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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화제(漢和帝)는 어떻게 "영원지륭(永元之隆)"을 이룩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3. 9.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한화제 유조(劉肇)는 동한의 네번째 황제이다. 건초4년(79년)에 태어났고, 한장제(漢章帝) 유달(劉炟)의 넷째아들이다. 생모는 양귀인(梁貴人)이며, 나중에 황후 두씨(竇氏)의 양자로 들어간다. 건초7년(82년), 한장제는 황태자 유경(劉慶)을 폐위시키고, 유조를 황태자로 세운다. 장화2년(88년), 한장제사 서거하고, 유조가 즉위하니 바로 한화제이다. 양모 두태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한다. 


영원(永元)4년(92년), 유조는 환관과 연합하여 두씨 외척세력을 소멸시킨다. 친정(親政)후에는 동한의 국력이 극히 흥성하여 당시 사람들은 "영원지륭"이라고 불렀다. 원흥원년(105년), 유조는 장덕전(章德殿)에서 병사한다. 향년 27세이다. 시호는 "효화황제"이고 묘호는 목종(穆宗)이고 시법은 "불강불유왈화(不剛不柔曰和)이며 신릉(愼陵)에 묻힌다.


유조의 생모인 양귀인은 포덕민후(褒德愍侯) 양송(梁竦)의 딸이다. 건초2년(76년)에 입궁한다. 건초4년(79년) 유조를 낳는다. 나중에 두황후에게 모함을 당해, 우울하게 죽는다. 두황후는 친히 유조를 키우는데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길렀다.


건초7년(82년), 육월 십팔일, 한장제는 황태자 유경을 폐위시켜 청하왕(淸河王)으로 하고, 유조를 황태자로 세운다.


장화2년(88년), 이월 삼십일, 한장제가 서거하고, 황태자 유조가 등극한다. 적모인 두황후를 황태후로 세운다. 유조의 나이가 어려서, 두태후가 임조칭제한다.


두태후는 오빠인 두헌(竇憲)을 호분중랑장에서 시중(侍中)으로 승진시켜 조정의 기밀을 관장하고, 고명(誥命)의 반포를 책임지게 한다. 동생인 두독(竇篤)을 호분중랑장에 임명하여 황제의 시위를 지휘하게 한다; 동생 두경(竇景), 두환(竇環)은 모두 중랑장이 되어, 조령을 전달하고 문서를 관장하는 일을 맡는다. 이렇게 하여 두씨형제들이 황제 주위의 주요지위를 모두 차지하고, 국가정치의 중추를 장악한다.


두태후는 정권을 자신이 혼자 독점하고 전횡하여 의사결정을 강제로 밀어부친다. 북흉노를 토벌할 것인가는 논의하는 중요한 토론에서, 상서, 시어사, 기도위, 의랑등이 모두 극력 간언하면서, 심지어 두태후에게 '어찌 혼자만의 계책으로 만명이 목숨을 버리려 하느냐?"고 질책까지 했는데도 태후가 두헌을 비호하여 출병하게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북흉노를 물리친 후, 계속 북선우(北單于)를 둘 것이냐에 대하여 조정신하들은 결사반대하지만, 두헌이 설립하도록 주청하자, 두태후는 대다수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헌의 주청에 동의한다.


두태후는 두씨일족과 가까운 사람들은 조정관리나 지방관리로 발탁한다. 그리하여 위로부터 아래까지 결탁하여 권력을 독단하고 방종하며 보복을 하는 등 자기들 마음대로 굴었다. 두태후의 동생 두경은 노비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둬서, 나쁜 짓을 하고 다녔는데, 밝은 대낮에 공공연히 길을 막고 물건을 빼앗기도 하고, 부녀를 희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청에서는 감히 이를 보고하지 못했다.'


두태후는 권력을 농단하면서, 자기의 세력을 곳곳에 심었다. 그리하여 조정이 상하에는 모두 그녀의 심복과 그녀를 따르는 신하들이 많았다. 당초, 유조는 장안에서 두헌을 불러 접견하기로 했는데, 조정 신하들은 심지어 그를 '만세'로 부르자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상서 한릉이 분노하여 "예법상 신하가 만세를 칭하는 일은 없다"고 질책하여 비로소 이 해프닝은 끝이 난다. 이것만으로도 두씨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이고, 다른 한편으로 당시 조정의 신하들마저도 그에 따라가는 분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한화제가 정권을 잡은 후, 즉시 두씨잔당세력을 몰아낸다. 태위 송유(宋由)는 두태후당이므로 파면되고 나중에 자살한다. 다른 심복들도 두태후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관직에 오른 사람들은 모조리 파면된다.


두헌은 많은 자객도 키우고 암살정책도 실행하고 있었다. 원한이 있거나 서로 다른 의견을 가져서 두씨들에게 위협이 될만한 사람들을 암살했다. 한명제 영평연간, 두헌의 부친인 두훈(竇勛)이 죄를 저질렀는데, 한우(韓紆)가 이 사건을 심리했고, 사실로 밝혀져서 두훈은 감옥에 들어가고 주살된다. 두태후가 정권을 잡았을 때 한우는 이미 죽은 뒤었다. 두헌은 자객을 보내어 한우의 아들을 암살한다. 그리고 그의 수급을 가져와서 두훈의 묘에 올려 제사지낸다. 주영(周榮)은 상서 원안의 집에서 일하는 자였는데, 원안이 올린 상소에서 두헌이 교만하고, 두경이 부패하다든지 북흉노선우를 세우는 것이 부당하다든지 하는 내용을 모두 주영이 썼다. 두헌의 문객인 서의(徐齮)는 그에게 원한을 품고 면전에서 그를 위협한다.


두태후가 방종한데 대하여 일찌감치 정직한 조정신하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상소를 올려 진언하는 외에 수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자치통감>의 통계에 따르면, 짧은 5년동안 대신둥 각중 문제로 올린 상소가 15,6회에 이른다.


두씨부자와 형제는 모두 구경, 교위로 조정에 널리 퍼져 있었다. 양후(穰侯) 등첩(鄧疊)과 그의 동생인 보병교위 등뢰(鄧磊), 모친 원씨(元氏), 두헌의 사위 사성교위 곽거(郭擧), 과거의 부친인 장락소부 곽황(郭璜)등은 서로 결탁한다. 그중 원씨, 곽거는 모두 궁정을 출입했고, 곽거는 두태후의 총애를 받아 그들은 공동으로 유조를 살해할 모의를 꾸민다. 유조는 그들의 음모를 알아차린다.


당시, 두헌형제가 대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유조는 내외신료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자들은 겨우 환관들 뿐이었다. 유조는 조정의 대소관료는 모조리 두헌의 일당이니, 중상시 구순령 정중(鄭衆)이 조심스럽고 심계가 깊고, 두씨집단에 빌붙지 않은 것을 알아서, 그와 모의하여, 두헌을 죽여버리기로 결정한다.


다만 두헌은 대외정벌중이어서 그가 병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잠시 인내하고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두헌과 등첩이 모두 경성으로 돌아온다. 당시 청하왕 유경은 유조로부터 후대를 받고 있었고, 자주 궁정에 출입하며 자고 가기도 했다.


유조는 행동을 취할 때 <한서.외척전>을 얻어서 읽어보고자 하다. 그러나 그는 좌우시종들이 누설할까 겁을 내어 그들에게 가서 찾아오라고 하지 못하고, 유경에게 명하여 개인적으로 천승왕(千乘王) 유항(劉伉)에게 빌려오게 한다. 밤에 유조는 유경을 단독으로 내실에서 접견한다. 그리고 유경에게 명하여 정중에게 말을 전하게 한다. 그에게 황제가 외숙부를 주살한 선례를 모두 수집하게 한 것이다.


영원4년(92년) 육월 이십삼일, 유조는 북궁으로 행차한다. 거기서 조서를 내려 집금오(執金吾)와 북군오교위에게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준비하도록 지시하며 남궁과 북궁을 지키라고 한다; 성문을 잠그고, 곽황, 곽거, 등첩, 등뢰를 체포한다.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감옥에 보내어 처형한다. 그리고 알자복야(謁者僕射)를 보내 두헌의 대장군인수를 회수한다. 그리고 그를 관군후(冠軍侯)로 강등시킨 다음, 두독, 두경, 두괴(竇瑰)와 함께 각자의 봉지로 떠나게 한다. 유조는 두태후때문에 정식으로 두헌을 처결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엄격하고 일처리를 잘하는 봉국재상을 보내어 감독하게 한다. 두헌, 두독, 두경은 봉국에 도달한 후 모조리 명을 받아 자살한다.


한화제 유조는 성공적으로 정권을 빼앗는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한선제 유순이 곽우를 주살한 이야기가 재현된 것이다.


이 거동으로 두씨세력이 제거된 후, 유조는 친정을 시작한다. 낮에는 조정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밤에는 상소문을 살펴보면서, 정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과로사'했다고 불린다.


유조가 집권하는 동안, 여러번 조서를 내려 이재민을 구하고, 세금을 감면하고, 유민을 정착시키고 농사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했고, 여러번 인재를 등용하는 조서를 내린다. 법제도에서도 형의 관용을 주장하고, 서역에 다시 서역도호부를 둔다.


한화제는 백성들의 고통을 잘 이해했던 사람이다. 여러번 억울한 사건을 풀어주고, 과부와 홀아비를 구휴랗고, 고아와 병약한 사람을 도와주며, 세금을 적게 거두었다. 그리고 상하관리들에게 천재인재를 조성한 자신의 원인을 반성하도록 한다. 한화제 영형원년(105년), 농지개간면적이 732경에 이르러 동한시기에 최고에 달한다. 호적인구는 5325만에 달한다. 유조가 친정한 후에 동한의 국력을 전성기를 이루어 당시 사람들이 '영원지륭"이라고 불렀다.


영흥원년(105년) 십이월 이십이일, 한화제는 경도 낙양의 장덕전에서 병사한다. 당시 나이 27살이다. 유조가 붕어한 후, 태어난지 겨우 100일된 아들 유륭(劉隆)이 즉위한다. 연호를 연평(延平)으로 바꾸니 바로 한상제(漢殤帝)이다. 연평원년(106년), 삼월 초닷새, 유조를 신릉(하남성 맹진)에 매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