여름에 진경은 현무문사변에서 전쟁터에서의 용맹함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대담하게 추측을 해보기로 하자. 아마도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진경이 이번 황제위를 다투는 골육상쟁에 가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평소처럼 뛰어난 활약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사실상, 당나라초기의 가장 유명한 장수인 이정(李靖)과 이적(李績)은 이세민과 이건성의 황제위를 놓고 싸우는 다툼에서 엄격하게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느 한 편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이세민으로 하여금 그들을 존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진경은 진왕부의 장수이면서, 이 다툼에서 그 두 명의 이씨장군들처럼 중립을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진왕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이번 제위다툼은 일단 시작하면 장안성안에 피바다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이런 살륙은 전쟁터에서 적군의 수급을 취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이건 대당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그저 진왕의 야심을 실현하려는 전투이다. 지절완비한 진경으로서는 아마도 소극적으로 싸움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 골육상쟁은 대당의 정관지치의 시작이다. 아마도 정관지치가 휘황하기 때문에 현무문의 피비린내도 아마 사람들 사이에서 부지불식간에 약해져 버렸을 수도 있다. 현무문사변에서 진왕수하의 칼잡이인 위지경덕은 영웅으로 숭배받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마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날, 당고조 이연이 잃은 것은 38살의 장남 이건성과 24살의 사남 이원길만이 아니다. 이건성, 이원길이 낳은 10여명의 미성년 손자들과 그들의 가솔, 심복까지 백명이 넘는다.
그날, 태자부와 제왕부는 분명히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그날 모두가 서로 죽이고 죽는데 바쁘고, 공명을 쫓는데, 대당의 장군들 중에서, 지절을 완비한 진경은 피비린내나는 비량(悲凉)중에서 최대한 사람의 양심을 지켰다. 이렇게 견지할 수 있는 용기가 아마도 1300년후의 우리들마저도 존경하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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