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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맹황후(孟皇后): 송황실의 버림을 받았으나, 송황실을 구해준 여인

by 중은우시 2018. 3. 9.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송나라 역사에 이런 황후가 있다. 그녀는 4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일생동안 3번 책봉되고, 2번 폐위되며, 전후로 냉궁(冷宮)에 근 30년간 들어가 이ㅏㅆ었다. 마지막에는 화가 복이 되어 두 번이나 수렴청정하고, 그녀 혼자의 힘으로 송황실을 구해낸다. 그리고 송고종을 도와서 북송에서 남송으로의 과도기를 성공적으로 넘긴다. 그녀는 송황실에 버림받았으나 다시 송황실을 위기에서 구해내준 송철종(宋哲宗)의 황후 맹씨(孟氏)이다.


맹황후는 단정현숙했으며, 명문집안출신이다. 일찌기 송나라의 미주방어사, 마군도우후, 태위를 지낸 맹원(孟元)의 손녀이다.


송철종은 어린 나이로 즉위했고 점점 자라면서 조모인 고태황태후(高太皇太后)가 그를 위하여 명문가의 딸 백여명을 입궁시킨다. 맹씨는 바로 그녀들 중의 한 명이었다. 당시 맹씨의 나이는 16살이고, 몇년동안 궁중의 예의범절을 배운다. 원우7년(1092년), 송철종이 17살이 되었을 때, 고태황태후는 유지를 내려 맹씨를 황후로 삼는다. 그리고 혼례를 거행한다. 그러나 송철종은 자기보다 3살많은 맹황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고태황태후때문에 참는 것이었다. 1년후 맹황후는 딸 복경공주(福慶公主)를 낳는다.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원우8년(1093년) 가을, 고태황태후가 서거한다. 맹황후는 뒤를 받쳐주는 사람을 잃었다. 송철종은 점차 맹황후를 멀리하고, 미모가 뛰어나고 재색을 겸비한 첩여(婕妤) 유씨(劉氏)를 총애한다.


소성3년(1096년), 복경공주가 중병을 앓는다. 약을 써도 효험이 없자, 맹황후의 언니는 특별히 병을 치료하는 부수(符水)를 가기고 입궁하여 치료한다. 부수는 궁중의 금기였기 때문에, 맹황후는 대경실색하여, 사람을 시켜 부수를 숨긴다. 송철종이 도착했을 때, 맹황후는 경위를 설명한다. 송철종은 인지상정이라 여기고 죄를 추궁하지 않는다. 나중에 공주가 병사하고, 맹황후의 양모 연부인(燕夫人)등은 입궁하여 맹황후와 공주의 복을 기도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것으로 꼬투리가 잡힌다. 황후의 자리를 빼앗고 싶어했던 유첩여는 앞뒤의 두 가지 사건을 엮어서 송철종에게 맹황후가 황제를 저주하는 것이라고 모함한다. 송철종은 그 말을 듣고 의심하기 시작하고, 양종정(梁宗政), 소규(蘇珪)로 하여금 조사하도록 시킨다. 재상 장순(章恂)과 유첩여의 뜻을 받들어, 그들은 황후의 좌우에 있는 시녀와 환관 수십명을 체포한다. 그리고 이들을 고문한다. 역사에는 "온갖 방법으로 고문했으며, 팔다리가 부러지고, 혀까지 뽑혔다"고 적었다. 태감, 궁녀들은 맹황후를 모함하고 싶지 않아서 사지가 부러지고 혀가 뽑히는 고통에도 거짓자백을 하지 않은 것이다. 양종정등은 할 수 없이 거짓 진술서를 만들어 바치고, 송철종은 맹황후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황후를 폐위시키고, 맹씨를 폐위된 비빈들이 출가하면 거주하는 요화궁(瑤華宮)에 거처하게 한다. 그녀는 '화양교주(華陽敎主)' '옥청묘정선사(玉淸妙靜仙師)'로 불리며 법명은 '충진(沖眞)'이다 당당한 황후가 여도사로 된 것이다.


당시는 신구당쟁이 격심하였기 때문에, 맹황후는 구당을 지지하는 고태황태후와 향태후(向太后)가 세웠고, 송철종이 친정하면서 극력 이들 조모의 그늘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신당의 장순을 재상으로 삼았다. 장순은 송철종이 총애하는 유첩여를 지지했고, 맹황후를 폐위시키기 위하여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원부3년(1100년), 송철종이 병사하고 단왕 조길(趙佶)이 즉위한다. 그는 송휘종이다. 구당은 향태후의 지지하에 다시 등장한다. 맹황후도 시운이 다시 돌아와서 복위된다. 그녀가 황후에 봉해진 것은 원우연간이었기 때문에 '원우황후(元祐皇后)'로 불리웠다. 이때 맹황후의 나이는 이미 28살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해(1101년), 향태후가 병사하고, 그후 숭녕원년(1102년)에 다시 원우당인사건이 벌어진다. 송휘종은 다시 신당의 채경(蔡京)등을 기용하고, 구당인사를 쫓아낸다. 당시 유황후는 맹황후가 신분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이미 황태후가 된 그녀는 다시 결당영사하고 내외결탁하여 권신 채경과 짜고, 원우당인들을 내몰아버리는 기회를 틈타 송휘종에게 다시 맹황후를 폐위시키도록 압박한다. 송휘종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숭녕원년 구월, 30살의 맹황후를 다시 '요화궁'에 거처하도록 하고, 희미원통지화묘정선사'라는 칭호를 내린다. 그리고 맹황후의 사후에는 송나라종묘에 제사를 받을 수 없다고 정한다.


유황후는 성공적으로 맹황후를 쫓아낸 후 자신의 황태후 신분을 이용하여, 정무에 간여한다. 이에 대하여 송휘종은 머리아파하고, 유태후를 패휘시키고자 한다. 유태ㅜ의 신변에 있는 시종들까지 핍박하니, 유태후는 어쩔 수 없이 목을 매어 자살한다. 당시 나이 35살이다. 유태후가 죽기 전에 그녀가 몰아내서 아직 냉궁에 있는 맹황후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다.


그후 25년간, 맹황후는 계속 요화궁에서 청고(淸苦)한 나날을 보낸다. 비록 참담했지만, 그래도 조용했다. 그러나, 정강원년(1126년)의 큰 불로 요화궁은 잿더미가 된다. 맹황후는 할 수 없이 연녕궁(延寧宮)으로 옮겨 거주한다. 얼마후 연녕궁에도 큰 불이 발생한다. 맹황후는 부득이 대상국사(大相國寺) 부근에 있는 동생의 집에 거처한다. 정강2년(1127년), 송흠종은 맹황후의 처지에 대하여 듣고 근신들과 상의한 후 다시 맹황후를 황궁으로 데려와서 다시 원우황후로 모시려 한다. 그러나, 조서가 내려가기도 전에 금나라병사들이 변경을 함락시킨다. 역사에서 '정강지화'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금나라병사는 금태종의 지시하에, 송나라황실인물을 모조리 금나라로 데려가서 철저히 북송정권을 멸망시키려 한다. 금나라 병사들은 매국노들의 도움으로 경성내외에 있던 모든 황실구성원들을 체포한다. 그후 금나라병사들은 송휘종, 송흠종 및 송나라의 모든 후비, 황자, 황녀, 황손, 종실, 외척, 근신 합계 3천여명을 북으로 데려간다.


맹황주만이 폐위되어 황궁밖에 머무는 바람에 운좋게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금나라사람들에게 끌려가서 타향에서 객사당하는 것을 피했을 뿐아니라, 이후에 지고무상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새옹지마이다. 맹황후가 '정강지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아주 좋은 예이다.


금나라병사들이 북으로 철군한 후, 송나라 재상이던 장방창(張邦昌)은 초황제(楚皇帝)로 책봉된다. 장방창은 자신이 민심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맹황후를 연복궁으로 모셔와서 송태후(宋太后)로 모신다. 다만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장방창이 송태조 조광윤이 후주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후, 후주의 부태후(符太后)를 주태후(周太后)로 모시며 서궁에 거주하게 한 관례와 같다고 한다. 장창장은 송나라를 대체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우려는 야심이 있었다. 나중에 대신 호순척(胡舜陟), 마신우(馬伸又)가 상소를 올려 정사는 마땅히 태후의 명을 받아서 결정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장방창은 부득이 맹씨의 '원우황후' 존호를 되살리고, 그녀에게 수렴청정을 요청한다.


이때의 맹황후는 실질적으로 이미 송나라 군권(君權)의 상징이었다. 그녀의 정치적 지위와 호소력은 이미 누구도 대체할 수 없었다. 55세의 맹황후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일거에 권력의 정점에 선다. 그녀는 처음으로 탁월한 정치적 재능을 보여준다.


그녀가 집정한 후 한 첫번째 일은 바로 황태후의 신분으로, 외지로 일을 나갔다가 금나라에 붙잡혀가지 않은 조구(趙構)를 황제로 책립하는 것이었다. 오월, 조구는 남경 응천부(지금의 하남성 상구)에서 즉위한다. 그가 송고종이다. 원우황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원우태후로 모셔진다. 얼마후, '원(元)'자가 조부인 맹원(孟元)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다시 융우태후(隆祐太后)로 명칭을 고친다. 당시 맹황후가 폐위될 때, 누가 생각했으랴. 송나라황실에 버림받은 여인이 수십면후 송나라황실에 이렇게 큰 공헌을 할 줄을.


변경은 이미 지켜낼 수 없게 도어, 맹황후는 송고종을 따라 장강을 건너 항주로 간다. 건염3년(1129년) 삼뤌, 호위통제 묘부, 유정언은 송고종이 소극적으로 항금하는데 불만을 품고, 병변을 일으켜, 송고종을 폐위시키고, 태자에게 전위하게 하려 한다. 그리고 맹황후를 모셔 수렴청정하게 한다. 위기의 순간에, 맹황후는 흐트러짐없이, 상황에 잘 대처한다. 대국을 중시여겨 조구의 겨우 3살된 아들을 안고 다시 수렴청정한다. 맹황후는 한편으로 반군을 좋은 말로 위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보내어 한세충등 장수에게 반란을 평정하도록 한다. 반란이 평정된 후, 맹황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다시 송고종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송고종이 항주로 온 후에, 금나라병사들이 다시 대거 남침한다. 조구는 동남해안으로 도망쳤고, 맹황후는 서남 홍주(지금의 강서 남창)로 도망친다. 맹황후는 겨우 경심동백의 병변을 견뎌냈는데, 다시 사방을 떠도는 신세가 된 것이다. 금나라병사들이 계속 추격하여, 맹황후를 따르던 병사들도 흩어진다 심지어 농민들이 가마를 들어야 하는 곤경까지 연출된다. 금나라군대가 퇴각한 후, 조구는 맹황후를 그리워하며 사람을 사방에 보내어 찾는다. 그리고 맹황후의 처지를 알고 난 후에 가슴아파하며 말한다: "짐이 처음에는 태후를 몰랐는데, 남경(응천부)으로 모셔온 후부터 짐을 자신의 자식처럼 아껴주셨다. 지금 수천리 밖에 있고, 병마에 놀라셨을테니, 마땅히 모셔와야 한다. 조석으로 그리운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어영사도통에게 사람을 데리고 가서 모셔오게 한다. 태후가 월주(지금의 절강 소흥)에 이르렀을 때, 송고종이 친히 마중나간다.


이때부터 맹황후는 안정된 삶을 살기 시작한다. 정강지난부터 조구의 즉위까지, 맹황후의 존재는 어느 정도 북송에서 남송으로의 과도기에 정치적인 동란을 막아주었다. 맹황후가 없었더라면, 조구는 아마도 명정언순하게 황제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맹황후가 없었더라면, 조구가 다시 정권을 장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맹황후의 지위와 명망은 조구의 남송정권을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맹황후가 국가를 두번이나 위기에서 되살리는데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구는 맹황후에 효도를 다했다. '만일 계절에 맞는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태후에게 바치고 나서 맛을 보았다." 맹황후는 지존의 지위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서인으로 지냈기 때문에 맹황후는 근검절약하는 습관이 생활화되었다. 그녀는 매월 1천이 생활비만을 받았다. 그저 살아갈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맹황후는 월주(越酒)를 마시기 좋아했는데, 조구는 월주가 너무 쓰고 시어서 마시기 좋지 않다고 보고, 사람을 시켜 다른 단 술을 사오게 한다. 맹씨는 아랫사람을 보내어 돈을 계산한다. 한번도 술을 강제로 빼앗거나 돈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맹황후가 한번은 궁중에서 머리가 어지럽다고 느꼈는데, 어떤 궁녀가 자시가 부수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맹황후는 젊을 때 그 일로 고생한 것을 떠올리며 놀라서 말한다: "내가 어찌 그런 말을 다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즉시 그 궁녀를 궁밖으로 쫓아낸다.


소흥원년(1131년) 봄, 맹황후가 풍질을 앓는다. 조고종은 세심하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모셨다. 여러 날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사월, 맹황후가 행궁의 서전에서 사망하니 향년 59세이다.


송고종을 조서를 내려, 모후의 예로 제사지낸다. 존호를 소혜헌열황태후로 올린다. 그의 영패는 송철종의 사실(祀室)에 올리는데, 유황후보다 윗자리에 두었다. 맹황후는 회계현 상황촌에 매장한다. 소흥3년(1133년)에는 시호를 소자성헌황후로 고친다.


3번 책봉받고, 2번 폐위된다. 그리고 두번이나 국가가 위급할 때 수렴청정을 한다. 맹황후의 경력은 기이하고, 곡절이 있고, 부침이 심했다. 중국의 후궁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이다. "화는 복을 부르고, 잃으면 얻는다." 남송건국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전설적인 여자인 맹황후를 이보다 더 잘 묘사하기는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