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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계도(季都) 임무를 완수하고도 궁형(宮刑)을 받은 한나라의 서역사신

by 중은우시 2018. 2. 9.

글: 살소(薩蘇)


한나라는 "강력한 한나라를 침범하는 자는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주살한다는 거슬 분명히 한다(明犯强漢者, 雖遠必誅)"는 이런 시대였는데, 누가감히 한나라 사신을 거세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한나라때의 외교활동에서 "한사(漢使, 한나라의 사신)"는 장건(張騫), 반초(班超), 소무(蘇武)와 같이 그 이름과 함께 역사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첫번째 한사인 장건은 서역에서 십여년을 떠돌아다닌다. 백여명의 사신단은 마지막에 겨우 그와 당읍보(堂邑父) 두 사람만 남아서 장안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시종 사신의 사명을 상징하는 한절(漢節)은 가지고 다녔다. 이때부터 영원히 "실절(失節)"하지 않는 것은 한사의 전통과 자랑이 되고,. 한나라때의 역사를 돌아보면 거의 하나의 신념으로 화했던 것같다. 하나의 강대한 왕조인 한왕조의 배훼는 사실들이 거의 모두 원칙과 사명을 갖고, 비록 천만명이 앞을 막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는 기개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사'라는 두 글자는 우리가 존경하고 앙모한다.


이런 존경은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이런 영웅적인 기개때문에, 한나라의 사신들은 이국에서 통상적으로 역시 존중을 받았던 것같다. 피살된 경우는 있지만, 굴욕을 당한 경우는 거의 없다. 장건이 사신으로 나갔을 때, 이 기도가 비범한 한사를 상대한 군신선우(軍臣單于)는 도리를 아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에게 만일 흉노가 남월(南越)로 사신을 보낸다면 한나라에서는 어떻게 느끼겠는가?라고 물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중에 호녀(胡女)를 처로 주고, 비록 그와 부하들이 떠나지는 못하게 하였지만, 대우는 괜찮게 해줬다. 그러나 장건은 그래도 도망쳐서 계속 그의 서역과 연결하는 사명을 수행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다시 포로로 잡힌다. 이 박망후 장건이 다시 군신선우의 앞에 잡혀갔을 때도, 군신선우는 여전히 책망하지 않고, 그들 부부가 다시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게 영웅을 존경하는 문화환경하에서, 누군가 감히 나서서 한나라사신을 '거세'하려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역사상, 확실히 거세당한 한사가 있다. 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정말 울어야할지 웃어야할지 모르겠다.


이 한사의 이름은 계도(季都)이다. 한선제(漢宣帝)때 명을 받들어 부사(副使)로 오손(烏孫)에 간다. 그를 거세하라고 명한 사람은 바로 한선제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는 사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법도를 다 지켰다. 실절했다고 볼 여지는 없다. 그리고 정부에서 지시한 지시를 어기지도 않았다. 더더구나 기한을 어려서 돌아온 것도 아니고, 길을 잃은 것도 아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이 사신이 궁형까지 받게 된 것은 정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나라조정은 기세등등하게 그를 치죄한다.





이 일을 얘기하자면 계도가 속한 사신단의 사명부터 얘기해야 할 것이다. 그 사명은 바로 오손에 가서 하나의 '암살사건'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서, 암살의 대상이 된 사람은 오손국의 당시 국왕(현지에서는 곤미(昆彌)라고 불렀다)인 "광왕(狂王)" 니미(泥靡)였다; 그를 암살하려던 사람은 그의 처인 한나라에서 온 해우공주(解憂公主)와 한나라사신인 위여의(魏如意)와 임창(任昌)이었다.


오손은 한나라와 흉노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오갔던 나라이다. 군주는 왕왕 두 명의 왕후를 갖는데, 한 명은 흉노공주이고, 한명은 한나라공주이다. 니미의 전임인 오손국왕은 해우공주의 두번째남편인 옹귀미(翁歸靡)('비왕(肥王)'이라고 불리웠다)였다. 그가 죽은 후, 한왕조가 밀어주었던 후임국왕은 해우공주의 아들인 원귀미(元歸靡)이다. 옹귀미도 처음에는 이를 허락했었고, 한나라에서 공주를 맞이하여 며느리를 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니미는 윗대의 오손국왕 군수미(軍須靡)의 흉노공주 소생이다. 오손의 친흉노파에서 옹립하여 왕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즉위후에 친흉노정책을 쓴다. 이는 당시에 흉노와 전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던 한나라에 불리한 일이었다. 해우공주는 현지의 습속에 따라, 선왕의 왕후로서 신왕에게 시집가고, 니미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러나 둘은 하나는 친한파이고 하나는 친흉노파이다. 정치문제는 아들을 하나 낳앟다고 하여 완화되지 않았고, 시종 긴장상태였다. 오손은 이전에 계속하여 친한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니미의 이런 역행조치는 강력한 반대에 부닥친다. 국내의 국면도 아주 혼란스럽게 된다.


해우공주가 니미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역사기록을 보면, 해우공주는 기원전120년에 태어났고, 그녀는 기원전71년에 '비왕' 옹귀미와 함께 한나라군대와 힘을 합쳐서 흉노와 파리곤(巴里坤) 전투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그후에 옹귀미는 한나라에 공주를 며느리로 보내달라고 청한다. 그녀가 니미에게 시집을 간 것은 옹귀미 다음이다. 10개월간 임신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아들을 낳은 때는 분명히 이미 50이 넘어서이다. 한나라의 평균수명 25세를 감안하면 이런 나이에 아들을 낳는다는게 불가사의하다. 오늘날이라고 하더라도, 보기 드문 고령출산일 것이다. 아마도 역사기록이 잘못된 것이거나 혹은 해우공주가 무측천처럼 호르문분비가 당시의 보통 여자들과는 달랐을 수도 있다.


이전까지 한나라와 오손의 관계는 좋았었다. 쌍방의 사절이 계속 오갔다. 마침 군사마 위여의와 임창이 오손시자(侍子, 제후가 천자에게 인질로 보낸 아들)를 돌려보내주고 오는 길에 해우공주가 그들과 오손의 상황을 분석한다. 그리고 광왕의 통치기반이 불안정하므로 습격하여 죽일 수 있다고 본다. 아마도 위여의와 임창도 반초와 같은 성격이었던 것같다. 그래서 주연에서 광왕을 암살하는 것을 설계한다. 아쉽게도 반초의 담량은 있었지만, 반초의 수완은 없었다. 주연때 암살을 시도했지만, 광왕 니미를 찔러서 상처입혔을 뿐 그는 도주하고 만 것이다.  니미의 아들 세심수(細沈瘦)는 즉시 무리를 모아서 해우공주등을 오손국도성 적곡성(赤谷城)에 포위하고 몇개월간 포위공격을 펼친다. 한나라의 서역도호 정길(鄭吉)은 그 소식을 듣자 군대를 끌고 달려가서 포위를 풀 수 있었다. 암살후 오손의 각파는 긴장상태에 놓이고, 한선제는 사신 장옹(張翁)을 오손으로 파견하여 광왕을 다독이고, 이 암살사건을 처리한다. 이 일은 최종적으로 위여의, 임창에 사형판결을 내리고 장안으로 압송하여 처결하고, 한나라가 오손국왕 니미에게 금을 하사하고 의사를 보내어 치료해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번 사신의 활동에서 장옹은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국후에 처형된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 장옹은 일처리를 원만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위여의, 임창에 사형판결을 내린 것도 의심할 여지가 많다. 사형을 내렸으면 오손에서 집행하면 되지, 왜 만리나 멀리 떨어진 장안으로 데려갔는가. 장안으로 압송한 것이 단지 참수하기 위함인가. 이건 그냥 듣기에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때는 녹화나 사진이 없으므로 오손은 내란에 흔들리고 있으므로 광왕 니미로서는 직접 가서 위여의, 임창의 목을 베는 것을 볼 수도 없다. 이는 확실히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는 아마도 다르게 처리한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장옹의 문제는 한군이 이미 포위를 풀어줬는데도 너무 연약하게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해우공주에 대한 태도에서 문제가 컸다. 당시 해우공주는 장옹의 심리에 불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런데, 장옹은 해우공주의 머리카락을 붙잡아 끌며 욕을 했다고 한다. 이는 금기를 범한 것이다.


장옹의 뜻은 아마도 이를 통하여 한나라의 중앙정부는 암살사건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면서 양보하여 화해를 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해우공주의 신분을 얘기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 공주는 초왕 유무(劉戊)의 손녀이다. 유무는 칠국지란때의 수뇌인물중 하나이고, 패배하여 자살한다. 사후에 초국은 개봉(改封)되어 평륙후(平陸侯) 유례(劉醴)가 왕이 된다. 유무의 자손은 모조리 왕실족보에서 삭제되어 이미 서인(庶人)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101년, 원래 오손과 화친했던 세군공주(細君公主)가 죽자, 한무제는 유해우(劉解憂)를 공주로 책봉하여 화친사명을 집행하게 한다.


만일 지위의 각도에서 보자면, 해우공주는 죄인의 후손이다. 장옹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끌며 욕을 했다고 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어쨌든 종실인데, 이렇게 머리카락잡이를 다하게 되면 황실의 존엄이 어떻게 되겠는가? 서한왕조때 황실은 한사와 마찬가지로 죽일 수는 있지만 욕보일 수는 없는 존재였다. 장옹의 황실에 대한 행위는 잘못이었다. 그리하여 한선제의 불만을 산 것이다.


더더구나 그에게 설상가상인 것은 그가 이렇게 함으로써, 확실히 한왕조의 서역판도에 극히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우공주가 어떤 사람인가? 장안에서는 별다른 지위가 없다고 할 수 있어도, 서역에서는 바로 한황실의 브랜드를 상징한다. 그녀는 화친의 공주일 뿐아니라 대사(大使)이다. 한왕조의 전권대표인 것이다. 역사상 해우공주는 뛰어난 외교가이며 여성정치가였다. 서역에서 한황실을 수십년간 경영하면서, 아주 강대한 세력을 구축한다. 그녀와 옹귀미가 통치하던 시기는 오손의 최전성기이다. 그녀의 세 아들은 나중에 한 명은 오손국왕이 되고, 한 명은 사거왕(沙車王)이 되고, 한명은 오손의 대장이 된다. 그리고 딸 하나는 귀자(龜玆)의 황후가 된다. 그녀의 가족은 서역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니미를 암살하려한 배경에는 한나아의 대신인 소망지(蕭望之)등이 병력을 움직이다가 잘못 연루될 것을 겁내는 바람에 오손의 국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서역최대의 맹방이 흉노로 기우는데도 수수방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해우공주의 선택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 있는 오손의 친한파 세력들은 3개월간이나 적곡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한나라사신이 공주에게 이렇게 무혜한 태도를 보이다니 이는 확실히 오손의 친한세력을 무너뜨리고, 해우공주의 현지에서의 위망을 심각하게 해치는 일이다. 이는 한나라의 서역경영에 극히 불리하다.


그리고, 해우공주는 서역에서 한왕조에 거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인욕부중하며 전후로 3명의 오손왕에게 시집가서 오손과 한이 합쳐서 흉노를 치는 중임을 완수했다. 그리하여 흉노패망의 큰 공신이 되었고, 말년에는 장안으로 돌아가서 한선제의 존중을 받는다. 장옹은 이런 내막을 잘 몰랐던 것같다. 그래서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다. 그는 해우공주가 직접 한선제에게 보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모욕을 당한 후 그녀는 장안으로 서신을 보낸다. 이는 직접적으로 장옹에게 사형판결을 내리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원래 계도가 한 일이 없다. 그는 부사였고, 해우공주의 심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의 업무는 광왕 니미를 다독이는 것이었다. 그는 한나라에서 데려간 의원으로 하여금 니미를 치료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양국간의 관계를 크게 개선한다. 마지막으로 니미는 십여명의 기병을 보내어 그들이 떠나는데 호송한다. 석별의 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왜 조정은 그에게 궁형을 내렸을까?


<한서.서역전>에는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계도가 돌아왔따. 광왕은 마땅히 주살해야할 자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기회가 있음에도 손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궁형을 내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죄명인가? 이치대로라면 그는 아주 잘 자신의 임무 즉 국왕을 치료하고 양국관계를 개선하라는 임무를 완성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계도는 그 시대에 한나라의 정보요원이었다.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원래 임무는 해우공주를 도와 미수에 그친 암살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겁을 먹고 손을 쓰지 못했다. 그래서 형벌을 받은 것이라고. 그러나 역사상 그런 근거는 없다. 그저 마음대로 추측해서 해보는 말일 뿐이다.


계도가 궁형을 받은 것은 분명 억울하다. 그는 다른 나라로 가서 정변을 도모하고 국왕을 암살하는 것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여, 자신의 사신에게 궁형을 내리다니. 이게 무슨 나라인가? 잔혹하고, 패도적이고 가혹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한왕조의 강인함, 적극성, 그리고 무모함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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